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 광화문 별곡(別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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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안보는 자유 수호의 의지
오직 국민만 바라보고, 이 나라 위해 일하자
글 | 김세원(월간 순국 편집위원 · 가톨릭대학교 교수)
2022년 3월 20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용산 국방부 청사로의 대통령 집무실 이전’을 발표했다. 윤 당선인이 후보시절 공약으로 내세웠던 ‘광화문 정부서울청사나 외교부 청사로의 이전’ 방안은 시민 불편을 근거로 사실상 무산됐다. 필자는 광화문광장을 지켜온 세종대왕과 충무공 이순신 동상, 그리고 해치 석상간의 가상 정담(鼎談)를 통해 청와대 터에 얽힌 사연과 청와대 대통령 시대를 마감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보려 한다.
백성 소통하고 공직자 바른 마음 위해
광화문 상징물 건립
세종대왕 역병이 창궐하기 전에는 날이면 날마다 시위에 시달렸고 코로나 이후로는 잠잠한가 싶더니 언제부턴가 공사하는 소리에 편히 쉴 틈이 없구려. 내가 이렇게 경들을 소집한 것은 세상이 대통령 집무실 자리를 놓고 시끄러운데 경들의 의견은 어떤지 듣고 싶어서네.
충무공 편하게 말씀을 나누기 위해 소인이 전하 쪽으로 돌아서는 것을 윤허하여 주십시오.
해치 제가 비록 사람은 아니오나 광화문광장으로 전입한 역사로 치면 소인이 제일 오래 되었사옵니다. 제가 광화문에 자리잡은 건 경복궁을 중건한 1865년이옵니다. 고종 즉위 후 섭정을 맡게 된 대원군이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 300여 년 동안 방치된 경복궁을 중건하고 육조거리를 복원하면서 저의 석상을 세우게 되었사옵니다. 충무공 소신의 동상은 1968년 4월 27일 건립되었사옵니다. 조각가 김세중 서울대 미대교수가 제작한 청동입상으로 기단(10.5m)과 동상(6.5m)을 포함한 전체 높이가 17m로 당시 동양 최대 규모였습니다. 원래 여기에는 미술대학생들이 만든 37기의 석고위인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1966년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총재로 하는 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가 발족하여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신의 동상을 세우기로 하였다고 하옵니다. 세종대왕 짐의 동상은 2009년 한글날 짐이 즉위식을 올렸던 경복궁과 광화문 앞에 건립되었다오. 6개월 동안 여론을 수렴하고 공론화의 과정 및 자문과 고증을 거친 끝에 53명의 조각가 중에서 김영원 홍익대 교수의 작품이 선정되었다고 들었소. 높이 9.5m, 폭 4.3m의 청동좌상으로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신하들에게 `‘훈민정음을 온 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쓰게 하라’고 장려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하오. 충무공 전체적으로 눈높이를 낮추어 백성들과 소통하는 전하의 애민사상을 담았고, 용안은 온화하고 인자하며 지혜로운 성군(聖君)의 모습이옵니다. 세종대왕 허허. 쑥스럽구려. 세종대왕 사헌부는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 탄핵하는 일이 주업무로 지금으로 치면 검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오. 사헌부 관리들은 해치관을 쓰고 매일 아침 출근길에 자네의 꼬리를 쓰다듬으면서 공명정대하게 정사를 돌보겠다고 다짐했었을 걸세. 사헌부 정문 앞에 자네의 석상을 세웠던 까닭은 공직자로서의 바른 태도와 곧은 마음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던 것이지. 청와대는 삼각산 정기 이어받은 예로부터 유서깊은 곳 해치 청와대가 위치한 산자락은 삼각산(三角山)의 정기를 이어받아 북악을 거쳐 경복궁(景福宮) 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명당(明堂)으로 알려져 일찍이 고려 시대인 1104년 왕실의 이궁(離宮)이 건립되었다고 하옵니다. 그러다가 조선 개국 초 경복궁(景福宮)이 창건되면서 그 후원이 되었고 고종 5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융문당, 오운각 등 건물이 들어서고 농사가 국사의 근본임을 일깨우기 위해 임금이 손수 가꾸던 8배미의 논이 있던 역사적으로도 유서깊은 곳이옵니다. 이곳에 일제(日帝)는 1939년 7월 총독관사를 건립함으로써 조선총독부 청사(구 중앙청)와 더불어 외세침탈의 상징이 되었사옵니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1948년 3월까지 미군정사령관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경무대, 청와대로 이름이 바뀌어 가며 역대 대통령의 집무실 및 관저로 이용되었습지요. 구 청와대 건물은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국민의 자긍심을 되살린다는 의미에서 중앙청 건물과 함께 철거되었습니다. 세종대왕 청와대 터는 예로부터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고 알려졌던 곳인데 왜 풍수적으로 흉지라고들 하는지 모르겠소. 충무공 그것은 역대 대통령 중에 청와대를 나간 뒤 평화로운 여생을 보낸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옵니다. 대개 감옥에 갔고 살해당하거나 스스로 목숨까지 끊은 사람이 있지 않았사옵니까? 그러나 그것은 청와대를 거쳐간 사람의 문제이지 터가 나빠서가 아니라고 생각되옵니다. 세종대왕 궁금한 것이 있소.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시절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천명하였소. “조선총독부 관저, 경무대에서 이어진 청와대는, 지난 우리 역사에서 독재와 권위주의 권력의 상징, 제왕적 대통령 문화의 상징이었다”며 “청와대를 개방해서 국민에게 돌려드리겠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그의 뒤를 이을 윤석열 당선인이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기겠다고 하자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이오? 해치 안보 공백을 우려해서 반대하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 계획이 발표된지 하루만에 용산 이전이 타당한지를 논의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 참석해 올해 북한이 탄도미사일과 방사포 등으로 연쇄 도발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을 언급하며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와 국방부, 합참 등을 연쇄적으로 옮기면 안보 공백과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옵니다. 문 대통령은 또한 “4월은 북한의 연례적 행사와 함께 한미간 연례적인 훈련 행사가 예정되어 있어 한반도의 안보 위기가 가장 고조되는 상황”이라면서 “임기가 끝나는 마지막 날 밤 12시까지 국가 안보와 군 통수는 현 정부와 현 대통령의 내려놓을 수 없는 책무”라고 강조했다 하옵니다. 국민생명 지키고, 자유 수호하겠다는 의지 더욱 굳건해야 세종대왕 그동안 청와대가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기관의 상징이자 대통령을 국민들로부터 철저하게 격리하는 구중궁궐이었소. 심지어 대통령비서실조차 대통령과 멀리 떨어져서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만나려 해도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권위적인 곳이라 들었소. 윤석열 당선인이 공표한 대로 ‘봄꽃이 지기 전에’ 청와대를 국민들에게 돌려주기는 쉽지 않겠지만 용산 대통령 시대의 개막과 함께 권위적, 제왕적 대통령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 같소. 충무공 소신이 임진왜란 당시, 압도적으로 우세한 왜적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백성들과 어울리며 지형과 해류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일본군의 정세를 탐지했던 유비무환의 정신 덕분이었사옵니다.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국군통수권자로서의 책무입니다. 건물마다 지하 벙커와 헬기장이 있어 전시 지휘와 긴급대피가 가능한 국방부 자리에 집무실을 이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사료되옵니다. 해치 전하와 충무공, 소신이 현실세계에서 살았던 조선은 전제군주국이었지만 지금 우리 후손들은 대한민국이란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에 살고 있습니다. 소신이 생각하기에 최고의 안보는 자유 수호의 의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자신과 후손이 누릴 자유를 위협하는 어떠한 세력도 맞서 싸우겠다고 하는 국민들의 다짐이야말로 가장 굳건한 안보가 아닐까 싶사옵니다. 소생이 그동안 화재를 막기 위해 풍수지리상 경복궁의 조산(祖山)에 해당하는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는 데만 집중하다보니 권력을 얻기 위해 감언이설과 거짓말로 국민을 눈멀게 하는 자들이 청와대와 광화문광장에 득실거리게 된 듯 하옵니다. 이제 시비곡직을 분별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본연의 소명에 충실하여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것입니다. 고려대학교 불문학과를 나와 고려대 정치학 석사 및 뉴욕주립대 기술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고려대학교에서 국제통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와 파리특파원, 고려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아주경제 논설고문을 지내고, 현재 가톨릭대학교 교수와 월간 순국 편집위원으로 있다. ‘포스트휴먼의 초상’, ‘문화코드로 읽는 지구’, ‘문화로 세상 읽기’ 등 여덟 권의 책과 다수의 논문들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