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2/05] 민족운동의 출발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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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운동의 출발 동학농민혁명 지도자
반봉건·반외세 근대 민족운동의 뜨거운 시작
새 세상 꿈꾼 위대한 무장항거정신 항일의병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글 | 편집부
올해는 동학농민혁명 128주년이자, 황토현 전승일인 5월 11일이 법정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지 4년 되는 해다. ‘민란’, ‘폭도의 반란’으로 불리던 오명을 벗고 ‘농민혁명’으로 당당히 인정받기까지 한 세기가 넘게 걸렸다. 황토현 전승일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태인(泰仁)과 고부(古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였던 황토현에서 농민군과 관군이 접전한 싸움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둔 날이다. 이를 기점으로 동학농민혁명은 충청도와 강원도, 황해도, 경상남북도 등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정부가 황토현 전승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한 이유다.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척화(斥倭斥華)의 기치를 높이 들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당당히 일어선 무장항거정신은 이후 항일의병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이 되었다.
이후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부는 이웃 마을의 봉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발표하고 손화중, 김개남 등 동학 지도자들과 접촉하면서 대규모 봉기를 추진했다. 같은 해 3월 20일, 고부의 승리에 힘을 얻은 이웃 농민들이 무장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나라를 바로잡고 민중의 생활을 개선하자(보국안민, 輔國安民)”라며 본격적인 투쟁을 선언했다. 바야흐로 동학농민운동이 불붙었다.
당황한 전라관찰사는 서둘러 조정에 군대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전라도 일대의 모든 군대를 동원해 농민군을 공격했다. 농민군은 진격을 거듭하면서 정부군마저 물리치고 전주성을 점령했다. 거듭되는 패배에 당황한 조정은 청의 군대까지 끌어들였다. 외세의 침략으로 상황이 급변하자, 농민군은 대개혁을 요구하며 조정과 협상을 벌였다. 조정으로부터 개혁 정책을 실천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농민군은 1894년 5월 전주성에서 철수했다.

이러한 가운데 청을 한반도에서 몰아낸 일본군이 정부군을 앞세워 농민군을 진압하려 들었다. 1894년 9월, 농민들은 나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척왜척화(斥倭斥華)’의 기치를 내걸고 2차 봉기를 감행했다. 하지만 공주 우금치 전투를 기점으로 농민군의 대항쟁은 막을 내렸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시대에 뒤떨어진 제도를 고쳐 근대 사회로 전환하는 디딤돌을 놓았다. 아울러 외세의 침략에 맞선 전투는 이후 항일의병과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오랫동안 민족운동에 나선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었다.
민중이 주인 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
전봉준(1855~1895)
유난히 몸집이 작아 ‘녹두장군’이라 불렸던 전봉준(1855~1895)은 아버지가 고부 군수에 맞서다 곤장을 맞고 세상을 떠난 뒤에 사회 변혁을 꿈꾸었다. 고부 봉기 때부터 지도자로 나서 동학군의 최후 전투인 우금치 전투 때까지 농민군을 이끌었다.
전봉준은 ‘조선은 곧 허물어질 집이요, 중병에 걸린 환자’라고 주장하며, 새로운 세상을 우리가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금치 전투의 참패로 새로운 세상을 열지 못한 채 12월 2일 관군에게 체포되었다. 일본군에게 넘겨진 전봉준은 살려달라고 하면 일본으로 데려가 원하는 일은 무엇이라도 들어주겠다는 제의를 뿌리치고, 다섯 차례의 심문 끝에 사형을 선고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봉준은 일본 영사관에서 조사받던 중 “일본병을 물러나게 하고 악하고 간사한 관리를 축출하여 임금 곁을 깨끗이 한 후에는 몇 사람 중심이 되는 선비를 내세워 정치를 하게” 하고 자신들은 고향에 돌아가 농사에 종사할 생각이었고, 이때 “국사를 모두 한 사람의 세력가에게 맡기는 것은 크게 폐해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몇 사람의 명사에게 협력하여 합의법에 의해 정치를 담당하게 할 생각”이었다고 진술했다. 군주를 부정하진 않았지만, 일반 농민들의 의견이 중앙에 직접 반영되는 새로운 정치 권력 하에서 개혁을 추진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 야망이 아니라 민중을 위해 분연히 일어서 일본의 회유를 거부한 채 죽음을 택한 전봉준의 삶은 “민중을 반침략, 반봉건의 방향으로 각성시킴으로써 이후의 사회변혁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의 진전에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대를 앞서간 그의 개혁안은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수용되었고, 그가 보여준 무장항거정신은 항일의병전쟁으로 이어졌다.
가장 많은 부대원 이끈 온화한 리더십
손화중(1861~1895)

전봉준은 손화중이나 김개남보다 훨씬 늦게 동학에 입도했고 포교 활동을 하지 않았으니,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려면 손화중 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화중은 전봉준, 김개남과 손을 잡아 황토현전투에 이어 장성전투, 전주 점령에 주도적 구실을 했다. 그는 집강소 기간에 강경파인 김개남보다 온건파인 전봉준과 노선을 같이하면서 장성과 광주 등지에서 활동을 벌였다.
전봉준이 9월, 대일 전면전을 펼칠 때 그는 광주 일대를 지키며 군수전과 군량미의 조달에 앞장섰고, 일본군이 남쪽 바다로 올라온다는 정보에 따라 남쪽 방어 임무를 맡았다. 전봉준의 주력 농민군이 공주전투에서 패배하고 이어 원평과 태인전투를 마지막으로 해산하자, 그는 남은 농민군을 이끌고 광주와 나주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일본군에게 붙잡힌 손화중은 나주의 초토영 감옥에서 전봉준과 만난다. 두 사람은 서울로 끌려와 함께 재판을 받고 1895년 3월 30일 새벽 한날 처형당했다. 손화중의 나이 35세였다.
봉건사회 타파에 온몸을 내던진 열혈남아
김개남(1853~1895)

1894년 연합전선이 형성되어 본격적 봉기가 전개되자, 김개남은 동학군 총관령이 되었다. 남원을 중심으로 임실, 장수, 무주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남원에서는 노비, 백정, 승려, 장인, 재인을 중심으로 한 천민 부대를 거느리기도 했다. 온갖 차별 속에서 서러움 당한 이들을 끌어안고 스스로 왕이라 자처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의 밀사를 꽁꽁 묶어 죽이려 했고, 현직 수령들이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으면 서슴없이 칼로 쳤으며, 전봉준에게 협조를 아끼지 않은 전라감사 김학진조차 전혀 상대하지 않았다. 이러한 철저한 반봉건운동 이력 탓에 오랫동안 역사에서 핍박을 받았다.
1894년 9월 2차 봉기에서 그는 전봉준의 공주 공격에 합류하지 않았다. 대신 강력한 직속 농민군을 이끌고 장수, 금산, 진잠을 거쳐 청주병영 공격에 나섰다. 비록 공격은 실패했지만, 청주병영의 관군이 공주전투에 투입되지 못하도록 하는 데 한몫했다.
옛 친구의 밀고로 붙잡혀 전주로 끌려가 정식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 1895년 1월 8일 전주장대에서 참수당했다. 전라관찰사 이도재는 김개남의 명성에 겁을 먹고 서울로 압송하는 데 위험을 느껴 임의로 처형했다고 한다. 그의 나이 42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