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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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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과 제자를 남기기 위한 일생의 공부 


‘대롱시각’ 벗어나 역사 지평 넓히고

무명무후 순국선열 이야기 더 발굴해야


인터뷰 | 심재추 월간 순국 편집주간

글·사진 | 편집부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고드름으로 허기진 밤을 달래야 했던 어린 시절, 공부는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 친구들이 교복 입고 재잘거리며 신작로를 뛰어갈 때 무거운 나뭇지게를 지고 고개를 숙인 채 걸어야 했다. 몸이 허약해 병치레도 잦았다. 그래도 책 읽고 공부할 때면 즐거웠다. 장학생으로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교수가 된 이후엔 성직자처럼 살려고 노력했으나 뜻과 같지 않았다. 강의안을 세 번 복습한 다음 미사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강의실에 들어갔다. 학문은 끝이 없고, 가르침은 늘 두려웠다. 정년퇴임 후에야 불면과 불안신경증에서 벗어났다. 교단을 떠난 지 만 10년이 지났건만, 새벽 2시에 잠드는 습관은 변함없다. “후손들이 조금의 진리라도 깨닫도록 좋은 글과 제자를 남기려고” 평생 딸깍발이로 살아온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정치사)를 지난 9월 16일 만났다. 


첫 눈인사를 나누며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떠올랐다. 얼마 전, 그 책을 우연히 다시 읽으며 비로소 마지막 문장에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그루터기에 앉았다. 나무는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했다.” 어릴 적엔 소년이 밉고 나무가 마냥 안쓰러웠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소년에게 모든 걸 아낌없이 내어준 나무의 행복을…. 


상념을 서둘러 잘라내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나무를 담은 노학자는 정갈한 언어에 마음을 담아내듯 천천히 대화를 이어갔다.


“정년퇴직했던 70세 때와 별로 달라진 것은 없어요. 고혈압 약 타러 가는 일과 성당 가는 일 그리고 가끔 친구 만나러 서울로 올라가는 일, 2~3주에 한 번씩 모교 도서관에 가는 일, 이런 일이 없으면 집에서 글을 씁니다.” 


요즘은 몇 가지 개정판 작업과 우리말로 『성경』 다듬는 작업을 하고 있단다. 2017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성경 다듬기를 시작해 여섯 번째 읽었는데 아직도 손볼 곳이 좀 남았다고 했다. 광동어(廣東語)와 영미식 문장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성경 문장을 우리 말로 다듬는 작업이 어느새 만 5년이 되어간다. “출판은 엄두도 못 내고 동호인들끼리 나눠 보고 후대에 누군가 눈여겨볼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소탈한 미소 안에 무욕(無慾)과 지족(知足)의 시간이 유유히 흘러가는 듯했다. 


‘수불석권’ 마음 중심에 두고 평생 손에서 책 놓지 않으려 했으나


그는 평생 손에서 책을 놓아 본 적이 없다. 매일 새벽 2시까지 책 읽고 공부하는 생활을 해왔다. 시간 강사 시절부터 정년퇴임 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서른부터 팔순까지 반세기 넘도록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나온 “공부는 죽어야 끝난다”(學者沒身已矣)를 마음의 중심에 두고, “빈둥거림은 죄악”이라는 신념 속에서 살아왔다. 1979년 대학교수가 된 후 42년간 저서 26권, 번역 52권, 논문 121편, 자료집 8권, 서평 31편을 냈다. 지난해 9월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이니, 일 년 사이 숫자는 더 늘었을 게다. 


“가진 재주가 글쓰기밖에 없었기 때문이에요. 저는 구멍가게 하나도 추스르지 못할 무능한 사람입니다. 처자식 굶기기 딱 좋은 남자이지요. 그리고 세상 풍파 겪어 보니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 몸이 허약해 병치레도 잦았어요. 언제인가 친구가 건강의 비결을 묻더군요. 얼떨결에 ‘어려서 잔병치레를 많이 한 탓인가 봐.’라고 대답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런 명답이 없더군요. 부모님이 주신 은혜로 하루 10시간 의자에 앉아 있어도 아직은 허리 아픈 줄을 모릅니다. 지난주에 선 채로 100분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니 허리에 통증이 오더군요. 지난해까지도 그렇지 않았는데…. 낙엽이 흘러가기에 무심코 바라보니 그것은 낙엽이 아니고 세월이더군요. 약으로 세월을 이기려니 힘듭니다.”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고드름으로 허기진 밤을 달래야 했던 어린 시절, 공부는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 친구들이 교복 입고 재잘거리며 신작로를 뛰어갈 때 그는 고개를 숙인 채 무거운 나뭇지게를 지고 걸어야 했다. 그래도 책 읽고 공부할 때면 즐거웠다. 1961년 건국대학교에서 졸업까지 장학생이었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1979년 서른여덟에 교수가 된 이후엔 성직자처럼 살려고 노력했으나 뜻과 같지 않았다. 성경을 읽듯 간절함으로 책을 읽고, 강의안을 세 번 복습한 다음, 미사에 들어가는 심정으로 강의실에 들어갔다. 학문은 끝이 없고, 가르침은 늘 두려웠다. 정년퇴직 후에야 비로소 불면과 불안신경증에서 벗어났다. 


“한국사에 그리 좋은 기억을 남기지 못한 당태종(唐太宗)이 저의 사표(師表)였어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제왕의 꿈을 꾸었다는 것은 아니고, 호학(好學)하는 자세를 본보기로 삼았지요. 당태종의 평생 경구는 수불석권(手不釋卷 : 내 평생토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즐풍목우(櫛風沐雨 : 바람결에 머리를 빗고 빗물에 몸을 씻을 정도로 국가를 위해 바쁘고 열심히 산다), 군신감계(君臣鑑戒 : 왕은 신하를 볼 때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듯 하고, 신하는 왕을 볼 때 간언을 생각해야 한다)였어요.” 


나쁜 사람 무수히 만날 수 있으니

착하게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살라


그는 지난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과 『삼국지』 완역 출간을 이루었다. 둘 다 모두 전 5권,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1만 2,000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자료 수집에 20여 년을 준비했고, 번역에 5년, 출판에 5년 걸렸다.


“춥고 배고프던 소년 시절, 진학을 못 하고 청계천 부근 시구문 시장에서 점원을 했어요. 그때 가끔 가까운 청계천 고물 서점을 찾아가 책을 샀는데, 그때 읽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과 『삼국지』가 지금 제가 크게 이룬 것은 없지만, 이나마 사람 노릇 하며 사는 희망과 꿈을 주었어요. 세월이 흘러 대학 강단에 섰을 때, 훗날 퇴직을 하면 이 두 권을 완역하겠다는 것이 젊은 날의 버킷 리스트였어요. 현재 우리나라에 『삼국지』가 400종 정도 되지만 완역의 주석본은 저의 판본이 처음인 것 같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1,500년을 지나오면서 일실(逸失)된 7편을 복원했다는 점에서 남다름을 느끼고 있어요.” 


교수 생활 중 틈틈이 13종의 영웅전 판본을 수집해 비교해왔다. 2007년부터 번역에 본격 착수해 2012년까지 5년 동안 학교에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집에선 『삼국지』를 번역해 초역을 마쳤다.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으며 2015년 완역했으나 출판사를 찾는 데만 4년이 걸렸다. 온 힘을 쏟아 낸 처절한 마라톤은 30년 동안 이어져, 마침내 팔순에 이르러 완주의 기쁨을 누렸다.


“영웅의 삶은 동서양이나 고금을 통해 그리 다르지 않아요. 우수한 두뇌, 초인적 독서, 강인한 체력, 우국심, 우정, 효도, 염직(廉直)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장엄한 죽음입니다. 비열하게 죽은 사람은 생전의 공업(功業)이 아무리 훌륭해도 영웅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어요.” 


동서양의 대표 영웅전들을 완역하면서, 그는 두 영웅전이 전통적인 우리의 영웅전이나 위인전과 다른 점 세 가지를 발견했다. 첫째, 우리의 영웅전은 영웅이 성인(聖人)이기를 요구한다는 것. 영웅에겐 흠결도 없고 오로지 훌륭함만 보여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다. “위인에게 인간적인 모습이 보일 때 우리는 자녀들에게 ‘그러니 너도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어’라고 가르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무엇보다 두 영웅전은 ‘당신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쁜 사람을 무수히 만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어요. 세상은 진보한다고 믿고 싶지만, 악도 진보하거든요. 유토피아는 끝내 오지 않아요.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로 우리는 자손들을 속였을지 몰라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착하고 무능한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나 『삼국지』는 ‘착하게 살지 말고 지혜롭게 살라’고 권고합니다. 『구약성경』을 번역하고 어휘를 검색해 보니 ‘사랑하라’는 말이 350회 나오고 ‘지혜롭게 살라’는 말이 750번이 나오더군요. 변용된 어휘를 계산하면 좀 다르겠지요. 세상에는 ‘착한 사마리아인’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지요.”


못 배우고 가난한 후손들 아픔으로 남아

친일파 걸러내지 못한 부분 가장 아쉬워


그는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를 취득했다. 1979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전공 교수직을 맡아 2007년에 퇴직을 했고, 그동안의 연구 업적을 고려하여 5년의 석좌교수로 연장 근무하여 2012년 다시 정년 퇴임을 했다. 연구서 『한국분단사연구 : 1943-1953』와 『한국정치사상사』로 한국정치학회가 선정한 저술상(2001년)과 인재(仁齋)학술상(2011년)을 수상했다. 퇴직할 때까지 4회 연속(2004~2006년) 건국대 우수 교수(Best Teacher Award)로 뽑혔으며, 2007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임용되었다. 정치학계에서 몇 편의 문제작을 썼다.


정치학뿐 아니라 역사와도 인연이 깊었다. 『동학사상(東學思想)과 한국 민족주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76년부터 4년여간 5천여 킬로미터 현장 답사를 통해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의 삶과 사상, 행적을 저술한 『전봉준 평전(評傳)』(1981년)은 현재까지도 독보적 가치를 지닌 저서로 평가받는다. “한낱 시골의 서생에 지나지 않았으나 춘추대의를 위해 죽은 전봉준의 삶을 증언하고 후대에 들려주고 싶어” 그는 고난의 작업을 자처했다. 


20여 년 전 펴낸 『한국사 새로 보기』에서는 기존 사학을 비판하는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책 머리에 ‘패자에게 연민을 느낀다’는 무어(Barrington Moore)의 말을 인용했다. 이 책은 『잘못 배운 한국사』로 제목을 바꿔서 올해 1월 개정판이 나왔다. 


“소설가 이병주(李炳注) 선생의 말을 빌리면, ‘승자의 기록은 햇볕을 받아 역사가 되고, 패자의 기록은 달빛을 받아 전설이 된다’고 하더군요. 저는 역사학을 공부하면서 억눌린 무리에 대한 연민을 잊은 적이 없어요. 제가 바로 그 출신이기 때문이지요. 역사가를 배출하지 못한 계급은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는 현실을 견딜 수도 없었고, 용서할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저의 글은 우상 파괴의 역사학(Iconoclasm)입니다.”


한국사 연구에서 가장 큰 그의 업적을 꼽으라면 『한말외국인기록』을 빼놓을 수 없다. 1973년부터 27년에 걸쳐 번역한 23권짜리 전집으로, 2019년 전면개정판 11책으로 재출간되었다. 1960년대 말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63~1949)의 『대한제국멸망사』(1906)를 처음 보면서 ‘한국사에 대한 외국인 기록을 왜 우리는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을까?’ 하는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에, 번역을 시작하게 됐단다. 


“우리의 역사학은 대롱 시각[管見]이었어요. 『삼국사기』, 『삼국유사』, 『조선왕조실록』만으로는 한국의 역사를 알 수 없어요. 그런 점에서 한국의 역사는 더 지평을 넓혀야 해요. 원시시대에 동굴 속에 살던 사람이 남쪽으로 향한 동굴의 입구를 보고 ‘동이 튼다’고 말한 어리석음을 피해야 해요. 어느 학자가 ‘한국의 개화사 연구는 신복룡의 『한말외국인기록』 23권이 나오기 이전과 그 이후로 시대 구분을 해야 한다’고 했던 말을 평생의 과분한 영광으로 가슴에 담고 있어요.”


그는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서훈심사위원으로 13년, 위원장으로 9년간 활동했다. 그의 가슴속엔 못 배우고 가난해 서훈 신청조차 하지 못했던 후손들이 여전히 아픔으로 남아 있다. 무엇보다 외압에 의해 친일파를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 부분이 가장 아쉽다고 했다. 이어 월간 『순국』에 애정 어린 조언을 건넸다. “무명 선열 이야기를 더 발굴했으면 좋겠고, 외국의 애국지사 예우는 어떻게 되는지도 얘기해주면 좋겠어요.” 짧은 한마디에서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민이 묻어났다.


마지막으로 팔십 평생 가장 뜻깊은 일을 물었다. 그는 “교수가 된 것, 교수 재임 중에 네 번 우수교수상을 받고, 두 번 정치학회 학술상을 받아 건국대학교에서 첫 학술 석좌교수로 임명받은 것. 그리고 아내를 만나 3남매에 여섯 손주를 둔 것”을 꼽았다. 공부와 가족, 군더더기 없는 단순의 미학이다.


북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한 어느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하고 밖으로 나왔다. 커다란 느티나무 옆에 서 있는 노학자의 뒷모습을 보며, 참 닮았구나 싶었다. 인간이라는 대지에 뿌리내리고, 정치·역사·철학 등 굵은 가지를 여럿 내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는 열과 성으로 인생이라는 나무를 키워온 한 남자의 뒷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속 소년처럼, 나뭇가지에 그네 하나 매달아 살랑살랑 흔들며 인생의 나무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고픈, 그런 가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