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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 [2022/06] 경남 하동의 독립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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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인 독립선언서 만들고 남해까지 시위 전파


“폭동 대신 인도와 정의로 독립을 이루자” 


글 | 전혜빈(국가보훈처 연구원) 


경남 하동(河東)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교통과 물류의 거점으로 일찍이 대읍(大邑)을 이루었다. 한말 동학 농민군과 영호남 의병들의 항일정신이 하동 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하동 지역 독립만세운동은 총 17회로 참가 인원은 1만 2천 명, 사망자 17명, 부상자 95명, 옥고를 치른 사람은 50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그 횟수나 규모로 볼 때 만세운동 열기가 치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동에서는 독자적인 독립선언서가 등장했으며, 남해까지 시위를 전파했다. 


화개장터와 쌍계사(雙磎寺),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최참판댁으로 널리 알려진 경남 하동(河東)은 지리산과 섬진강, 남해를 끼고 있어 산과 강, 바다를 다 가진 풍요로운 고장이다. 여기에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교통과 물류의 거점으로 일찍이 대읍(大邑)을 이루었다. 한말 동학 농민군과 영호남 의병들의 항일정신이 하동 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적량면장 박치화의 독립선언서  


하동 최초의 만세시위는 1919년 3월 13일 양보면 일신학교 교사 정세기(鄭世基)와 정성기(鄭成基), 정윤기(鄭潤基)의 주도로 하동시장에서 일어났다. 적량면장 박치화(朴致和)는 원근의 만세시위 소식을 듣자 3월 14일 사표를 내던졌다. 그리고 현산학교를 운영하는 정낙영(鄭洛榮)과 정인영(鄭寅永)·이성우(李聲雨)·이범호(李範鎬) 등과 함께 다음 장날인 3월 18일을 거사일로 정한 후 태극기를 만들고 ‘대한독립선언서(이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다. 


3월 18일이 되자 박치화 등은 하동읍내 장터로 나아가 소금 가마니를 쌓아 그 위에 올라서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1,500여 명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다.


박치화 등 12명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에는 “반만년의 신성한 역사와 3천리 금수강산을 가진 우리 동포여”라고 하면서 높은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고, “파리강화회의가 열리고, 민족자결 여론이 높아지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동포들이 힘을 합쳐 광복을 맞이하자”고 주장했다. 


“주저하거나 관망하지 말 것”이며, “폭동과 난동을 하지 말고 인도와 정의로 독립을 이루자. 대한광복과 동양친목, 세계평화는 오늘부터 시작된다”고 하여 높은 용기와 문화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이 돌연한 사태에 하동경찰서에서 20여 명이 출동해 박치화 등을 검거하고 진정시켰다.


이렇게 불붙기 시작한 하동 만세시위는 3월 19일에는 정낙영 등이 하동 동남쪽 금남면 대치리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한독립운동 군중대회’를 열고 진교면까지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들은 만세꾼이 되어 계속하여 3월 20일 남해읍 장날에 남해까지 독립만세 시위를 확산시켰다. 


박치화의 활약은 임시정부에서도 인정하여 1927년 10월 ‘법무원 법률판리사(法律辦理事) 겸 경상남도찰리사(慶尙南道察理使)와 임정 재무모집기주원(財務募集記主員) 등에 임명한다’는 신임장을 내려주었다. 


3월 24, 29일 가종면 문암시장 만세시위


3월 24일 하동 읍내에서 동북으로 약 20km나 떨어진 가종면의 안계리(安溪里) 문암시장(文岩市場)에서는 약 6,000명의 군중이 장날을 기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경남도장관 사사키(佐佐木藤太郞)가 3월 26일 조선총독에게 보고한 문서에 보면, “3월 24일 하동군 가종면 문암시장에서 약 3천명의 군중이 소요를 일으켰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3월 24일에 이어 3월 29일에도 문암시장에서는 100여 명의 군중이 장날을 기해 시위를 벌였다. 청암면 궁항리 정남시(鄭南時)와 권대섭(權大燮) 등이 계획하여 3월 29일 궁항리를 출발한 시위대는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가종면 월횡리를 거쳐 문암시장까지 행진했다. 


4월 6일 쌍계사 승려와 신도들의 화개장터 시위


 화개장터는 하동읍내에서 약 15km 북쪽, 쌍계사 들어가는 입구에 있다. 4월 6일 쌍계사 승려 김주석(金周錫)은 쌍계사 승가대학 학생 정상근(鄭相根)·양봉원(梁鳳源) 등과 신도들을 모아 화개장터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그날은 화개장날이었다. 오후 6시 장이 파할 무렵 김주석은 미리 만든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이날 시위에는 전남 구례·광양 주민 400여 명도 합세했다. 출동한 경찰에 의해 주도자들은 체포되고, 군중은 해산당했다. 


4월 6일 고전면 주교리 일신단의 만세시위


고전면 성천리 사는 박영묵(朴永黙)은 배움은 없었으나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독립을 위해 한 몸을 희생할 결심을 했다. 그는 같은 마을의 이종의(李宗義)·정상정(鄭相正)·정의용(鄭宜鎔) 등 33인을 모아 일신단(一身團)을 조직했다. 일신단은 오직 한마음, 한뜻으로 한몸처럼 단결하여 투쟁한다는 의미였다. 


4월 6일 이들은 장꾼으로 가장하고 배다리장터 곳곳에 숨어들었다. 오후 1시 40분경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박영묵은 단상에 올라가 태극기를 들고 의거의 취지를 외친 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장터에 모여든 장꾼들이 이에 호응하여 만세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다. 일본 경찰과 조선인 경찰 박도준(朴道俊) 등이 달려와 시위를 막으려 하였다. 일신단원 33명은 그들을 붙잡아 총과 칼을 빼앗고 모자와 제복을 벗기고 그들을 세웠다.


“독립만세를 불러라!”


일신단원들의 요구에 일본인 경찰은 시장 중앙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는 재빨리 도주하였다. 일신단원들은 몸을 피했다.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주도자를 수색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도록 주도자를 찾지 못하자 헌병 20여 명과 경찰 10명이 지소(紙所) 마을 근처 산기슭에 진지를 차리고 동네로 압박해 왔다. 일신단 대표 박영묵은 여자들과 어린아이들을 피신시킨 후 일본군 앞으로 나아갔다.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으니 잡아가시오.”


박영묵, 이종인 등은 모두 재판을 받았고 징역 2년 6월의 옥고를 치렀다.


4월 7일 하동보통학교 학생 시위 


4월 7일에는 하동공립보통학교 4학년 박문화(朴玟和)·염삼섭(廉三燮)·정점금(鄭點金) 등 160여 명의 학생들이 소풍을 가는 길에 화개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5월 1일에는 하동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대한 독립 만세’라고 쓴 삐라 수십 장과 태극기에 ‘독립 만세’라 기입하여 적량면 동산리로부터 하동읍에 이르는 가로변 가로수에 붙여 대중들의 봉기를 촉구했고, 5월 3일에는 학교 교정에서 축구 경기 시간을 이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기도 했다.


4월 11일 화개장터 시위


4월 6일 화개장터 거사에서 검거를 피한 화개면 정금리 이정수(李汀秀, 30세), 이정철(李正哲, 22세)과 탑리 이강률(李康律, 19세), 임만규(林萬圭, 27세) 등은 다음 화개장날인 4월 11일 제2차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이들은 ‘광고’라는 제목으로 “오늘 장날 만세를 고창할 때에 누구나 모두 따라서 화창하라. 만일 따라서 부르지 않으면 그 집에 방화하여 잿더미로 만들고 가족을 체포하여 살육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하여 그날 밤 왕래가 빈번한 화개면사무소 앞 돌에 첨부했다. 또한 화개면 직원들에 대해서는 사직을 요구했다. 


“너희는 독립만세의 함성이 들리지 않는 것인가? 만세의 함성을 듣고도 듣지 못하는 체하는 너네는 괴물과 마찬가지다. 당장 왜놈의 사무를 폐지하고 독립을 위해 힘써 후회하지 말라!”


화개면장 이하 직원들은 이들의 경고에 전전긍긍하였다. 4월 11일 정오가 되자 만세운동 주동자들이 나와 군중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펼쳤다. 하지만, 하동 경찰에 의해 화개장터에서 이강률을 비롯한 4명이 검거되고 말았다.


 하동 지역 독립만세운동은 총 17회로 참가 인원은 1만 2천 명, 사망자 17명, 부상자 95명, 옥고를 치른 사람은 50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그 횟수나 규모로 볼 때 만세운동 열기가 치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동에서는 독자적인 독립선언서가 등장했으며, 남해까지 시위를 전파하였다.   


필자  전혜빈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사 석사 및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서강대 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다양한 역사 관련 강의와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서울역사박물관, 공평도시유적관 특별전 전시를 기획했다. 현재는 국가보훈처 공훈관리과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역사에 관한 글쓰기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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