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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스크랩 [2022/05] 5월과 관련된 순국선열의 작은 역사, 소중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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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부각되는 순국선열·독립운동가들의 헌신과 희생


우리 모두 진지한 성찰 필요  


글 |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곧 새 정부가 출범한다. 국무총리·국무위원(후보자)들의 여러 모습이 국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상당수 인사들은 국민의 눈높이에 한참 미달하거나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자신과 가족들의 부귀·영화, 축재를 위해서 노력했지만, 사회나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거나 기부에 앞장선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독립운동에 앞장선 순국선열과 독립운동가들의 고귀한 헌신과 희생, 살신성인의 가치가 더욱 돋보이지 않을 수 없다. 상해판 『독립신문』(143호)에 실린 ‘독립군가’의 한 구절은 우리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시베리아와 만주 뜰 험산난수(險山難水)에 결심품고 다니는 우리 독립군, 천신만고 모두 다 달게 여기며 눈물 땀을 뿌림이 그 얼마인가! 몽고 사막 내부는 차디찬 바람 사정없이 살점을 떼갈 듯 한데, 삼림(森林) 속에 눈감고 누워 잘 때에 끓는 피가 더욱 뜨거워진다!”    


​5월 1일 

‘해서명장’ 이진룡 의병장 

평양감옥에서 순국


1918년 5월 1일 경기·강원도 북부와 황해도 일대에서 맹활약한 이진룡 의병장이 평양감옥에서 순국하였다.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1879년 생이다.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의 문인으로 성품이 강직하고 용력이 뛰어났다. 1905년 을사5조약 늑결 이후 일제의 국권침탈이 심화했다. 이에 박정빈(朴正彬)·조맹선(趙孟善) 등과 함께 1907년 황해도 평산에서 의병에 참여하였다. 박기섭(朴箕燮)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선봉장(유격장)이 되었다. 1908년 4월에는 평산의진을 재편한 창의유격대(倡義遊擊隊)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이끄는 500여 명의 의병부대는 1909~1911년 황해도 일대에서 치열한 유격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을 괴롭혔고, ‘해서(海西)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일제에 체포된 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1917.12.22)는 “명치 사십일년(1908) 이래 폭도의 유격대장으로 황해도 가막산을 근거로 하고 부하 500명을 거느려 신출귀몰한 행동으로 토벌 관헌을 귀찮게 굴었다”라고 평가했다.


국내에서 의병전쟁이 어렵게 되자 이 해 10월 조맹선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망명했다. 1916년 10월 6일 조맹선·황봉운(黃鳳雲) 등 7명과 함께 군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평북 운산금광 부근으로 진입했다. 이진룡 등은 평북 영변군 용성동 밀림에 매복하여 평양에서 운산으로 오는 동양금광회사 송금마차를 습격하여 일본인 니시오카(西岡) 순사 등 7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1918년 1월 조맹선·차도선·황봉신 등과 함께 충의사(忠義社)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독립운동 단체 규합과 국내 진입작전을 구상했다. 그러나 일제의 밀정 임곡(林谷)의 밀고로 1917년 5월 관전현(寬甸縣) 청산구에서 체포되어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압송되는 이진룡을 구출하기 위해 황봉신·황봉운 형제가 나섰으나, 오히려 체포되고 말았다. 결국 이진룡과 황봉신·황봉운은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평양감옥에서 5월 1일 순국하였다. 이진룡은 태연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 우(禹)씨도 부군을 따라서 자결, 순절하고 말았다. 현재 중국 관전현 청산구에 이진룡과 부인 우씨를 기념하는 ‘이진룡기념원’과 우씨부인 의열비·묘비가 있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1권, 1986 ; 오일환, 「이진룡의 항일투쟁 연구」, 『민족사상』12-2, 2018).   


5월 2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열차 습격

만주국군·일본군 장교 17인 포로


1934년 5월 2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산하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獨立師)는 중국 연변(북간도)의 할바령(哈爾巴嶺)에 매복해있다가 함북 청진에서 괴뢰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 현재 길림성 장춘[長春])으로 가는 202호 열차를 습격하였다. 이 때 경비병 30여 명을 살상하고 만주국군과 일본군 장교 17명을 포로로 잡는 성과를 거두었다(연변조선족자치주檔案館 編, 『延邊大事記』, 연변대학출판사, 1990, 102쪽). 동북인민혁명군 2군 독립사는 대부분 한국인 대원으로 구성되었다. 


일본의 만주 침략 사태 ‘9·18사변(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0월부터 1933년 1월까지 중국공산당 만주조직 주도로 동만주 4개현(왕청·연길·화룡·훈춘)의 항일유격대가 창건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2군 독립사는 왕청·연길·화룡·훈춘현 항일유격대를 통합하여 1934년 3월 말 성립하였다. 이 부대는 후일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발전하여 1930년대 중국 동북지역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장세윤, 『중국 동북지역 독립운동사』, 선인, 2021).



5월 3일   

조선혁명군, 남만주 신빈현 

영릉가(永陵街)전투에서 대승


조선혁명군은 1929년 5월 말 결성되어 1938년 9월까지 주로 남만주 지방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군 부대이다. 처음에는 한인 교민 자치조직인 국민부(國民府)에 소속되었으나, 1929년 12월 조선혁명당 산하 독립군으로 편제되었다. 1932년 4월 경 남만주 지방에서 중국인 왕동헌(王彤軒)이 이끌던 요녕농민자위단(遼寧農民自衛團)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벌이고 있던 조선혁명군은 4월 29일 당취오 등 요녕민중자위군의 수뇌부와 협상하여 작전협정을 맺고 공동투쟁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조선혁명군은 요녕민중자위군의 특무대와 선전대대로 편제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은 특무대 사령관이 되고, 김광옥(金光玉)은 선전대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혁명군은 이 해 10월경까지 요녕민중자위군의 일원으로 거의 20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크게 활약하였다. 특히 조선혁명군이 요녕민중자위군의 이춘윤(李春潤) 부대와 함께 치른 1932년 5월 3일의 영릉가(永陵街) 점령 전투는 조선혁명군의 용맹을 떨친 작전으로 유명하다. 조선혁명군은 이 해 6월 하순까지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치열한 신빈현성(흥경현성) 공방전을 벌였다(장세윤, 『남만주 최후의 독립군 사령관 양세봉』 역사공간, 2016). 



  5월 8일  

일본, 식민지 ‘조선’에 

치안유지법 실시 공포


일본 정부는 1925년 5월 8일 ‘치안유지법’을 식민지 ‘조선’과 대만, 사할린 등에 시행한다고 공포하였다. 1924년 말 중국 동북에서 정의부(正義府) 등 독립운동 조직이 결성되고 이듬해 4월 17일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다. 일본 당국은 종래의 ‘조선총독부 제령(制令) 제7호’로는 단속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이 법을 공포하고 5월 12일부터 이 법을 적용하여 한국인들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鈴木敬夫, 『법을 통한 조선식민지 지배에 관한 연구』, 고대민족문화연구소 출판부, 1989). 이 법 제1조는 “국체를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結社)를 조직하거나, 또 그 정(情)을 알고 이에 가입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함”으로 규정되었다. 조선에서의 치안유지법 적용은 일본보다 10일 빠른 것이었다. 또 형량도 일본은 징역 7년 이하로 되어있어 일본보다 더 가혹했다(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2, 청계연구소, 1986, 339~340쪽). 이 법은 일제강점기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현재도 남아있는 ‘국가보안법’의 원조격이라고 평가된다.  



5월 10일    

대한인국민회 창립


1910년 5월 10일 미국에서 한인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 大韓人國民會]가 창립되었다. 이 단체는 1909년 2월 1일 미주 지역의 한인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국민회를 모체로 했다. 국민회는 총회와 지방회의 두 조직체로 구성되었다. 미국 본토에는 북미 지방총회를 두고 하와이에는 하와이 지방총회를 두었다. 북미 지방총회는 『신한민보』를 발행했다. 또 하와이 지방총회는 『신한국보(新韓國報)』를 지방총회 기관지로 삼고, 애국사상 고취와 교포사회 단합과 계몽에 노력했다.


국민회가 1910년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와 통합하면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로 개칭했다. 이듬해에 샌프란시스코에 중앙총회를 두고, 북미·하와이·시베리아·만주 등 4개 지역에 지방총회를 설치하였다. 특히 멕시코·쿠바에도 지방회를 설치하여 교포들의 단결과 권익 옹호에 주력했다. 대한인국민회는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이자 무형(無形)의 정부로 나아가기 위한 초석을 마련코자 하였다. 중앙총회장에 선출된 안창호(安昌浩)는 해외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하여 지역과 이념을 초월한 통합조직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밖에서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중앙총회 산하에 각 지방총회를 설치하여 1910년대~1920년대 초 해외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고 교포들의 권익 옹호에 주력했다. 특히 해외 한인들과 연계하여 독립운동 자금모집과 지원을 맡아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실제로 『신한민보』는 “조선 독립을 회복하기 위해 무형(無形)한 국가를 먼저 설립할 일”을 제안했다. 사실상 민주공화제 형태 정부를 제창한 것이었다. 국민회 스스로 한인 최고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려 했다. 많은 한인들이 대한인국민회에 납세의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1910년 8월 일본의 침략으로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9월 1일 한일강제병합을 부인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일제의 침략을 규탄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17년 ‘대동단결의 선언’, 나아가 1919년 3·1운동의 거족적 폭발을 계기로 중국 상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질 수 있었다. 3·1운동 소식을 전한 『신한민보』(1919.3.13)는 “거룩한 3월 1일에 대한민족 전체를 단결한 조선독립국민단이 선언한 바, 민족대표 33인은 대한인국민회의 동일한 대표임을 공포”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는 임시정부 후원에 기여하였다. 1921년 이승만이 이끄는 하와이 지방총회가 이탈하여 이듬해에 하와이대한인교민단으로 독립하면서 점차 쇠퇴했다. 1922년 중앙총회를 해산하고 조직을 북미대한인국민회로 개편하였다. 1941년 재미 각 단체를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및 김원용, 『재미한인 오십년사』, 1959). 



5월 13일  

흥사단 창립


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송종익(宋鍾翊) 등의 주도로 흥사단(興士團, Young Korean Academy)이 창립되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의 주도로 경기도 홍언(洪焉), 강원도 염만석(廉萬石), 충청도 조병옥, 황해도 민찬호(閔燦鎬), 경상도 송종익, 평안도 강영소(姜永韶), 함경도 김종림(金宗林), 전라도 정원도(鄭源道) 등 8도 대표 위원을 선출하였다. 흥사단은 무실(務實)·역행·충의·용감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하여 건전한 시민이 갖추어야 할 도덕(德)·품성(體)·지혜(智)를 기본덕목으로 하는 인격·단결·공민의 3대 수양과 훈련을 실시했다.


이후 안창호 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하고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는 등 큰 활약을 했다. 초기에는 이민 재미교포 및 유학생을 중심으로 학업과 인격수양, 생활개선, 경제력 증진에 주력했다.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안창호가 내무총장으로 이 해 5월 말 상해로 가서 활동하면서 아시아 원동(遠東)지역에서도 흥사단 운동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1920년 9월 상해에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중국·러시아 연해주·국내·일본을 관할 운동권으로 하는 지부 조직이었다. 이후 서울에 수양동맹회(1922), 평양에 동우구락부(1923)를 결성하여 식민지 치하에서나마 합법적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의 두 단체는 수양동우회(1925)로 통합된 뒤 다시 동우회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이른바 ‘동우회사건(1937)’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200여 명의 회원이 일제 당국에 검거, 투옥된 뒤 강제 해산 당했다. 1946년에 국내위원부를 다시 조직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본부를 국내로 옮겼다. 



5월 14일   

대만에서 조명하 의거, 

일본 천황 장인 척살(刺殺) 기도


조명하(趙明河) 의사는 1928년 5월 14일 대만(臺灣)의 대중(臺中)에서 일본 천황의 장인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를 처단하려는 의거를 단행하였다. 조명하의거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킨 중대한 사건이었다. 특히 일본 조야와 대만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조명하는 1905년 4월 황해도 송화군에서 태어났다. 1920년 송화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6년 9월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大阪)에서 공장·상점 등의 고용원으로 일하면서 상공학교(商工學校)를 마쳤다. 그 뒤 상해 임시정부로 가고자 뜻을 세웠다. 이를 위해 1927년 11월 대만으로 이주하여 일본인으로 행세했다. 대중(臺中)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부귀원(富貴園)이란 차업(茶業)농장 고용원으로 취업해 생계를 유지하면서 중국인에게 칼쓰는 법을 익혔다. 


그런데 1928년 5월 초 일본 황족으로 천황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이며 군사참의관을 지낸 육군대장, 일본 정계 거물인 구니노미야가 일본군 특별검열사로 대만에 파견되었다. 당시 일본은 중국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조명하는 구니노미야를 응징하기로 했다. 그는  5월 14일 대중시 다이쇼정[大正町] 도서관 앞으로 나가 환영하는 일본·대만인 인파 속에 숨어 기회를 노렸다. 코너를 돌아가는 자동차에 달려들어 날쌔게 독검(毒劍)으로 구니노미야를 찔렀다. 이때 입은 부상으로 구니노미야는 결국 이듬해 1월 죽었다.


조명하는 현장에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일본 군경에게 잡혔다. 그는 7월 18일 대만고등법원 특별공판정에서 소위  ‘황족위해죄(危害罪)와 불경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3개월 뒤인 10월 10일 대북(臺北)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불과 스물네 살이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당시 대만총독이 사직하는 등 파문이 일었다. 


학계 일각에서는 조명하 거사가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한 경종이었고, 결국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대륙 침략전쟁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조명하 의거는 성공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자료와 일부 연구자들은 조명하 의거를 우발적 사건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조명하 의거는 처단 대상이었던 구니노미야가 ‘천황의 장인’이었다는 점, 그리고 식민지 조선에 비해 일제 통치가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대만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상징성은 이봉창·윤봉길 의거와 다를 바 없지만, 우리가 너무 무관심한 듯하다.  



5월 15일    

중국군사위원회,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 명령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 중국 호북성 무한(武漢)에서 중국의 지원으로 창립되었다. 대장은 김원봉이었고, 제1구대장 박효삼, 제2구대장 이익성 등 100여 명으로 구성되었다. 1941년 초·중반 조선의용대 대부분이 중국 화북(華北)지역으로 북상하였으나, 김원봉 등 본부 및 일부 요원들은 중국 국민정부의 임시수도 중경(重慶)에 머물렀다. 

장개석(蔣介石) 등 중국 국민정부 측은 1940년 중반~1941년 10월 말경부터 김구의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 지원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이에 따라 1942년 5월 15일 중국군사위원회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부사령(副司令) 직제를 증설하여 김원봉을 광복군 부사령으로 파견하고,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 해 7월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대 개편선언’을 발표하고 광복군 편입을 공식 선언하였다(김희곤, 『대한민국임시정부 3-중경시기』, 독립기념관, 2009, 41~42쪽).  


5월 16일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성립


1926년 5월 16일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寧安縣) 영고탑(寧古塔)에서 조선공산당의 만주지부 조직으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滿洲總局)이 창립되었다. 화요파가 주도권을 잡고 있던 제2차 조선공산당 해외 조직의 하나로 성립하였으며, 1930년 중반 해체되었다. 제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강달영(姜達永)은 이 해 4월 초 당의 지역 지부로서 만주총국을 세우라고 상해부(上海部)의 김찬에게 지시하였다. 이에 김찬은 조봉암(曺奉岩)·최원택·김동명을 만주로 파견하여 조직을 구성케 하였다. 조선공산당 중앙은 5월 13일 조봉암을 만주총국 조직 전권위원 및 총국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조봉암 등은 하얼빈 동쪽의 위하현(葦河縣) 일면파(一面坡)에서 김철훈·김하구·윤자영 등과 만나 총회를 열고 만주총국 조직을 결의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본부를 영안현 영고탑에 두기로 하고, 만주 전체에 동만구역국(東滿區域局)·남만(南滿)구역국·북만(北滿)구역국 등 산하 조직을 설치했다. 만주총국은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에 따라 1930년 3월 ‘해체선언’을 발표하고 해산할 때까지 제1차~4차 ‘간도공산당 사건’ 등을 일으켜 중국 동북지역(만주) 한인 사회주의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파벌투쟁이 심했고, 1930년 중반부터 1932년 봄까지 다수의 한인 당원들이 중국공산당 만주 조직에 가입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혼란과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1930년대 초 중국 동북지역에서 한인 사회주의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이 고양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5월 19일   

금호문의거 주역 송학선 의사 순국


송학선(宋學先)은 이명이 인수(仁秀)라고 했으며, 1893년 서울 천연동에서 태어났다. 뒤에 경기도 고양군 아현북리(현재 서대문구 북아현동)으로 옮겨 살았다. 집안이 가난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일본인 상점 고용원으로 지내는 등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 일제의 침략과 횡포에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평소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총살한 안중근 의사의 항일 애국정신과 대장부다운 기개를 흠모하였다. 이에 따라 식민지 통치의 우두머리인 사이토(齋藤實) 조선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1926년 4월 26일 융희황제(순종)가 붕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조선총독이 형식적이나마 창덕궁으로 문상 올 것을 예상하고 4월 26·27일 금호문(金虎門) 앞에 나아가 총독을 저격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총독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4월 28일 다시 창덕궁 앞으로 가서 돈화문과 금호문 사이를 서성대며 조선총독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오후 1시가 조금 지나서 예복을 입은 고관차림의 세 사람을 태운 자동차 한 대가 금호문에서 나와 창덕궁 경찰서 쪽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이때 주위에서 “총독이 지나간다”라는 말이 들렸다. 그가 보니 세사람 중 가운데 앉은 인물이 총독 사이토로 여겨졌다. 


그는 붐비는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차 뒤를 따르다가 차가 돈화문 앞을 향하여 천천히 돌아 나갈 때 재빨리 차에 뛰어올랐다. 날카로운 칼로 먼저 왼쪽에 앉은 자의 가슴과 허리를 찔러 쓰러뜨리고, 이어 가운데 앉아있어 조선총독으로 보이는 자를 찔러 쓰러뜨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행동이었기에 일본 경찰들도 손을 쓸 수 없었다. 


이후 송학선은 도주했으나, 많은 경찰대가 추격해와서 결국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되고 말았다. 아쉬운 점은 그가 죽였다고 단정한 인물이 사이토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습격한 자는 국수회(國粹會) 지부장 다카야마(高山孝行)와 경성부 협의원 사토(佐藤虎次郞), 학교조합 평의원 이케다(池田長次郞) 등이었다. 그러나 그는 구금 중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의연하게 일제의 만행과 자신의 의거사실을 거리낌없이 주장하여 뜻있는 사람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몇 번의 공판을 거친 후 7월 23일 사형이 언도되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그러나 결국 사형이 확정되어 1927년 5월 19일 34세를 일기로 비장한 생애를 마감했다.


경성지방법원에서 그는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여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못 죽인 것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 되겠다”고 대답했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8권, 1990).


  

참의부 특공대원 압록강 순시 

사이토총독 순시선 저격


장창헌(張昌憲) 이하 참의부(參議府) 독립군 제1중대원들은 1924년 5월 19일 아침에 압록강을 순시 중이던 사이토(齋騰) 조선총독 일행 순시선을 기습 저격하여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압록강변에서 독립군의 총격을 받은 순시선은 혼비백산하여 전속력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참의부는 1924년 5월 초 만주 집안현(輯安縣)에서 통의부를 계승하여 조직된 임시정부 직할 통합 독립운동 조직이었다. 정식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이다. 


적괴 재등, 환산(丸山) 등 일행은 국경방면을 정탐코자 하여 지난 5월 초순에 경성(京城)을 출발하여 압록강 상류지방을 회탐(回探) 중이던 바, 지난 5월 19일 오전 9시 5분에 평북 고산진 하류 위원군 마시지방을 통류(通流)할 시에 독립군 10여 명의 정병(精兵)이 대안에 밀복(密伏)하고 이를 고대(苦待)하고 있다가 적선에 몰사격을 행하였으나, 적선은 응사하면서 도망하여 피차에 살상이 없었다 하며, 아군 측에서는 속도(速度)로 달아나는 적선을 추격치 못하고 귀영(歸營)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대하여 아직 확실한 보도가 없으나 전기(前記) 독립군은 남만(南滿) 의용군 제1중대의 군인들인듯 하다더라.”


  

독립선언 33인 중 1인 양한묵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1919년 5월 26일 3·1운동과 독립선언에 기여한 양한묵(梁漢默) 선생이 서대문감옥(현재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그는 1862년 전남 해남(당시 영암) 출생의 천도교 도사로서 교주 손병희의 측근, 천도교 ‘인내천’ 사상의 핵심적 이론가로 알려졌다. 그는 독립선언 뒤 체포되어 일제의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독립선언, 매우 기뻐서 서명했다”라고 당당히 소신을 밝혀 민족대표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양한묵은 평소에 건강했다. 그러나 서대문감옥으로 5월 6일 이감된 뒤, 불과 20일 만인 5월 26일 밤 갑자기 타계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타살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채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옥중에서 57세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는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유일하게 옥중에서 순국한 지사이다.


5월 27일  

여성단체 근우회 창립


1927년 5월 27일 사회운동 여성단체 근우회(槿友會)가 창립되었다. 이 해 2월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는데, 이에 부응하여 독립운동 및 여성운동 단체로 근우회(槿友會)가 창립된 것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여성운동은 교육운동, 민족산업진흥운동, 종교계 여성단체를 통한 신앙운동이나 생활향상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여성운동 흐름은 1924년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조선여성동우회가 조직된 뒤부터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양분되었다. 때문에 보다 강력한 좌우합작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신간회가 조직되었는데, 여성계에서도 여성운동 통합론이 일어나 이 해 5월 근우회를 조직하였다.


창립 취지는 “과거의 여성운동은 분산적이었으므로 통일된 조직도 없고, 통일된 목표나 지도정신도 없어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므로, 여성 전체의 역량을 견고히 단결하여 새로운 여성운동을 전개하려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1928년부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등을 중심으로 기독교여성운동을 추진했던 유각경·김활란·황에스터·최은희 등이 퇴진하자 여성 사회주의운동가들의 독무대가 되었다. 내부 분열과 자체 역량 부족, 일제의 탄압 등으로 1931년에 해체되고 말았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월 30일   

간도(중국 연변) 5·30봉기 발생


 1930년 5월 30일을 전후하여 중국 연변(북간도) 지역에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연변당부(延邊黨部) 주도로 한인 당원들의 항일투쟁인 ‘5·30봉기(간도5·30폭동)’가 일어났다. 


5·30봉기는 1930년 5월 29~31일에 걸쳐 중국 연변(북간도) 용정촌(龍井村), 두도구(頭道溝), 이도구(二道溝), 남양평(南陽平) 등 연변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현재 중국 연변학계에서는 5·30봉기를 ‘붉은 5월 투쟁’이라 하여 1930년 5월부터 계속된 한인 대중투쟁의 한 범주로 개념화하고 있다. 세칭 ‘제4차 간도공산당사건’이라고도 한다.

5·30봉기는 주로 야간에 전개되었다. 선전문 살포, 일본 영사관 습격, 친일파 단체인 조선인민회와 조선총독부 보조학교, 소수의 지주가에 대한 방화, 동양척식주식회사 출장소에 대한 폭탄 투척, 발전소 파괴, 전선 절단 및 일본 부설 철도와 교량 소각 등이 이루어졌다. 또 지주와 고리대금업자의 양식을 몰수하고 고리대 계약서와 소작증서를 불태워버린 사례도 있었다. 참가 인원은 절대 다수가 한인으로 일제 자료에 따르면 주동인원은 150~200명, 전체 참가인원은 500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그 뒤 중국공산당 주도로 일련의 대중봉기(대중폭동)가 계속되어 1930년대 초 중국 동북지역 사회주의운동 고양의 한 계기가 되었다(장세윤,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명지사, 2005).   



필자  장세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연구원, 성균관대학교 연구교수,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 동북아역사재단 교수실장 등을 거쳐 현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 『중국 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봉오동 청산리전투의 영웅-홍범도의 독립전쟁』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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