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스크랩 [2022/06] 윤봉길 의사 상하이의거 90주년 대토론회 주제발표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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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가 꿈꾼 민족 독립과 인류 평화
자유와 평화 사랑한 진정한 휴머니스트
민족 독립과 인류 평화를 외치다
글 | 장석흥(국민대학교 교수)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4월 21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에서 <매헌윤봉길 의사 상하이의거90주년 기념 대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윤봉길 의사가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의 수뇌부를 일거에 처단하는 장렬한 의거를 단행한지 90주년이 된 것을 기념하여 한시준 관장(독립기념관)을 좌장으로, 김상기 교수(매헌연구원장, 충남대학교), 장석흥 교수(국민대학교) 등이 각각 <상해 의거의 역사적 의의와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 <윤봉길이 꿈꿔왔던 대한민국에서 ‘평화’의 의미>를 주제로 발표했다. 이에 월간 <순국>에서는 장석흥 교수의 주제발표 논문을 게재한다.
청년 윤봉길의 강의(剛毅)한 자유사상
1929년 「월진회 취지서」에서는 제국주의의 부도덕적이고 반인륜적 행위에 대해 비판했으며, 현실 세계에서는 ‘자작자급에 힘을 써서 나의 전도를 내가 이행’하기 위해 조직했다고 표명한 바 있다.16) 또 윤 의사는 제국주의의 반인륜적인 잔인함을 떨쳐 버리고 인류가 서로 도우며 사는 ‘상조상애’의 신세계를 건설하자고 하는 꿈을 지니고 있었다.17)
그런가 하면 자신이 간행한 『농민독본』에서 “인생은 자유의 세상을 찾는다. 자유의 세상은 우리가 찾는다”고 외쳤다.18) 그러나 농민운동으로 민족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한 윤 의사는 역경을 밟기로 결심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생각은 망명하기 직전 지은 “지금의 고향은/ 귀막힌 벙어리만 남아/ 답답하기 짝이 없구나/ 동포야 네 목엔 칼이 씌우고/ 입 눈에 튼튼한 쇠가 잠겼네/ 고향아 옛날의 자유 쾌락이/ 이제는 어데 있는가!”라는 「離鄕詩」에 담겨져 있다.19)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겪으며 ‘대한의 어린이들에게 식민지 노예의 삶을 물려주지 않고자’20) 독립운동의 길로 나선 것이다.
식민지 노예의 굴욕적 삶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인간의 이상과 꿈으로서 자유와 평화를 진정으로 바랬다. 그런 자유와 평화를 위해 이 시대의 청년들은 부모, 처자의 사랑보다 더 큰 민족을 위해 나서야 한다는 것을 힘주어 말했다. 부모, 처자의 사랑에 얽매여 식민지의 삶을 영위할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화로운 민족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바쳐야 한다는 것이 윤 의사의 흔들리지 않는 결심이었다.
다음은 아들 종에게 보낸 편지이다. 일자 미상으로, 네 살짜리 아들 종(淙)이가 큰집의 육촌 형 두순(斗淳)에게 ‘형은 아버지가 있으니 좋겠다’고 한 말을 전해듣고 쓴 편지이다.
종아! 재롱 많이 하고 사랑 많이 받아라. 네가 정말 두순에게 너는 아버지 있으니까 좋겠다고 하였니? 네 살 짜리가 그런 감이 있다면 그야말로 동정 많은 기린아요, 감각 많은 신동 아이다.
사회·경제·정치 이것은 발생학적 순서이다. 그렇다. 그런데 현실적 통제 관계(식민지 지배체제-필자 주)에서는 이 순서가 거꾸로 됐다. 즉 경제가 사회를 지배하고, 정치는 경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 인생의 변환도 그에 따라 결정되고 있다. 부모의 핏줄로 태어나 부모를 떠나서 부모를 위해 노력함이 쓸데없는 말이 아니다. 사실상 부모는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요. 자식은 부모의 수유물이 못되는 것은 현대 자유계의 요구하는 바이다.
종아! 너는 아비가 없음이 아니다. 너의 아비가 이상의 열매(독립과 자유-필자주)를 따기 위해 잠시 돌아다니는 것이지, 영구적으로 떠난 것은 아니다. … 후일 따뜻한 악수와 따뜻한 키스로 만나자.
짧은 내용이지만, 네 살 먹은 어린 아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했다. 어린 아들이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을 보다 못해 소식을 전한 집안사람들에게, 굳건한 자신의 의지와 포부를 밝히고 있는 것이다. 아들에 대한 사랑이 넘쳐났던 윤 의사는, 훗날 아버지를 이해하기를 바라는 뜻을 행간마다에 진하게 담고 있다.
네 살짜리 아들이 ‘아버지가 없다’라는 말을 듣고 그의 가슴은 어떠했을까. 부모와 자식을 갈라놓을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노예의 삶이 얼마나 저주스러웠을까. 그런 심경을 윤 의사는 두 가지 예로 설명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꿰뚫고 있던 윤 의사의 현실 인식이다. 윤 의사는 고향에서 한학을 익히는 한편 1925년경 신문, 잡지 등을 구독하면서 서양의 학문과 사상을 익혀 나갔다. 이 무렵 윤 의사는 신문이나 《개벽》 등의 잡지를 통해 칸트와 맑스의 이론을 섭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25) 독학이지만 윤 의사는 식민지 현실의 사회·경제·정치의 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윤 의사는 부모 자식 관계도 꼭 함께 있어야만 효도이고 사랑인 것만은 아니라고 간절히 말했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부모, 자식의 사랑까지도 초월한 그의 비장한 결의를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을 그는 현대사회의 자유계가 요구하는 바라고 말했다. 비록 부모를 떠나 있어도 효도를 할 수 있다는 게 윤 의사의 생각이었다. 그렇듯이 자식 곁을 지키고 있어야 꼭 자식을 사랑하는 것만은 아니라고도 했다.
떠나 있지만 더 큰 효도,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부모가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고, 자식이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그는 누구보다 효심이 깊은 아들이고 사랑이 넘쳐난 아버지였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결국 더 깊은 사랑, 식민지 노예의 삶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독립운동의 길에 나섰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아들 종에게 아버지가 곁에 없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아버지가 이상의 열매(독립과 자유: 필자주)를 위해 잠시 해외에 머무는 것이지, 영구적으로는 함께할 것이라는 언약도 잊지 않았다. 1930년대 초 청년 윤봉길의 민족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염원은 이렇듯 부모 자식 간의 혈연을 초월한 경지로 승화되고 있었다.
휴머니스트 윤봉길의 서정(敍情)과 마지막 유언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출사표를 남긴 윤 의사가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1931년 6월 23일이었다. 그가 의거에 이르기까지 상하이에 머무른 기간은 10개월 정도였다. 그는 상하이에 도착하자마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백범을 찾아갔다. 독립운동의 포부를 내보인 그는 백범의 주선으로 종품공사에서 일했다.
이 무렵 중국의 정세는 독립운동을 압박하는 형상으로 악화되어 갔다. 그가 상하이에 도착한지 열흘도 안 되어 7월 초 만주에서 소위 ‘만보산사건’이 발생했다. 만보산사건은 독립운동계나 중국지역 한인 사회에 크나큰 악재로 작용했다. 중국 길림성 만보산 삼성보(三姓堡)에서 한·중 농민들 사이에 농토의 수로 문제를 가지고 빚어진 단순한 충돌을 일제가 왜곡 조작하면서 한·중 양민 간에 격렬한 충돌로 비화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중국 전역에서 한인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거세게 일어났다. 상하이지역도 마찬가지로 한중 노동자들 간에 충돌이 곳곳에서 일어나, 한인들이 크게 위축되고 있었다.
윤 의사는 그런 상황을 맞이하며 향후 방도에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이런 심경은 8월 15일자 동생 남의에게 보낸 편지 ‘사랑에 넘치는 남의에게’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보라. 금번 만보산과 삼성보의 사건을 보라. 그 원인이 어디로 비롯하였는고. 제1은 빼빼마른 삼천리 강산에서 생활의 고통과 경제의 구축으로 밀리어 나오게 된 것, 제2는 이 광대한 천지간 일부(一抔)의 지구상에 생존하는 그 자들이 자아를 고창하는 반면에 민족 차별의 관념이다.
만보산사건을 바라보는 윤 의사의 관점은, 첫째 식민지 지배에 의해 강토를 빼앗겨 해외로 쫓겨나 생겨난 일이고, 둘째는 일제의 침략과 팽창에 따른 민족의 억압과 차별에 의해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일제의 농간에 넘어가 민족 간에 충돌이 일어난, 문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윤 의사는 일제가 상하이를 침공하던 1932년 1월 31일, 고향의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상하이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니 어머니가 걱정하실까 보낸 편지였다. 먼저 자신이 안전하다는 안부를 전하면서, 침략전쟁의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마치 전투 상황을 보고하는 듯한 내용이다. 그만큼 그가 침략전쟁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는 침략전쟁의 도발을 ‘민족 대 민족’의 힘의 대결로 보았고, 그 결과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이 무렵 윤 의사는 강력한 의열투쟁의 준비를 갖추어 나갔다. 2월에는 청년 대원들과 함께 부두노동자로 위장해 일본군 무기고 폭파를 위한 특무작전에 참가하던 중이었다. 일본침략군의 최전선인 상하이에서는 윤 의사가 만반의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3월 초부터는 의거를 준비해 갔다. 4월 28일 의거 전날 홍구공원을 답사하면서 그의 발에 밟힌 풀들이 어떤 것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어떤 것은 다시 일어서는 것을 들여다보며32) 감회가 깊어 조국의 봄을 기다리는 유촉시 ‘신공원에서 답청하며’를 한 편 지었다.33) 시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왕손(王孫)으로 더불어 같이 오게/ 청청(靑靑)한 방초여
명년에 춘색이 이르거든/ 고려 강산에도 다녀가오/ 다정한 방초여
작은 풀 하나에도 소홀함이 없는 윤 의사는 생명과 자유, 평화를 사랑한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왕손(王孫)은 굴원초사에 등장하는 주나라 왕실의 후예를 이른다. 주나라가 망한 이래 왕손은 불운한 현실이지만 밝아올 미래를 염원하는 인물로 묘사되었으며, 당송 시대에는 그리운 ‘님’과 같은 의미로 널리 사용됐다. 일본의 차지가 된 홍구공원이 명년 봄에는 중국의 품에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조국의 강산에도 방초가 푸르고 푸르기를 염원하는 모습은 시리도록 애절하기까지 하다. 의거 전날 의거 현장을 답사하면서 ‘처처한 방초’를 대하고 이처럼 아름다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이가 바로 윤 의사였다.
‘조국의 청년들에게 남긴 시’는35) 독립전쟁을 준비하고 독립군으로 나설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다. 주목할 것은 머지않아 광복이 도래할 것을 예견하고 있는 점이다. 곧 일본제국주의가 멸망할 것이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윤 의사의 신념이었을 뿐 아니라 대세를 꿰뚫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모두들 암흑이라 여기고 있던 시기에 윤 의사는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하고 있던 것이다.
사랑하는 두 아들 모순(模淳)과 담(淡)에게 전하는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를 남겼다.36) 어린 두 아들에게 마지막 남기는 유언이,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독립투사가 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는’ 광복의 주역이 되어 달라는 아버지의 뜻을 간절하게 전했다. 아들에게 식민지 노예의 삶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살신성인했지만, 그것을 당대에 이루지 못한 자신의 심경이 절절히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조선 청년들에게 남긴 시’와 마찬가지로, 아들의 대에서 광복이 반드시 이뤄질 것이란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제 떠나는 길에 이르러서는 ‘빈 무덤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는 말로 어린아들과 작별을 고하고 있다. 빈 무덤이라 한 것은 의거 현장에서 자결을 통해 산화할 것을 작정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세상에서 아버지가 걸어간 길을 기억하고,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역군이 되기를 부탁했다. 이것이 윤 의사가 아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다.
백범과의 만남, 인류 평화를 향하다
백범과의 인연은 1년여 짧은 만남이었다. 윤 의사에게 백범은 청산과 소나무, 봉황이었고 더없이 맑고 강건한 의기를 지닌 붉은 정성[赤誠]이었다. 시를 통해 확인되는 것이지만,37) 백범에 대한 지고지순한 공경심은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믿음이 있었기에 윤 의사와 백범은 생사를 초월한 일심동체가 되어 민족의 자유와 평화를 추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혈육의 정마저도 뛰어 넘은 부자지간이나 사제지간을 이룰 수 있었다. 상하이의거는 이런 고결한 두 사람의 정신에서 비롯됐다.
1932년 4월 29일. 일본 왕의 생일인 ‘천장절’이자, 상하이를 침략한 일본군의 승전축하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홍구공원에는 1만 명의 일본군이 전차 및 대포를 앞세워 열병식을 거행하고, 수십 개의 대형 욱일기가 행사장 주위에 펄럭이며 침략자의 위용을 맘껏 뽐내고 있었다. 그 경계도 삼엄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윤봉길은 혈혈단신으로 의거를 통쾌하게 성공시켰다.
이런 윤 의사의 의거는 여느 의열투쟁과 달랐다. 상하이를 침공한 일본군을 상대로 중국 국민당군이 감당하지 못한 것을 격전지인 전장터에서 벌인 독립전쟁에 다름 아니었다. 소위 승전기념식에 1만여 명의 일본군이 위용을 뽐내고, 일제가 시라카와의 사망을 ‘전사’ 처리한 것은 의거 현장의 정황을 말해주고 있다. 즉 독립전쟁의 선두에 서서 일본군을 일망타진한 것이 윤 의사의 의거였던 것이다.

「신문조서」에 따르면,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대해, “현재로서는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해 독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세계에 커다란 전쟁이라도 일어나서 강대국이 피폐하면 그때 각 국민이 독립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르비아나 폴란드가 독립했던 것처럼 조선도 독립할 수 있을 것이”40)라 대답했다. 일제의 퇴치의 과제를 세계 대전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고 본 것이며, 한국의 독립만이 아니라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위한 의거였음을 밝히고 있는 점이다.
다음에, “세계 대전을 일으킬 수가 없으면 독립운동가는 쓸모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는 “우리들 독립운동가는 나무에 비료를 주거나 물을 주어 자연적인 발육을 돕는 것처럼 국가 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이 역할이다”라며, 일본이 세력을 믿고 조선을 침략하고 중국마저 침략하는 것이 너무 추악하다고 답했다.43) 주목할 것은 독립운동가의 역할을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 나무의 자연 발육을 돕는 것과 같은 역할이며, 일제 패망을 앞당기는 데 그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다.
또 의거가 독립운동에 크게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는, “한두 명의 상급 군인을 죽여 독립이 쉽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의 폭탄투척이 독립에 직접 효과는 없지만, 단지 조선의 각성을 촉구하고 더 나아가 세계 사람들에게 조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이다”라고 분명히 답했다.44)
이상에서 보듯이, 윤 의사 의거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모순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온 인류가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정의로운 세상을 보다 앞당기기 위해 실행한 거사였다. 세계대전이 일어나 일제가 패망하면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것이었다.45) 어둠 속에서도 새벽을 준비하는 듯한 윤 의사의 전망은 적중했다. 윤 의사 의거가 일어난 지 5년여 만에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9년 만에 미일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13년 뒤 세계대전을 통해 일제는 패망하고 한국은 독립을 되찾았다. 윤 의사는 자신의 의거를 단지 한국 독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가 멸망하는 날을 조금이라도 앞당겨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전개한 것이었다.
평화의 상징, 가나자와(金澤)의 순국기념비
의거 후 윤 의사는 1932년 5월 29일 일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사형 집행이 연기되다가46) 11월 18일 오사카 위수감옥에 이송되었다. 일본반제동맹원들의 윤봉길 총살형 반대 운동이 벌어지자, 12월 18일 가나자와(金澤) 9사단 사령부로 이송하였다. 그리고 12월 19일 아침 7시 40분 가나자와 교외 미쓰고지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여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윤 의사의 유해는 가족에게 인계되어야 함에도 육군묘지 관리소 옆의 통로에 암장되었다. 유해는 가나자와 형장의 길가에 묻혀 행인이 밟고 다닌 수모를 겪었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 백범의 지시로 1946년 3월 윤 의사의 유해를 찾아 조국으로 봉환했으며, 1946년 7월 7일 성대한 국민장을 거행한 뒤 효창원에 모셔졌다.
윤 의사에 대한 현양 사업도 이어지며, 1966년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충의사를 세웠다. 1987년 의거 55주년 기념을 맞이해 매헌윤봉길기념관을 서울 양재동에 세웠다. 1992년 4월 윤 의사 순국 60주년을 맞아 1992년 4월 21일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과 윤의사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일본 가나자와(金澤)에서 윤 의사의 암장지 위쪽에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가나자와의 시민단체는 1992년 12월 ‘윤봉길의사암장지적비’를 건립하였다. 월진회 일본지부와 ‘윤봉길의사와 함께하는 모임’은 지금도 암장지적을 보존, 관리하고 윤봉길의 업적을 현창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곳은 인류의 평화를 염원하는 가나자와시의 일본인 자원 봉사자들에 의해 정성껏 모셔지고 있다. 이는 한일 간의 우호와 협력, 나아가 인류 평화 구축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에서는 윤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의거 현장인 홍구공원 내에 윤의사전시관을 지어 기념하고 있다.
이처럼 한·중·일에서 윤 의사에 대한 현양 사업을 벌이는 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단언컨대 분명한 사실은 인류 평화에 대한 윤 의사의 실천과 희생을 기리기 위함이라 볼 수 있다.
가나자와의 순국기념비는 한국 독립운동의 의열투쟁과 테러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인류 평화를 지향한 의열투쟁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세상 어디에서도 자국에 심대한 타격을 준 타국의 사람에 대한 기념비가 세워졌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이런 사실은 한국 독립운동의 의열투쟁이 자유와 평화를 위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윤봉길 의사는 죽어서도 현장에서 민족 독립과 인류 평화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장석흥 교수는 국민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를 받은 후 1996년 교수로 임용, 현재 국민대 한국학연구소장직을 맡고 있다. 독립운동사 분야에 ‘6·10만세운동’을 비롯한 탁월한 연구업적을 쌓았으며, '임시정부의 버팀목, 차리석평전’, ‘안중근의 생애와 구국운동’ 등 다수의 저서와 ‘해방 후 해외 한인의 귀환문제’ 등 국내·외 독립운동사 100여편의 연구논저를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