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시론 [2022/04] 임시정부의 큰 울타리, 성재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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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위한 밑그림 그리며 솔선수범
어려운 살림 직접 챙겨 광복의 밑거름 만들다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성재 이시영 선생은 독립을 위해서는 치밀한 계획과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한 민족지도자들과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밑그림을 그렸다. 그는 국무위원 겸 법무총장으로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큰 울타리로서의 직임을 다하였다. 그 후, 재무총장을 맡아서 임시정부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직접 챙기기도 하였다. 이것이 1948년 8·15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1953년 4월 17일, 이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무총장과 재무총장을 역임한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이 세상을 떠났다. 올해가 그의 69주기가 되는 해이다.
성재는 1869년 음력 12월 3일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의 여섯 아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백사 이항복이 그의 10대 할아버지이고, 영조 때 영의정으로서 탕평책을 주도했던 이광좌도 경주 이씨 가문의 거목이다.
그런데 성재가 태어난 그 무렵은 조선 제26대 왕 고종이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로,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전권을 행사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당쟁과 세도정치로 쇠퇴해진 왕권의 회복을 위해서 무리하게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원납전을 바치게 하고, 대외적으로는 척양척왜(斥洋斥倭)를 내세워 쇄국정책을 폄으로써 외국과의 마찰을 빚고 있었다. 또 지연·학연에 의한 민폐가 심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국에 있는 서원 중 사액서원 47개소만을 남기고 철폐하였는데, 이로써 유생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히면서 나라가 어수선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일본은 끊임없이 통상을 요구하며, 우리 조정을 압박해왔다. 그 출발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서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며 개화정책을 펴나가면서부터였다. 뒤이어 미국·영국·독일도 통상을 요구하면서 조선으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임오군란(1882년)은 개화세력과 보수세력의 갈등을 불러왔으며, 조선을 청·일 두 나라의 각축장으로 만들었다. 임오군란 뒤 청·일 두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 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고 내정을 개혁할 목적으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 등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도 새로운 변수로 작용하였다.
청일 군대의 각축장으로 전락
아관파천·을미사변 등에 충격
성재는 이처럼 나라의 정세가 어수선하던 1885년 소과에 합격하였으며, 1888년 동궁의 서영관으로 관직에 나아갔다. 그로부터 3년 뒤 1891년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 수찬을 거쳐 동부승지에 올랐다. 이때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나라의 사정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미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1894년 1월에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청·일 두 나라의 군대가 우리나라에 입성하면서 또다시 각축전이 벌어졌다. 이때 조정에서는 청·일 두 나라를 견제할 목적으로 친러적(親露的) 정책을 펴게 되었다. 이로써 나라의 사정은 더욱 어려워져만 갔다. 이러한 가운데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명성황후가 우리나라 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지휘한 일본군에 의해서 참살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을미사변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아관파천(1896년)으로 이어지면서 김홍집 내각이 와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때 성재의 장인인 총리대신 김홍집이 광화문(光化門) 네거리에서 성난 민중들에 의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로써 성재는 큰 충격에 빠졌다.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임시정부에 몸을 담다

이후 성재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하였다. 1897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군사고문단의 궁궐 경비를 보장받고, 경운궁(지금의 경복궁)으로 돌아왔다. 파천한 때로부터 1년만의 환궁이었다. 고종은 환궁 직후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자주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국호를 ‘조선(朝鮮)에서 대한(大韓)으로’ 바꾸고,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사정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리고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1904년 2월, 일본은 한국의 일본예속화를 위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고,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시작하였다. 이 의정서에는 일본이 한국의 독립과 영토의 보전을 확보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지만, 이것은 명분뿐이었다. 뒤이어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을 체결하면서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통감에 의한 내정간섭을 노골화하였으며 한국의 외교권까지 박탈하였다.
이제 성재의 머리 속에는 ‘어떻게 대한제국의 앞날을 헤쳐나가야 할까?’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때부터 남대문에 있는 상동교회를 무대로 전덕기(全德基)·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이승훈(李昇薰)·이갑(李甲)·류동열(柳東說) 등과의 만남을 통해서 비밀결사체인 신민회(新民會)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이때가 1907년 4월이었다. 신민회의 창립목표는 잃어버린 국권을 회복하여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항일의 선두에서 투쟁할 독립군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1910년 3월, 신민회는 총감독 양기탁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대일(對日) 무력투쟁’ 노선을 선언하고, 독립군 양성을 위하여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는 1910년 8월 한일병합 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불가능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고 빠르게 진척되어 나갔다. 이때 서울의 이회영 6형제와 안동(安東)의 김대락(金大洛)·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이 망명의 길에 올라 만주 류하현 삼원보에 터전을 마련하였다. 이들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1911년 4월 한인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11년 6월에 군사혼련을 위한 신흥강습소(뒷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에 온힘을 쏟았다. 신흥강습소는 1912년 7월 통화현 합니하로 옮겨 신흥무관학교로 다시 태어났는데, 여기서 배출된 졸업생들이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을 대파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한편, 성재는 독립을 위해서는 치밀한 계획과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한 민족지도자들과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밑그림을 그렸다. 이때 이동녕·신석우(申錫雨)·조성환(曺成煥)·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하였다. 그리고 그는 국무위원 겸 법무총장으로 취임하여 임시정부의 큰 울타리로서의 직임을 다하였다. 그 후, 재무총장을 맡아서 임시정부의 어려운 살림살이를 직접 챙기기도 하였다. 이것이 1948년 8·15 광복의 밑거름이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필자 권용우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ㆍ법과대학장ㆍ산업노사대학원장ㆍ행정법무대학원장ㆍ부총장ㆍ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正心法學) 포럼 대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