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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 추강 김지섭 일왕 궁성을 겨누다 추강은 경관을 향하여 폭탄 한 발을 힘껏 던지고, 니주바시 건너편 궁성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폭탄 두 발을 모두 던졌다. 추강이 던진 폭탄 3발이 모두 불발이었다. 이를 어찌하랴! 습기가 많은 화물선을 타고 오는 여러 날 폭탄의 화약이 모두 젖은 탓이었다. 폭탄투척사건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지만, 일본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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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 ‘105인 사건’ 신민회의 해산으로 이어지다 일본 경찰은 안명근을 신민회와 연관시켜 신민회 회장 윤치호를 비롯한 양기탁·이승훈·안태국·류동열 등의 주요인사 600여 명을 검거하고, 그중 123명을 기소하였다. 이때가 1911년 1월이었다. 이 사건으로 105명이 유죄판결을 받게 됨으로써 뒷날 이 사건을 ‘105인 사건’으로 부르게 되었다.‘105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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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 베트남전쟁의 영웅 채명신 장군 2013년 11월 28일, 채명신 장군은 국립서울현충원 제2묘역 베트남전쟁에서 숨진 971명의 병사들이 잠들어있는 앞자리에 안장되었다. 채 장군은 생전에 “현충원 묘역을 바라다보면서 베트남전쟁에서 생사를 같이 했던 병사들과 함께 묻히고 싶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전사한 전우들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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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 고당 조만식의 애국·애족의 길 1913년 3월,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졸업하고 귀국한 고당은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해서 지리·역사·영어를 가르치면서 교육구국(敎育救國)의 길에 들어섰다. 이때 고당은 학생들에게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고, 앞장서서 스스로 실천하였다. 이것이 뒷날 조선물산장려회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고당은 국산품 애용이 곧 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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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 황성신문 민중계몽에 앞장서다 황성신문은 창간 당시부터 재정적인 토대가 잡히지 않아서 어려움이 참으로 많았는데, 1902년 8월 제2대 사장으로 장지연을 선출하였다. 하지만 신문사의 재정은 여전하였고, 설상가상 나라는 나날이 기울고 있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을사오조약이 체결되면서 나라의 명운은 곤두박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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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의 항일독립운동 1919년 3·1 독립운동의 불길이 전국을 휩쓸 때, 남자현은 독립선언서를 가슴에 품고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그리고 3월 9일 이른 아침, 압록강을 건너 류하현 삼원보로 향했다. 남자현은 청산리전투에 참전해 독립군의 간호에 전력을 기울여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어졌다. 그 후 이상룡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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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 대한매일신보 항일의 선봉에 서다 1907년 5월 23일부터 대한매일신보는 한글판을 별도로 발행하여 한문판·한글판과 영문판 등 세 종류로 확대하였다. 이 무렵 논설진으로는 양기탁을 비롯하여 박은식·신채호 등 당대의 쟁쟁한 논객들이었다. 논객들의 논설은 거칠 것이 없었다. 일제의 침략과 우리 내각의 친일국정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신속한 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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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 학도병, 책 대신 총을 들었다 6·25전쟁은 갓 태어난 대한민국이 기틀을 채 갖추기도 전에 졸지에 당한 황당함이었다. 그 당시 나라의 사정은 풍전등화(風前燈火)였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16, 17세의 학생들도 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손에서 책을 놓고 총을 잡았다. 이들은 정식 군번도 받지 못한 채 1주일 안팎의 기초 군사훈련만 받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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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 조선민족대동단, 항일운동의 기치를 올리다 1919년 5월 20일,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을 창단하고, 이를 대외에 선포하였다. 조선민족대동단은 대동주의에 입각하여 민족의 정신통일과 실력양성에 의한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 창단된 비밀단체였다. 대동단은 관료·유림·군인·교사·승려·상인·여성·노동자·보부상·학생 등의 다양한 인물로 구성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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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 한 시대에 우뚝 선 여장부 이야기 여성이 여성다움을 넘어 사나이다움으로 넘칠 때 우리는 그를 ‘여장부’라고 부른다. 용기와 신념과 거침이 없는 행동으로 한 시대에 우뚝 선 여장부들이 있어 우리는 때때로 그들에 대한 존경과 선망으로 스스로의 옷깃을 여민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의 사형언도 소식을 듣자, 그 소식을 전하러 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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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 임시정부의 큰 울타리, 성재 이시영 성재 이시영 선생은 독립을 위해서는 치밀한 계획과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한 민족지도자들과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밑그림을 그렸다. 그는 국무위원 겸 법무총장으로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큰 울타리로서의 직임을 다하였다. 그 후, 재무총장을 맡아서 임시정부의 어려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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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 보재 이상설의 삶과 구국독립운동 1906년 4월, 보재는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언제 돌아올는지 기약 없는 망명의 길에 올랐다. 상해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북간도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에서 미리 이주해온 동포들과 뜻을 모아 근대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구국독립운동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하였다. 1907년 6월 25일, 보재 선생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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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와 국채보상운동 대일차관(對日借款) 1,300만 원을 갚기 위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감동한 대구 남일동 부인들은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결성해 전국에 격문을 보냈다. 이 격문에는 “우리가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나라의 빚을 갚는 일에 어찌 남녀가 다르리요”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전국의 부인들은 부인탈환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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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 하구 김시현의 삶과 의열투쟁 하구 김시현은 일제강점기에는 항일투쟁을, 광복 후에는 반독재투쟁에 온몸을 바쳤다. 그는 시대를 비켜가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오로지 조국을 위하여 일생을 살았다. 1922년 5월 상해로 돌아오면서 의열단에 가입하여, 행동에 나섰다. 하구는 1923년 초부터 상해에서 비밀리에 폭탄을 제조하는 일에 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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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 중공군 인해전술에 막힌 장진호전투 흥남부두에서의 철수작전은 참으로 급박하였다. 이때 미군 제10군단 군단장 앨몬드 장군은 “병력과 군수물자만을 싣고 철수해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피란민 10만여 명을 남겨둔 채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김백일 장군은 “UN군이 피란민을 이곳에 버리고 철수한다면 우리는 육로라도 그들을 후퇴시키겠다”고 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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