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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2/03] 지덕체 겸비한 팔방미인 간호사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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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국에 위로와 희망 전한 ‘백의’의 항일투사들 


누구보다 치열하게 대한독립 외치고

독립군 돌보며 항일투쟁 중심에 서다


글 | 편집부 

전 세계에서 ‘백의천사’는 숭고한 인류애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 특히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치른 우리나라에서 간호사의 역할은 더욱 막중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여성 독립운동가 가운데 상당수가 간호사였다. 이들은 앞서서 근대교육을 받은 당대 지식인이자 여성계를 이끈 사회지도자 역할을 도맡았다. 직접 만세 시위를 주동하다 혹독한 고문과 옥고를 치렀으며, 일제의 무력 앞에서도 당당했다. 인류애를 바탕으로 독립운동가 가족을 보살피고 감옥 뒷바라지나 병원 수발 등 묵묵히 돕는 일에도 앞장선 그들은 지덕체를 모두 겸비한 팔방미인이자, 진정한 백의(白衣)의 항일투사들이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헌신한 여성 가운데 상당수가 간호사였다. 이들은 앞서서 근대교육을 받은 당대 지식인이자 여성계를 이끈 사회지도자 역할을 했다. 간호사들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들의 활약은 일제가 고종 퇴임 및 한국군대 해산을 결정했을 때도 빛났다. 간호사들은 군대해산 항전에서 부상병 간호에 헌신했으며, 이들의 헌신은 여러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1926년 동아일보는 “간호사들이 몸을 버리고 구호활동한 것은 그 당시 천하가 감읍한 바였다”고 게재했으며, 선교계 잡지 『The Korea Mission Field』 1919년 10월호에서 “세브란스병원에 부상자들이 끊임없이 도착했다. 모두가 동포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쉬지 않고 노력했다. 특히 한국인 여자 간호사들의 지칠 줄 모르는 기력과 능력은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기록했다. 



부상자 치료하고 군자금 모집에 앞장

3·1운동 직후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해 국내에서 비밀리에 조직된 여성단체 ‘대한민국애국부인회’도 간호사들이 활동을 주도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3·1운동으로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의 옥바라지와 가족 구호를 위한 모금 활동을 전개했는데, 서울 세브란스병원을 비롯한 전국 병원에 있는 간호사들의 조직이 중심이 됐다. 지난해 8월 간호사협회에서 펴낸 『독립운동가 간호사 74인』을 보면,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사건에 연루돼 1920년 체포된 80명 중 간호사가 절반인 41명에 달한다고 한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산하의 적십자회 회장을 맡은 세브란스병원 간호사 이정숙(1896~1950)은 동료 간호사 28명을 회원으로 가입시키고 군자금을 모으는 역할을 했다. 그는 1920년 대구지법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으며, 사후 40년 만에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3·1운동 이후에는 만주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등지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서 간호사들이 활약했다. 직접 만세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고, 속출한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간호하는 데 전념했다. 상해 임시정부는 내무부총장 안창호의 명의로 1919년 8월 대한적십자회를 설립했다. 이어 1920년 1월 상해 프랑스조계 내 대한적십자회 총사무소에 ‘적십자간호원양성소’를 설치했다. 적십자간호원양성소가 배출한 간호사들은 독립군 부상자를 돌보며 항일투쟁의 한 축을 맡았다.

만세 시위 이끌고 해외에서도 활약

세브란스병원 견습 간호부로 일하던 이아주(1898~1968)는 1919년 3월 5일 만세 시위에 참여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돼 징역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법정에서 “앞으로 독립만세를 안 하면 관대히 용서해주겠다”는 일본 법관의 말에 “조선 사람이 조선 독립을 소리 높이 외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앞으로 조선이 독립할 때까지 계속 독립을 외칠 것”이라고 당당히 외쳤다.

박원경(1901~1983)은 3월 9일 황해도 재령에서 남장(男裝)을 하고 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그는 일경의 추적을 피해 도피한 자신을 체포하려는 조선인 헌병 보조원들에게 “너희는 조선인들이 아니냐. 나를 잡아다 주고 무슨 큰 상을 탈 것 같으냐”고 꾸짖었다. 혹독한 고문으로 이가 모두 빠지고, 그해 3월 31일 보안법 위반으로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에는 동대문부인병원에서 16년간 근무하며 독립운동가와 가족들을 도왔다.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중국과 미국 등 해외에서 항일운동을 편 간호사들도 많았다. 상해 대한적십자회 간호원양성소 1회 졸업생인 이봉순(생년월일 미상)은 미국의 간호대학을 졸업, 간호사가 된 뒤 미국에서 결성된 대한여자애국단에서 활동했다. 대한여자애국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후원금을 보내고, 광복군 창설 때 지원금을 보냈다.

항일투쟁 지원하고 여성운동에 투신

“온통 대한민국의 국민이 독립 만세를 외쳐 부르고 있는데, 우리 간호사라고 가만히 앉아서 남의 일같이 보고만 있을 수 있겠소.”

단재 신채호 선생의 배우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박자혜(1895~1943)는 3·1운동으로 각 병원에 부상자들이 줄을 잇자, 간호사들의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조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의사 김형익과 함께 간호사들에게 동맹파업에 참여할 것을 주창했으며, 뜻을 같이한 간호사들과 3월 10일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계획했다. 이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자, 석방 후 일본인들을 위해 병원에서 근무할 수 없다는 생각에 병원을 그만두고 북경으로 망명해 1919년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했다. 

1920년 단재 신채호를 만나 결혼했으며, 국내에서 아들을 키우면서 신채호와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나석주 의사의 폭탄 투척 사건 때는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석주를 돌보고 안내하는 등 의열단 활동을 도왔다. 

그는 가정경제, 자녀교육, 남편의 독립활동 내조 등을 감내해야 했다. 일제의 감시 아래 끼니를 연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생활고를 겪었으며, 남편이 여순감옥에서 순국한 뒤에는 둘째 아들마저 영양실조로 잃었다. 서울의 한 셋방에서 1943년 사망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920년 세브란스병원 간호부양성소의 10회 졸업생이 된 정종명(1896~?)은 조선총독부의원 산파강습소 조산부과를 수료하고 산파 면허를 취득, 지금의 안국동에 조산원을 개원했다. 그는 산파로서 쌓은 경험을 사회활동에 반영해 근우회를 이끌면서 농촌 탁아소 설치를 주장했다. 

1922년 가난한 여학생들을 돕기 위해 ‘여자고학생상조회’를 만들었으나, 회원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워 상조회비를 내기 어렵게 되자 자신의 산파 수입, 독지가들에게 받은 기부금, 전국 각지 순회강연에서 벌어들인 입장료 및 기부금을 모아 지원했다. 

1924년에는 ‘조선간호부협회’를 창립해 구직 알선을 하고, 대중을 대상으로 보건교육을 개최했으며, 수해를 포함한 재난 상황에서는 다른 사회단체와 연합해 구호를 제공하는 등 폭넓은 활동을 펼쳤다. 같은 해 사회주의 사상을 배경으로 한 최초의 여성단체 ‘조선여성동우회’ 발기총회에 참석해 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관련된 혐의로 일경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으며, 1931년 근우회가 해체될 때까지 여성운동에 투신했다.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다양한 선전과 조직 활동에 고군분투했지만, 일상생활에서 주변 사람들과 운동가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데도 정성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동료들의 먹을 것을 대고, 땔감을 대고, 약값을 대고, 감옥 뒷바라지를 하고, 병원 수발을 들고, 장례식까지 치르는 등 독립운동과 관련된 모든 일을 두루 아울렀다.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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