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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스크랩 [2020/10] 한말 호남의병과 녹천(鹿川) 고광순 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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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조차 고충신(高忠臣)이라 감탄한 의병장 

한말 호남의병을 주도하다 


글 | 고영진(광주대학교 교수)


고광순 의병장의 집안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충청도 금산에서 순국한 고경명, 고종후, 고인후 삼부자의 가문이었다. 고광순은 그 가운데서도 고인후의 제사를 모시고 있는 후손이었으니 태어나면서부터 절개와 의리가 높은 선비의 기운을 타고났다. 그는 의병을 일으킨 이후 집안일은 접어둔 채 오직 의병을 재기하겠다는 일념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고령의 나이로 오로지 충의에 의지하여 고군분투했다. 일제조차 그를 호남의병의 선구자 혹은 고충신(高忠臣)이라 부르며 감탄할 정도로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호남지역은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다. 역사적으로 본 호남문화의 특징은 크게 여섯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가 풍요로운 자연환경, 둘째가 개방적 · 진취적 문화, 셋째가 뚜렷한 명분과 자주의식, 넷째가 절의 · 비판 · 실천정신, 다섯째가 大義를 위한 희생정신, 여섯째가 예술과 종교로의 숭화 등이다.


 이 중에서 호남문화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은 ‘대의를 위한 희생정신’이 아닐까 생각된다. 호남 역사에서 이는 수많은 의병장들의 순절을 가져온 임진왜란 의병, 반제국주의 반봉건의 깃발을 높이 올린 동학농민전쟁, 일본의 조선 병합 시기를 늦추게 한 한말 의병전쟁, 식민지시기 3대 민족운동의 하나였던 광주학생독립운동, 그리고 현대 민주주의와 인권운동의 모범이 된 5.18 광주민중항쟁 등에서 잘 드러난다. 


 동아시아 국제전쟁이자 노예전쟁이었던 임진왜란, 상처뿐인 승리였지만 그나마 숭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의병들의 항쟁이었다. 부산에 도착한 지 20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2달 만에 평양을 점령하는 등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의 기세를 여지없이 꺾어버리고 전세를 뒤바꿔 버리는 데 의병들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평민과 천민의병장도 있었던 한말과는 달리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은 거의 대부분 향촌의 지배층인 사림이었다. 즉 사림 가운데 명망이 있는자가 창의하여 문인과 지인(知人)들의 호응을 얻은 다음 그 호응자들이 다시 자기 지역에서 의병을 조직해 나갔다.


 그러나 사림이 아무리 의병을 일으키려 해도 실제로 싸워야할 일반민들이 호응하지 않는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시상황에서 의병에 참가한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담보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임란 당시 일반민들은 의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는 국난을 극복해 보겠다는 의지에서 나오기도 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사림의병장에 대한 신뢰에서였다. 평소에 향촌사회에서 사림이 보여준 솔선수범과 애민의식이 일반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과 금산성 전투


  고경명은 임진왜란 직후인 1592년 5월 전남 담양에서 6,000여 명의 의병을 일으켜 금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금산성 전투에서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관군의 방어선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고경명은 의병만이라도 대항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의병 진영도 무너지기 시작한 뒤였다. 위급에 처한 그에게 주위에서는 후일을 기약하고 피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패전하였으니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면서 거절하고 장렬히 순절하였다. 같이 의병을 일으켰던 유팽노와 안영 등도 고경명의 몸을 감싼 채 적의 칼날을 받아 전사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은 관직에서 물러나 향존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 나라를 책임질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라를 책임진 관료나 수령 · 장수들이 도망갈 때 오히려 그는 환갑의 나이에 앞장서 의병을 일으키고 일본군과 대적하여 두 아들과 더불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버렸다.


 금산성 싸움에서 고경명 의병은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패전하였다. 그러나 패전했다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본군의 예기를 꺾음으로써 적의 전주성 점령 기도를 좌절시켰고 이로써 호남지역을 보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라도는 전쟁물자의 보급기지로서,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수군활동의 후방기지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되었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급급했던 관군지휘부와는 달리 고경명을 비롯한 의병지휘부의 죽음도 마다 않는 실천적 행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겼으며 전국 각지에서 의병항쟁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의병 지휘부가 순절함으로써 고경명 의병은 와해되었지만 오히려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어갔다.


 고경명은 자신뿐만 아니라 둘째 아들인 고인후가 금산성싸움에서 같이 순절하였으며 큰 아들인 고종후와 서제(庶弟)인 고경형은 이듬해 6월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남강에 투신하였고, 집안의 노비인 봉이와 귀인도 따라 투신하였다. 또 다른 서제인 고경신은 고종후의 군관으로 격문을 가지고 제주로 가다가 표류하여 죽었다. 또한 둘째 딸과 조카딸은 정유재란 때 일본군을 만나 절개를 굽히지 않고 자결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순절하였지만 한 집안에서 이렇게 많은 순절자가 나온 경우도 드물다고 할 수 있다.


녹천 고광순, 고경명의 후예로 임란의병의 전통 계승


임진왜란 때 호남의병의 전통은 한말 호남의병에게도 그대로 전해졌으며 이는 창평의 고씨집안들도 마찬가지였다. 고인후의 종손인 고광순은 1895년 의병을 창의할 때 올린 상소에서 임란의병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더욱이 신의 선조인 충렬공 고경명과 효열공 고종후, 의열공 고인후 등 3부자가 임진왜란 때 순절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忠孝古家’라 부릅니다. 여러 임금들이 보상하는 법에 의해 자손들에게 내려준 국은은 하늘같이 높고 땅처럼 두터웠습니다. 신은 곧 의열공의 사손(祀孫)으로 조상의 교훈을 지켰으니 임금을 그리는 마음이 일분일초라도 어느 가문에게나 양보할 수 있겠습니까?62)


 아울러 이 상소에는 임진왜란에 참여한 호남의병의 후예로서의 자금심과 책임감이 잘 드러나 있다. 고광순은 환갑의 나이인 60세에 순절하였다. 고경명도 마찬가지로 60세에 순절하였다. 조상과 후손이 315년 간격으로 똑같은 나이에 의병으로 나섰다 똑같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우연의 일치로 돌리기에는 상황이 너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말 호남의병을 주도한 인물 중에는 고광순 외에도 상당수가 임진왜란 때 참여한 의병들의 후손이었다.  


 한말의 의병전쟁은 크게 3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때문에 일어난 을미의병이고 두 번째는 1905년 을사늑약 때문에 일어난 을사의병(병오의병), 세 번째는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과 정미7조약, 고종 하야 등으로 일어난 정미의병이다. 한편으로는 을미의병을 전기의병, 을사의병을 중기의병, 정미의병을 후기의병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고관순 의병을 첫 시기인 을미의병 때 일어나 세 번째 시기인 정미의병 때까지 10여 년간 지속되었다. 고광순은 호남의병장 중에 전기 · 중기 · 후기 의병에 모두 참여한 드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광순 선생이 순절하고 나서도 그 부하들이 계속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일제도 ‘호남의병의 선구자’ 또는 ‘고충신(高忠臣)’이라고 부르며 감탄할 정도로 호남지역의 의병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한말 의병전쟁의 대표적인 의병장 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의로써 함께 일어섰으니 의로써 함께 죽는 것은 당연


1895년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고광순은 상소를 올려 “국사를 그르치고 있는 큰 괴수들을 먼저 죽여 국법을 밝히고 나라를 망치는 왜적을 속히 무찔러 나라의 원수를 갚아야 된다”고 주장하고 장성의 기우만 기삼연 등과 연락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북상계획을 세웠으나 때마침 조정에서 내려 온 선유사 신기선의 고종의 해산 명령에 따라 해산하였다.


 그러나 의병 해산 이후에도 고광순은 집안일을 접어둔 채 의병활동에 전념하였다. 10년 동안 의기있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동지를 규합하고 의병의 재봉기를 준비하였다. 또한 고씨 문중의 많은 사람들이 의병 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대고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듬해인 1905년 고광순은 다시 최익현 · 기우만 · 백낙구 · 양한구 등과 의병을 일으켰으나 최익현이 체포되는 바람에 해산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창평 저산에서 다시 창의의 깃발을 올렸다. 여기 참여한 사람들은 고광순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다음과 같이 의진을 구성하였다.


  의 병 장 : 고광순

  부의병장 ; 고제량

  선 봉 장 : 고광수

  좌 익 장 : 고광훈

  우 익 장 : 고광재

  참    모 : 박기덕, 고광문

  호    군 : 윤영기

  종    사 : 신덕군, 조동규


 창평지역, 특히 유천리의 고씨들이 대거 참여한 것이 눈에 띤다. 천석꾼인 남원의 고광수는 자신의 재산을 의병활동에 다 썼다고도 한다. 이후 고광순 의병은 양한규 의병과 협력하여 남원 점령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며 게릴라전을 펼치며 관군, 일본군과 맞서 화순읍을 점령해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집과 상점 10여 호를 불태우고 동복의 헌병분견소를 공격하여 점령하는 등 적지 않은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광순 선생은 압도적인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에 게릴라식 방식의 의병활동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새로운 근거지를 바탕으로 장기지속적인 항전태세를 갖춘다는 전략을 마련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자리산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등 3개도와 남원, 구례 하동, 함양, 산청 등 5개군을 아우르는 웅대한 산으로 의병 본거지로 삼기에 적합했으며 동시에 호남과 영남의 여러 의병세력 간 연락하기도 편리한 이점도 있었다. 특히 피아골은 입지 조건이 좋았다. 골짜기가 깊은데다 동쪽엔 화개동, 서쪽으로는 구례, 북쪽으로는 문수골과 문수암 등이 자리한 천혜의 요새로서 장기전에 더없이 유리한 지형적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고광순 선생은 피아골의 중심인 연곡사에서 민간인 포수를 모집하여 의병으로 훈련시켜 강력한 일제의 군경과 맞설 만큼의 전력을 축적할 생각이었다.


 이때 고광순은 ‘불원복(不遠復)’ 세 자를 쓴 태극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불원복은 『주역』 복괘(卜卦)의 “다 없어졌던 양기가 멀지 않아 회복된다”는 뜻으로서 나라를 곧 찾게 되니 힘껏 싸우자는 고무와 격려의 의미도 담겨져 있었다. 강렬한 신념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불원복기를 흔들며 고광순 선생이 돌격 명령을 내리면 의병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으며 아침저녁으로 불원복기에 배례를 하며 조국의 자주독립을 기원했다고 한다.


  고광순 의병이 지리산에 들어올 무렵 김동신 의병이 전북 순창읍의 우편취급소 및 분파소를 습격한 뒤 지리산 문수암으로 들어오자 일본군들이 쫒아와 화개동이 주둔하였다. 그러자 고광순 의병은 화개동의 일본군을 공격해 쫒아내기도 하였다. 이후 고광순 의병은 일본군의 반격에 대비해 화개동으로 출동해 대비하고 있었으나 중대 병력의 일본군은 오히려 10월 16일 연곡사로 직접 공격해와 결국 연곡사에 있던 고광순 선생과 10여 명의 의병들은 모두 순절하였다.


 그날 새벽 일본군이 연곡사를 포위한 채 공격하자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감지한 고광순은 부하들에게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내가 평소 마음을 정한 바이다. 여러분은 나를 위해 염려하지 말고 각자 도모하라”고 하였으나 부장 고제량은 “당초 의로써 함께 일어섰으니 마침내 의로써 함께 죽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죽음에 임해 어찌 혼자 살기를 바라겠는가” 대답하며 죽음을 함께 할 것을 맹약하고 모두 일본군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당시 고광순과 같이 연곡사에 남아 일본군과 싸우다 죽은 의병 가운데도 창평 고씨들이 적지 않았다. 고광순이 순절한 이후에도 고광수와 고광문 등 살아남은 사람들은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지리산 주변의 구례, 남원, 곡성 그리고 무등산 일대를 중심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이처럼 고광순과 창평 고씨들을 비롯한 호남지역 의병들의 치열한 저항으로 일본제국주의는 1909년 예정인 한일병합을 연기하고 호남지역의 의병을 소탕하는 남한대토벌작전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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