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시론 [2022/05] 한 시대에 우뚝 선 여장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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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근이는 딴 맘 먹지 말고 어서 죽으라고 전하라”
그 담대함과 자식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
국가의식을 누가 감히 따라갈 수 있을까
글 | 김중위(월간 순국 편집고문)
여성이 여성다움을 넘어 사나이다움으로 넘칠 때 우리는 그를 ‘여장부’라고 부른다. 용기와 신념과 거침이 없는 행동으로 한 시대에 우뚝 선 여장부들이 있어 우리는 때때로 그들에 대한 존경과 선망으로 스스로의 옷깃을 여민다.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의 사형언도 소식을 듣자, 그 소식을 전하러 온 정근(定根)과 공근(恭根) 두 아들에게 “중근이는 딴 맘 먹지 말고 어서 죽으라고 전하라”라고 말하였다. 이 어찌 훌륭한 어머니의 표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화폐의 초상으로는 이런 분이 제격인 것을!
여성이 여성다움을 넘어 사나이다움으로 넘칠 때 우리는 그를 ‘여장부’라고 부른다. 용기와 신념과 거침이 없는 행동으로 한 시대에 우뚝 선 여장부들이 있어 우리는 때때로 그들에 대한 존경과 선망으로 스스로의 옷깃을 여민다. 누구나 다 아는 고사(故事)이지만 한번쯤 되뇌어 보면서 다시 한번 사나이답지 못한 우리의 비겁함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 고다이바 부인(Madam Godiva)
영어사전을 펼치고 엿본다는 뜻의 peep을 찾아보면 큼지막한 대문자로 ‘Peeping Tom’이라는 단어가 별항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사전에는 “엿보기 좋아하는 호색가”라는 뜻으로 간단하게 소개되고 있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전에는 “엿보는 톰”이라는 말 이외에 “고다이바 부인의 알몸을 엿보다가 눈이 멀었다는 양복재단사”라고 친절한 해설을 덧붙인 경우도 있다.
어찌 되었건 이 얘기의 주인공인 고다이바 부인은 11세기 영국의 코벤트리시(Coventry)의 영주(領主)인 레오프릭(Leofric) 백작의 부인이었다. 어느 날 백작부인은 영주의 혹독한 세금징수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부인은 이 사실을 백작에게 알리고 몇 번씩이나 세금을 감면해 주기를 간청한다. 그러나 백작은 부인의 간청에 아랑곳도 하지 않고 지나는 말로 “당신이 알몸뚱이로 말을 타고 코벤트리 시내 거리를 한 바퀴 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야”라고 퉁명스럽게 내뱉는다.

약속대로 시민 누구도 말을 타고 거리를 누비는 고다이바 부인을 엿보지 않았지만 호기심 많은 재단사 톰이라는 사람만은 시민들 간의 약속을 어기고 창문 틈으로 그 부인의 알몸을 엿보았다. 그 순간 그 톰이라는 사나이는 그만 두 눈이 멀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늘의 벌이었다.
고다이바 부인의 용기와 자비심은 그 뒤 그림으로 시로 화폐로 기념되고 “엿보는 톰”은 영원히 호색가로 남아있는 현실에서 우리는 한 여장부의 모습을 보게 된다.
● 카테리나 스포르차(Caterina Sforza)
내가 이 여인을 만나게 된 계기는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통해서다. 마키아벨리가 정치학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필독서인 『군주론』의 저자인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런 마키아벨리를 주인공으로 하여 르네상스시대의 이태리 정치 전반에 대한 정세를 재미있게 엮은 책으로는 어쩌면 나나미의 것이 유일하지 않나 싶다. 나는 그의 저서 속에서 이태리의 여걸 카테리나 스포르차를 만나게 되었다,
이태리라고 하는 하나의 반도 안에 여러 도시국가가 난립하면서 어깨를 부딪치며 살다 보면 자연 국가 간의 전쟁은 필수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런 이태리에 로마의 교황은 몇 대에 걸쳐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모른 채 타락의 늪에 빠져 탐욕의 눈길을 결코 감아본 적이 없었던 한 시대가 있었다. 바로 르네상스시대다. 카테리나 스포르차라고 하는 여걸은 그 시대에 이태리 4대세력인 밀라노의 지배자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 공작의 서출(庶出)로 태어났다.
그는 14세 되던 해 그의 아버지 갈리아초 공작이 성당 안에서 미사 도중에 암살당하는 끔직한 일을 당한지 불과 몇 달만에 이태리의 아주 작은 도시 포를리(Forli)시의 영주이자 교황 식스투스(Sixtus)4세의 조카이며 추기경인 지를라모 리아리오 백작과 결혼을 하였다. 앞서 말한 고다이바 백작부인처럼 그도 백작부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남편 지를라모 역시 음모가 판치는 난세에서 교황의 조카로 위세를 날리다가 교황이 죽자 피렌체의 메디치가의 지원을 받는 자신의 부하들에 의해 자기 방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단검에 찔려 죽고 카테리나는 아이와 함께 암살자들에 의해 납치되어 간다.
암살자들이 포를리 시를 자신의 것으로 탈취하려는 음모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카테리나는 암살자들의 눈을 속여 그의 친정인 밀라노 공국과 동맹관계에 있는 어떤 성채에 들어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원군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암살자들은 카테리나의 두 아들들을 앞세워 칼을 들이대고 카테리나가 나와서 항복하지 않으면 이 아이를 모조리 죽이겠다고 협박을 한다.
꼼짝도 안하던 카테리나는 별안간 “맨발에 머리도 묶지 않고 풀어 헤친 모습으로” 성벽 위에 우뚝 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는 유유히 치맛자락을 걷어 올린 채 이렇게 외치는 것이었다.
“이 멍청이들아! 이것만 있으면 아이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낳을 수 있단 말이다. 이 바보들아!”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였지만 남편이 없는 여인이 힘없는 소국 포를리의 영주로 나라를 다스리자니 자연 끊임없는 외부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위세를 등에 업고 이태리 최고의 군주가 되기를 꿈꾸고 있는 당대의 야심가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는 추기경의 빨간 옷을 군복으로 갈아입고 나서 카테리나가 버티고 있는 포를리 성을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체사레 군대의 그칠 줄 모르는 포탄세례가 무자비하게 퍼부어대자 카테리나는 이 포탄에 맞서 이런 문구를 써 넣은 대리석포탄을 쏘아댔다는 것이다.
“대포알 좀 작작 쏴라? 그렇게 쏘아대다간 당신네 불알이 다 터져 나가겠다!” 얼마나 담대하고 얼마나 용감한 여인이었던가?
●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일본경찰이 찾아와 아들의 죄를 실토하라고 족치기를 매일같이 하였다. 이에 그 어머니 조 마리아는 “내 아들이 나라 밖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이 나라 백성으로 태어나 나라의 일로 죽는 것은 백성된 도리다. 내 아들이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나 역시 아들 따라 죽을 뿐이다.”
그러고 나서 아들의 사형언도 소식을 듣자 그는 그 소식을 전하러 온 정근(定根)과 공근(恭根) 두 아들에게 “중근이는 딴 맘 먹지 말고 어서 죽으라고 전하라”라고 말하였다. 얼마나 비장한 말인가?
한순간이라도 어리석은 자식이 되지 않기를 얼마나 소원하였으면 그런 말이 불쑥 튀어 나왔을까? 아들 중근이가 일제의 회유와 협박과 고문에 쓰러질까 두려운 마음도 다른 이가 아닌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이기에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이런 어머니가 있어 이런 아들이 태어났다”고 당시의 <대한매일신보>(1910년 1월 29일자 ‘是母是子’)는 대서특필로 보도하였다고 한다.
이 어찌 훌륭한 어머니의 표상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담대함과 자식에 대한 자부심과 넘치는 사랑과 국가의식을 어느 누가 감히 따라갈 수 있을까? 화폐의 초상으로는 이런 분이 제격인 것을!

경북 봉화 출생.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대구대학교에서 명예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상계> 편집장, 4선 국회의원, 초대 환경부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주요 저서로는 『정치와 반정치』, 『눈총도 총이다』, 『노래로 듣는 한국근대사』 등 다수가 있다. 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 국제 PEN클럽 고문, 한국시조협회 고문 등과 함께 월간 <헌정> 편집인, 월간 <순국> 편집 고문, 한국문예학술저작권협회 회장 등을 맡으며 칼럼과 수필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