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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2022/05] 조선민족대동단, 항일운동의 기치를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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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통일과 실력양성에 의한 민족독립 달성 위해 창단


세계평화 대원칙 따라 조선독립을 선포하다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1919년 5월 20일,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을 창단하고, 이를 대외에 선포하였다. 조선민족대동단은 대동주의에 입각하여 민족의 정신통일과 실력양성에 의한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 창단된 비밀단체였다. 대동단은 관료·유림·군인·교사·승려·상인·여성·노동자·보부상·학생 등의 다양한 인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3·1 독립운동 이후 지사 중심의 민족운동으로 방향이 잡힌 것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1919년 5월 20일, 이날 항일운동의 기치를 높이 들고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을 창단하고, 이를 대외에 선포하였다.

“우리 조선민족은 2천만 성충(誠忠)과 묵계(黙契)의 발동에 따라 반만년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인류대동의 새로운 요구에 응하려 하며 세계평화의 대원칙을 준수하고 정의·인도의 영원한 기초를 확립하기 위하여 앞서 조선독립을 선포했다. … 우리 민족은 민족적 정신의 자각을 진중히 가지며 생존상 기능의 자신을 발휘하여 엄격한 주장을 관철할 것이다. … 우리 민족 영세의 귀추인 3대 강령을 내세워 이를 세계에 선언하는 바이다.” 

이는 조선민족대동단 선언서의 일부이다. 그리고 이 선언서에 다음과 같은 ‘3대 강령’이 덧붙여져 있다.

(1) 조선 영원의 독립을 완성할 것
(2) 세계 영원의 평화를 확보할 것
(3) 사회의 자유와 발전을 광박할 것 


조선민족대동단의 ‘3대 강령’에는 독립·평화·자유와 발전을 갈구하는 우리 민족의 염원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결의는 ‘3대 강령을 몸소 실현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 통치의 현재 시설을 완전히 인계하고 총독 정치를 철거하여 온전한 사회 발전의 시설을 시행할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뒤 이어 ‘일본이 우리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포학을 계속 자행할 때는 하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을 쓸 터인즉 이에 관련된 결과는 일체 우리가 그 책임을 지지 않을 것임’도 덧붙이고 있다. 

대동주의 입각해 민족의 정신통일과 
실력양성에 의한 민족 독립 달성 목표

조선민족대동단은 대동주의에 입각하여 민족의 정신통일과 실력양성에 의한 민족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 창단된 비밀단체였다. 대동단은 관료·유림·군인·교사·승려·상인·여성·노동자·보부상·학생 등의 다양한 인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3·1 독립운동 이후 지사 중심의 민족운동으로 방향이 잡힌 것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여기 ‘대동’(大同)이란 전국을 망라한 각계의 유력인사를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독립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3·1 독립운동이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지만, 통일된 지휘체계가 없었고, 여러 분파로 나뉘어서 진전됨에 따라 그 효과를 극대화하지 못하였음에서 얻은 교훈이었다. 

그리고 대동단을 창단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전협·최익환·정남용·이기연·이내수·최전원 등이었다. 전협은 단장을 맡아서 대동단을 통활하면서 단원 모집에 힘썼는데, 한말 농상공부대신을 지낸 동농 김가진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이때 동농은 1910년 경술국치가 있은 후 서울 체부동 자택에 칩거하면서 전직 대신으로서 비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의친왕, 상해 망명을 시도하다

그러던 동농 김가진은 7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누더기를 걸치고 상해(上海)로 망명, 항일운동의 폭을 해외로 넓혀나갔다. 이때 동농이 망명 길에 오르면서 지었다는 시귀가 필자의 가슴을 찡하게 한다. 

“나라는 깨지고 임금은 죽고 
사직은 기울어졌도다
 부끄러움을 안고 죽음을 참으며 
이제껏 살았구나
이 늙은 몸은 아직도 하늘을 꿰뚫는 뜻을 
품고 있나니
단숨에 솟아올라 만리 길을 날아가노라”

이것은 두 편의 시 중에 그 한 수이다. ‘나라는 깨지고 임금은 망하고 … 부끄러움을 안고 죽음을 참으며 이제껏 살았구나’, 전직 대신으로서의 가슴에 맺힌 한을 토해낸 것으로 짐작된다.   

동농은 하루 하루가 바빴다. 동농은 만감이 교차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1846년 안동김씨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문필이 출중하였지만 서출의 신분 때문에 과거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던 그가 1877년 32세 때 규장각 검서관이 되었는데, 그 당시 검서관은 서출의 신분이더라도 등용될 수 있는 직책이었다. 그리고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적서(嫡庶)의 차별이 철폐됨으로써 1886년 41세 때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벼슬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895년에는 농상공부대신에 올랐다.  

동농은 혼자서 지난 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이제부터 대동단의 총재로서 무엇을 할까에 관하여 고민에 빠졌다. 그 첫 사업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와 손잡고, 의친왕 이강(李堈)을 상해로 망명케 하는 일이었다. 왕족을 임시정부에 참여케 함으로써 외교적 효과를 노리고자 한 계획이었다. 임시정부가 밀파한 이종욱을 통해 의친왕을 상해로 망명케 하는 일은 순조롭게 추진되었다. 1919년 11월, 의친왕 일행이 국내를 무사히 탈출, 만주의 안동현(安東縣)에 도착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를 ‘대동단(大同團)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 사건에 연루된 대동단 간부 31명이 체포되어 징역 6개월에서 8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20년 3월, 동농은 상해에 대동단 해외본부를 설치하고, 총재로서 포고문, 공고문 등을 배포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때 대동단은 임시정부와 유대를 가지면서 활동을 펴나갔으며, 동농은 임시정부의 고문으로 추대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쳤다.  

필자  권용우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ㆍ법과대학장ㆍ산업노사대학원장ㆍ행정법무대학원장ㆍ부총장ㆍ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正心法學) 포럼 대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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