[2022/09] 오리 이원익의 국난극복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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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삶 편하게 하는 ‘안민’의 길은
직접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에서 출발
글 | 최진홍(월간 순국 편집위원)
전쟁 초반에 평안도 중화읍 백성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당시 이 고을은 한 사람도 적에게 붙은 자가 없었으며, 전사한 자가 수천이나 되었다. 당시 평안도의 책임자가 바로 이원익이었다. 평안도 백성들은 이원익을 믿고 따랐다. 왜? 간단하다. 그가 신뢰를 주었으니까. 그런데 그 신뢰를 이념으로 줄 수 있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그들의 삶을 함께 고민해 줄 때만이 신뢰를 줄 수 있었다. 이원익은 바로 백성들의 삶 다시 말해 민생(民生)을 주목했던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안민(安民)’이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싶다. 백성의 삶을 편하게 하는 ‘안민’의 길은 백성의 삶을 직접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식민지 경험의 아픈 기억보다
그 어려움 이겨낸 사실에 주목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남이 대신 살아 줄 수 없다. 도대체 내 삶을 남이 어떻게 대신 살아줄 수 있단 말인가.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 역사는 이미 남이 대신 살아주는 기막힌 경험을 해 보았다. 일제 강점기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은 우리의 삶을 유린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착취하고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모르는 행복을 자신들이 보장해 줬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아무튼 우리는 우리의 삶을 대신 살아주겠다는 허구를 이겨 냈다. 여기서 나는 식민지를 경험했다는 아픈 기억보다는 그 어려움을 이겨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 어려움을 이겨낸 우리 민족의 저력은 어디에 있을까.
모든 역사는 서술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기술될 수 있다. 조선조가 망한 쪽에 초점을 두고 역사를 기술하는 이가 있는 반면, 조선의 역사가 500년이나 지속되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두는 이도 있다. 그렇다. 조선조가 망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초점을 500년간의 지속에 두면 500년 지속의 저력 또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가 망하는 것도, 500년이나 지속되는 것도 결국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이번 칼럼에서는 조선조가 500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저력이라는 다소 큰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큰 주제에 접근할 때에는 구체적인 실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체적 실례는 바로 400여 년 전 임진왜란 시의 인물 이원익(李元翼)이다.
태종의 5세손으로 태어나 88세라는 긴 생애를 살면서 40년 가까이 정승의 지위에 있었던 이원익은 선조, 광해군, 인조 세 임금 아래에서 각각 두 차례씩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이원익의 화려한 이력을 살펴보려는 것은 아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된 지 불과 보름 만에 선조는 피란을 준비한다.
그동안 우리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로 피란을 갔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정작 선조가 어떻게 피란을 갔는지에 대해서는 주목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에 ‘어떻게’ 피란 갔는지를 살펴보아야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평안도 책임자였던 이원익
임진왜란 희생자에 극진한 예우
이제 선조가 피란을 어떻게 갔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선조는 전쟁이 발발한 지 보름 후인 4월 28일 “적병이 깊숙이 침입해 들어와 남쪽 여러 고을들이 날마다 함락되고 있다. 경성 가까이 온다면 나는 관서(關西)로 피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관서로 피란을 가려는 이유에 대해 선조는 “이원익이 전에 안주를 다스릴 때 관서지방의 민심을 크게 얻었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지금까지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서 선조는 이원익으로 하여금 “평안도로 가서 부노(父老·마을의 중심이 되는 어른)들을 알아듣도록 설득하여 민심을 수습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당시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상황를 맞이한 선조가 생각한 것은 바로 관서지방의 백성들이 이원익만큼은 신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신뢰감은 조선이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하나의 불씨가 되었다.
이원익은 이들의 ‘각종 잡역(雜役)을 각별히 감하여 장려하는 뜻을 보여 줄 것’과 더불어 ‘이들이 지난번 과거를 치를 때에도 적의 토벌을 급선무로 삼아 그 때문에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뢰고 이들을 위해 국가에서 과거를 따로 시행해 줄 것을 역설하였다.
주목할 점은 이원익이 전쟁의 희생자를 기리고 그들의 희생을 보상하는 데 철저를 기할 것을 주문했다는 점이다. 국가가 지켜 주지도 못한 백성들, 그 백성들이 국가를 위해 죽어 갔는데 이들을 국가가 기리지 않는다면 국가는 두 번이나 실패를 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원익은 ‘전쟁터에서 죽거나 절의에 죽은 사람들’을 찾아내 자녀가 있는 사람은 그들이 거처하는 곳에서 별도로 휼전(恤典)을 베풀었다. 전쟁에서 희생자들에 대한 예우를 극진히 한 것이다. 이는 국가의 중요한 의무로 현재 우리 대한민국 보훈 정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렇다면 이원익은 어떻게 관서지방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이것이 핵심이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선조 20년(1587년)에 41세의 이원익은 안주 목사에 임명되어 4년간 근무했었다. 하지만 이미 26세 때인 선조 5년에 이원익은 황해도사 직을 수행했었다. 도사(都事)란 지금의 부지사와 비슷한 직책이다. 당시 관찰사가 오랫동안 공석이었으므로 이원익이 대신 맡아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였다. 특히 병적(兵籍)에 관한 일을 맡아서 완전하게 정리를 하여 전국에서 제일가게 만들었다.
당시 군정(軍政)은 상당히 문란하여 돈 있고 세력 있는 사람은 관리와 결탁하여 군역을 면제 받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군역을 지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병적을 만드는 일을 이원익은 공정하고 깔끔하게 처리하였던 것이다. 이때 황해도 관찰사로 이율곡이 부임하여 이원익의 능력을 확인하게 된다. 율곡이 이원익을 추천하여 중앙으로 오게 한 것이다.
이원익의 황해도 이력이 훗날 안주 목사 부임으로 이어졌다. 여러 해 재해와 수탈로 백성들이 피폐하고 영락한 안주는 관리들의 기피대상 1호였다. 선조가 모두들 기피하는 안주를 맡을 적임자를 추천하라고 했을 때 황해도사 시절 뛰어난 일처리를 보였던 이원익이 추천을 받아 부임하게 되었다.
그가 안주에 도착해서 목격한 것은 굶주려 죽어 가는 백성들이었다. 시급히 곡식이 필요했다. 우선 그는 안주의 관속들에게 선박을 동원하여 곡식이 저장되어 있는 해변 고을에 가서 대기할 것을 지시한 후, 자신은 곧장 평안도 감사에게 가서 곡식 대출을 신청하여 허락받는다.
감사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곧 곡물이 저장된 해변 고을로 가서 곡물을 꺼내 배에 싣고 안주로 운반한다. 이것으로 안주 백성들을 구제하고, 아울러 종자까지 나누어 주었다. 다행히 그해 가을에 크게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빌린 곡식을 갚았고, 안주 지역도 소생했다.
또한 당시 안주는 오랜 피폐로 군액(軍額)에 결원이 많았다. 그로 인해 친척이나 이웃이 피해를 입는 경우가 허다했다. 군대에 필요한 재정을 위해 마을별로 징포(徵布)를 부과했는데, 남아 있는 사람들이 떠난 사람들의 몫을 담당해야 했다.
이미 황해도에서 군적 작업을 하면서 누구보다도 군정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던 이원익은 창고에 있는 곡식으로 징포를 사서 중앙에 먼저 납부하고, 이 곡식은 풍족한 가을에 거두어 채우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이원익이 행한 방식은 있는 것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원익의 이러한 방식은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이원익의 안주에서의 선정은 조선을 살리는 불씨가 되었다. 평안도 지역 민심을 다독이는 수준을 넘어, 평안도를 전세 역전의 기반으로 만들었다.
당시 평안도 백성들은 이원익을 믿고 따랐다. 왜? 간단하다. 그가 신뢰를 주었으니까. 그런데 그 신뢰를 이념으로 줄 수 있을까? 천만에 말씀이다. 그들의 삶을 함께 고민해 줄 때만이 신뢰를 줄 수 있었다. 이원익은 바로 백성들의 삶 다시 말해 민생(民生)을 주목했던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안민(安民)’이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싶다. 백성의 삶을 편하게 하는 ‘안민’의 길은 백성의 삶을 직접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원익은 무엇보다도 백성의 삶, 즉 민생을 주목했고 함께 고민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안민’이란 단어의 상대어로 필자는 ‘애민(愛民)’을 꼽는다. ‘애민’이란 ‘백성을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안민’은 ‘백성이 편안하다’는 의미이다. ‘애민’은 이념으로 흐르는 경향이 강하다. 백성은 소외되고 그 용어만 남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백성이 편안하다는 ‘안민’은 백성이 소외되면 말 자체가 사라지고 마는, 다시 말해서 운명적으로 백성과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단어이다. 이원익은 애민이 아닌 안민에 주목했기에 평안도 백성들은 그를 신뢰했다.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율곡 연구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선임연구원을 역임했고, 지금은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로 있으면서, 이 시대가 당면한 수많은 문제를 풀어낼 지혜를 지나간 역사로부터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의 5대 직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