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Focus

독립운동항쟁사 [2022/04] 4월과 관련된 순국선열의 작은 역사, 소중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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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4․19혁명(4월혁명) 등


독립운동의 보이지 않는 참된 가치와 향기


글 |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4월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4·19혁명(4월혁명) 등 한국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과 안타까운 선열의 희생 등 기억해야할 지사들이 많다. 늘 관심을 갖고 그 의미와 시사점을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위대한 인물이나 순국선열의 생애와 그들의 말·문장, 위대한 작가나 그의 예술 작품이 주는 보이지 않는 이끌림이나 매력, 선한 영향력 등은 물리적 힘은 아니지만, 분명 우리를 이끄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이는 우리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풍요 등과 같은 현상·물질 지향의 삶이 아니라 ‘가치 지향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백범 김구는 일찍이 우리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되기보다는 아름다운 나라, ‘높은 문화의 힘’을 갖는 나라가 되기를 소망했다. 지나간 사건이나 순국선열 이야기를 통해 이 ‘보이지 않는 힘’을 감성으로 느끼고, 흔히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그 힘과 상상력을 널리 펼쳤으면 한다.   


 4월 1일    

중국 동북 길림(吉林)에서 만주독립운동 통합조직 국민부 성립


1920년대 후반 중국 동북지역(만주)에서 전개된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 등 독립운동 단체 3부 통합운동의 결과 1929년 4월 1일 통합 조직으로 국민부(國民府)가 성립했다. 


국민부는 주로 남만주 지역 거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및 자치행정 기관으로 중국 동북 길림성(吉林省)의 성도 길림(吉林)에서 창립을 선언했는데, 이 해 9월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이후 봉천성(奉天省, 현재 遼寧省) 신빈현(新賓縣)에 본부를 두고 각 지역에 지부 조직을 두었다. 1929년 12월 20일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바탕으로 조선혁명당이 창건된 뒤 조선혁명당 산하의 교민 자치기관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밀접한 관련을 갖는 조선혁명군 독립군 부대  및 독립운동 지도 정당인 조선혁명당과 함께 1930년대 남만주 지역의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1934년 11월 조선혁명군정부로 통합되었다. 


  4월 3일  

대한독립단 도총재 박장호 피살 순국


박장호(朴長浩, 1859~1922)는 경기도 가평 출신 유학자이자 의병장, 만주 독립운동 지도자이다. 19세기 말 조선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유인석(柳麟錫)·홍재학(洪在鶴) 등과 함께 여러 차례 상소하여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였다. 1905년 을사5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이듬해에 강원도 홍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동의병대장, 또는 홍천의병장으로 불렸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잔존 의병부대를 인솔하여 남만주 서간도 지역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이진룡(李鎭龍)·조맹선(趙孟善) 등 의병장과 함께 항일투쟁을 지속했다. 1919년 4월 중순 남만주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여러 단체 대표를 소집하여 대한독립단을 결성하고 도총재(都總裁)에 추대되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그 뒤 청장년들을 규합하여 독립군을 편성하는 한편, 국내에 조직을 확대하여 지단(支團)을 편성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21년 하순 대한독립단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그는 기원독립단의 총단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임시정부가 체택한 공화제와 민주주의 이념을 거부하고 대한제국 복원과 유교질서의 회복을 추구했다.

 

7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기원독립단을 이끌던 박장호는 1922년 4월 2일, 일제의 밀정 김헌(金憲)에게 피격되어 다음날 순국하고 말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강대덕, 「화남 박장호의 학통과 항일독립운동」, 『의암학연구』 6호, 2008).



  4월 3일  

김구·김규식 등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결성대회 개최, 

남북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 참석 지지


1948년 3월 25일 북한의 김일성은 김구의 제안에 호응하여 이른바 ‘남북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담(약칭 남북연석회의)’을 제안했다. 이에 대응하여 김구·김규식·홍명희 등은 4월 3일 서울 시내 역경원(譯經院)에서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결성대회를 개최했다. 홍명희가 임시의장을 맡았고, 김구·김규식은 축사를 했다. 이 대회에서 UN총회에 보내는 항의문, 민족통일을 조속히 실현하기 위해 위 남북회담을 지지하며 원조운동을 전개하자는 ‘남북협상추진 결의문’ 등을 결의하였다. 김구·김규식·홍명희·조소앙·유림 등은 이를 통해 남북연석회의 참석을 결정한 것이다(『조선일보』· 『경향신문』1948.4.6자).


 4월 7일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일본군에 피살, 순국 


1920년 4월 7일 러시아 연해주의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소왕령, 蘇王領)에서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페치카’ 최재형이 일본군에 학살되었다.


최재형(崔在亨, 1860~1920)은 함경북도 경원 출신으로, 9세 때 부모를 따라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였다. 그는 노우키에프스크(연추, 煙秋)에 자리잡은 뒤 러시아군에 우육류(牛肉類) 납품을 통해 거금을 모았다. 이후 많은 재산을 배경으로 민족교육과 조국 독립운동, 수십만 시베리아 이주 한인(카레스키)을 위해 활동했다. 1908년 5월 최재형은 항일조직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고 총장에 선임되었는데, 군자금으로 13,000루블의 거금을 쾌척했다. 또 이범윤(李範允)·안중근(安重根) 등 의병부대를 후원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재무총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1919년 11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다. 그러나 1920년 4월 5일 연해주에 출동한 일본군에 사로잡혀 4월 7일 피살됨으로써 그의 원대한 포부는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5월 22일 상하이에서 순국추도회를 거행했다. 당시 참석자는 이동휘·안창호 등 3백여 명에 이르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 1988).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


서재필(徐載弼)·유길준 등은 1896년 4월 7일 최초의 민간 발행 한글신문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이 신문은 일간지로서 내용은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구성되었다. 처음에는 격일간지로 출발했지만, 일간지로 발전했다. 이 신문의 국문판 발행 부수는 처음에는 300부였으나, 나중에는 3,000부씩 발행하게 되었다. 영문판 발행 부수는 1898년 1월 당시 약 200부였다. 영문판은 구독자가 늘어 미국·영국·러시아·중국 등에 상당 부수가 발송되었다. 이 신문은  1899년 12월 4일자(제4권 제278호)로 종간호를 내고 폐간되고 말았다. 그러나 1896년 7월 창립된 독립협회의 기관지로서 당시 정부를 비판하고, 서구 사상과 문물 전파와 민중을 계몽하는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월 10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개원



1919년 4월 10일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개원했다.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법기관으로, 4월 10일 제1차 회의에서 먼저 조소앙(趙素昻)의 동의와 신석우(申錫雨)의 재청으로 ‘임시의정원’ 명칭이 결정되어 문을 열었다. 회의를 거쳐 의장 이동녕(李東寧), 부의장 손정도(孫貞道)를 선출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이라고 정했다. 또 이승만(李承晩)을 국무총리로 하는 국무원을 구성했으며, 임시정부의 기본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탄생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1919년 3월 1일 3·1운동 전개 이후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의 열기가 고조되는 등 3·1운동은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남겼다. 특히 중국 상하이(上海)에 민주공화제를 표방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어 한국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종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하이(上海)에 수립된 것으로 알려졌고, 오랫동안 이 날을 기념해왔다. 그러나 최근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으로 확인되어 이제 이날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로 기념하고 있다.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임시의정원에서 4월 11일 제정, 공포되었고, 임시정부 스스로 4월 11일을 정부 수립일로 기념해왔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임시정부 법령 제1호로 1919년 4월 11일 제정되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10개 조로 구성되었다.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었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1, 독립기념관, 2008, 57~64쪽). 이 가운데 제1조는 1948년 제정된 대한민국 제헌헌법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으로 계승, 명시된 이래 1987년 10월 개정된 현행 헌법까지 거의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4월 13일   

‘만주벌의 호랑이’ 김동삼,

 마포형무소에서 순국 


김동삼(金東三, 본명 김긍식, 1878~1937)은 40여 명의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경북 안동 내앞(川前)마을 출신이다. 1900년대 초 고향 안동에서 협동(協東)학교 운영에 참가하는 등 구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는 신민회 및 김대락(金大洛)·이상룡(李相龍) 등 안동지역 유지들과 연계하여 김만식과 함께 남만주(서간도) 지역을 미리 답사하고, 안동 지역 인사들의 이주를 추진하였다. 중국동북(만주) 이주 직후인 1913년 3월부터 이름을 중국의 동북 3성 또는 동삼성(東三省)을 의미하는 ‘동삼(東三)’으로 개명했다. 그의 아우 찬식(纘植) 역시 ‘동만(東滿)’으로 바꾸었다. 중국동북(만주) 지방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1923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했는데, 이때 의장을 맡아 임시정부의 진로와 독립운동 세력의 단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4년에는 남만주 통합 독립운동 조직인 정의부의 참모장, 군사위원장 등을 맡았고, 1928년에는 정의부 대표로 만주 독립운동 조직체인 3부의 통합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일본이 중국 동북지방(만주)을 침략한 1931년 ‘9·18사변(일명 만주사변)’ 직후 항일공작을 추진하기 위해 하얼빈에 잠입했다가 한인 밀정의 밀고로 이 해 10월 12일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되었다.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 중형을 선고받았다. 처음에는 평양감옥에서 고생하다가 서울 마포의 경성형무소로 옮겨졌다. 그가 마포의 경성형무소에 투옥되었을 때 일제 당국이 감시를 위해 촬영한 사진을 보면 그의 고초와 고뇌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3년 사이에 혹독한 옥고를 치르면서 급격히 노쇠한 것으로 보이는데,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기에 충분하다. 결국 그는 만 59세가 되던 1937년 4월 13일, 옥중에서 병고로 순국하였다. 장례는 평소에 그를 존경하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주선하여 치러졌다. 한용운은 자신이 머물던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장례를 치른 뒤, 김동삼의 유언대로 시신을 화장하여 한강에 뿌렸다(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순국선열의 얼을 찾아서』, 2018, 196~198쪽). 

   

 4월 14일   

미국 동부의 도시 필라델피아에서 

제1회 ‘한인 자유대회’ 개최


미주(북아메리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동포들은 1919년 거족적으로 전개된 3·1운동 소식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기 위하여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미국 동부 필라델피아의 독립관(Independence Hall) 등에서 ‘한인 자유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 대회는 대한민국 통신부 외교고문인 서재필이 주도했다. 실업·교육·언론·종교 분야 등 각계의 유력한 미국인들을 초청해 한국 독립운동의 진상과 일제의 탄압 사실을 보고하고 다섯 가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결의안은 임시정부 후원, 구미(歐美)에 외교사무소 설치, 외국인들에게 독립선언과 국내 실정 이해시키기, 일본의 실책을 깨닫게 하고 임시정부 승인을 미국과 국제연맹에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대회가 끝날 무렵 의장 서재필의 지휘로 참가자 140여 명이 한국 국기를 앞세우고 필라델피아 시가지에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여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렸다.  

   

 4월 15일   

일본군 수원(현재 화성) 제암리 학살 만행


3·1운동 당시 일제, 즉 조선총독부 및 일본 정부 당국의 무력 탄압으로 한인들이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저명한 민족주의 사학자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朴殷植)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사망 7,509명, 부상 1만 5,961명, 투옥자 4만 6,948명이었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했다(박은식 저·남만성 옮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하, 서문당, 1999, 204쪽). 그러나 이러한 피해의 구체적 실상은 아직 파악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시위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등은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무력탄압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 과정에서 악명을 떨친 수원 제암리 학살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육군중위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가 이끄는 일본군이  4월 15일 무고한 한국인 30여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당시 식민지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타로(宇都宮太郞)는 1919년 4월 18일자 일기에서 이 사건의 은폐 왜곡사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이 사건의 주역 아리타 중위는 겨우 ‘근신 30일’이라는 처분을 받아, 사실상 무죄처분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사태의 최종 책임이 조선군사령관 우쓰노미야에게 있음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4월 19일     

김구·김규식 등 남북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 참석 위해 38선 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는 비서 선우진과 아들 김신을 데리고 1948년 4월 19일 저녁무렵 38도선에 도착하여 북한으로 들어갔다. 주위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북회담을 목적으로 북으로 간 김구 등 60여 명 가운데 홍명희·최동오·이극로 등 상당수 인사들은 북한에 잔류하였다. 그러나 김구·김규식 등은 평양에서 회의를 마치고 5월 5일 서울로 되돌아오기까지 나름대로 남북분단을 막기 위한 최후의 노력을 기울였다.   

       

  1948년 1월 김구의 남북지도자회의 소집 요구는 일종의 큰 방향 전환이었고, 이미 때가 늦은 것이었다. 그러나 남북 지도자들이 조국이 분단되기 전에 처음으로 집단적으로 만났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높이 평가될 수 있다. 미군정기, 해방 정국에서 이 회의가 없었다면 한국인들은 유사 이래 처음인 민족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도대체 어떤 노력을 보였는지, 어떤 비판을 받아도 변명할 여지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2, 역사비평사, 1996, 46~48쪽). 


1948년 4월의 남북회의는 사실 비현실적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이 회의에 참석한다고 해도 과연 분단을 막을 수 있었느냐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또 남북 양측의 단정수립에 들러리 서는 모양이 되었고, 북한 정권에 이용만 당하고 말았다는 문제제기와 비판도 있다. 그러나 김구·김규식의 북행을 막으려는 어려운 상황에서 통일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아닌가 한다. 


 4월 19일   

1960년 학생들 

‘4·19혁명(4월혁명)’ 봉기


1960년 4월 19일부터 25일까지,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할 때까지 주로 학생들이 중심세력이 되어 일으킨 시위운동인 4·19혁명이 전개되었다. 한국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혁명으로 평가되고 있다. 4월혁명, 또는 4·19의거라고도 한다. 일부 학자는 4·19혁명을 1945년 8월의 민족해방에 이은 ‘제2의 해방’으로 매우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서중석, 『사진과 그림으로보는 한국현대사』, 역사비평사. 2016, 488쪽).  3·15부정선거 자행 이후 4·18 고려대생 시위에 이어 서울·부산·대구·인천·광주·대전·전주·청주·목포·포항 등 전국 각지에서 전개된 시위와 경찰의 발포로 모두 185명의 학생과 시민이 희생되는 피해를 입었다(1960년 7월 19일까지 사망자 포함, 서중석, 위의 책, 243쪽). 부상자는 무려 6.259명이나 되었다.


 4월 20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결성


1941년 4월 20일부터 27일까지 8일 동안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해외한족대회의 결과 재미한인사회 최대의 독립운동 연합단체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결성되었다. 재미한인 단체들의 역량을 집중하여 독립운동을 강화, 지원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참가 단체는 북미대한인국민회, 동지회, 하와이대한인국민회, 중한민중동맹단, 대조선독립단, 한국독립당하와이지부, 의용대미주후원회(민족혁명당미주지부로 바뀜), 대한부인구제회, 대한여자애국단 등 9개 단체였다. 조직은 위원제로 하여 의사부와 집행부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의사부는 하와이의 호놀룰루에, 집행부는 미국 서부의 로스앤젤레스에 각각 두었다. 역대 위원장은 의사부에 이원순·안원규·김원용, 집행부에 김호·한시대 등이었다. 해외한족대회의 결의에 따라 연합위원회에는 외교위원부를 두었는데, 그 책임자로 이승만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별도로 한길수를 국방공작봉사원으로 임명해 외교 활동을 뒷받침하게 하였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교포들로부터 모금을 통해 임시정부 활동과 미주에서의 외교, 무장투쟁 활동 등에 재정 후원을 담당하였다. 또 1941년 12월 일제의 태평양전쟁 도발 이후 재미 한인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한인 신분증도 발급하였다. 그리고 1942년 4월 26일부터 로스앤젤레스에 한인국방경위대(일명 맹호군)을 결성해 미주한인의 대일항전 의지를 과시하였다. 1942년 8월 29일 국치기념일에는 로스앤젤레스 시청에 태극기 게양식을 거행해 한국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렸다. 


그러나 주미외교위원부 개조를 둘러싸고 중경의 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지지하자 이에 크게 반발하여 그동안의 임시정부 지원태도를 바꾸어 임정 반대로 돌아서게 되었다. 해방 이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한국에 대표단을 파송해 정부수립운동에 동참하였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월 21일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사북항쟁’ 발발


1980년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국내 최대 민영 탄광인 동원탄좌 사북영업소 광원과 가족 등 6,000여 명이 어용노조와 열악한 근로환경에 항거하여 나흘간 사북읍을 점거한 총파업 사건이 일어났다. 종래 ‘사북사태’로 불렸으나, 최근 ‘사북항쟁’으로 바뀌고 있다. 


사북항쟁은 1970년대 독재정권과 어용노조 하에서 탄광 노동자들의 누적된 불만이 1979년 10월 말 박정희 대통령 사망 직후 민주화의 시대적 흐름을 타고 촉발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광산노동은 노동조건이 매우 열악했기 때문에 운동 양상도 과격하게 전개되었다. 이 사건은 1980년대 노동운동의 본격적 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된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문민기, 「탄광사고를 통해 살펴본 사북사건의 배경」, 『역사문제연구』 42, 역사문제연구소, 2019).



 4월 28일    

이석용 의병장 대구형무소에서 순국


1914년 4월 28일 이석용(李錫庸, 1878~1914) 의병장이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집행으로 순국하였다. 


그는 전라북도 임실에서 태어났다. 1907년 10월 전라북도 진안의 마이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호남창의소를 설치하고, 전북 동부지역에 거주하는 유생들로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병사들은 대부분 농민과 천민 등으로 구성되었다. 거병 직후 진안 일대에서 일진회원 등을 처벌하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등 3년여 동안 의병항쟁을 지속했다.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항일투쟁을 지속하여 1912년 겨울 항일단체 ‘임자밀맹단(壬子密盟團)’을 조직하여 남원·전주·임실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결국 1913년 11월 일본 경찰에 잡히고 말았다. 


재판과정에서 이석용은 ‘대한만세’를 세번 부르고 왜적을 멸하겠다고 맹세한 후 떳떳하게 죽음을 맞았다. 불과 37세였다. (홍영기, 『한말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독립기념관, 2017, 91~95쪽)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 윤봉길 의사 특공작전, 

시라카와 대장 등 폭살 


일본은 1932년 1월 28일 중국 상하이에서의 일본 승려 사망사건을 계기로 ‘상하이사변’을 도발하고 상하이를 점령하였다. 이때 일본 파견군 사령관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이었다. 충남 예산 출신의 윤봉길(尹奉吉)은 이 해 4월 26일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입단했다.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열리는 일본의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일본 천황의 생일)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제 침략의 거두들을 응징하기로 했다.


4월 29일 오전 11시 50분경 윤봉길의 특공작전 의거로 일본군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제3함대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郎)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은 중상을 입었다.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다(河端貞次)는 중상을 입고 다음날 사망했다. 시라카와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5월 26일 사망했다. 이 사건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한국인들의 치열한 항일투쟁을 온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중국 국민정부의 영수 장제스(蔣介石)는 윤봉길의 이 특공작전에 깊은 영향을 받고, 1943년 11월 말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열린 미·영·중 3강의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일본 당국은 윤봉길의 행위를 대외적으로는 일본군 수뇌부 등을 향한 ‘테러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윤봉길의 일본군 수뇌 폭살행위가 사실은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의 일환이고,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에 대한 강력한 특공작전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특히 윤봉길의 폭탄 투척으로 중상을 입고 치료를 받다가 5월 말 사망한 시라카와(白川義則)의 죽음을 “전상사(戰傷死)”로 판정하여 윤봉길의 폭살행위가 개인적 차원의 ‘테러’나 암살이 아닌 군사작전, 나아가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수행되었다는 사실을 일본 당국이 자인한 것이었다(장세윤, 「전상사(戰傷死)로 판정하는 이유」, 『임시의정원 개원 100주년기념 해제집』, 국회도서관 국회기록보존소, 2019 참조).   


필자  장세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연구원, 성균관대학교 연구교수,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 동북아역사재단 교수실장 등을 거쳐 현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 『중국 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봉오동 청산리전투의 영웅-홍범도의 독립전쟁』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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