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2/06] 항일전선에서 활약한 서화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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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슬 퍼런 창칼에 날카로운 붓으로 저항하다
그림 팔아 군자금 내고 무장투쟁 나서
꺾이지 않는 강인한 기상 화폭에 담아
글 | 편집부

나라를 빼앗긴 조국에서 화백들은 붓 대신 총칼을 들었다. 의병으로 광복군으로 목숨 걸고 전장을 누볐다. 차디찬 감옥에서 수년간 옥고를 치르면서 돗자리 지푸라기를 뜯어내 만든 붓으로 대나무 치기를 수련했다. 대나무 마디는 결이 모질고, 댓잎은 살기를 띤 칼날 같아 어떠한 폭력에도 꺾이지 않는 기상을 드러냈다. 기교를 찾아볼 수 없는 강직한 필법으로 오직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강인한 의지와 곧은 절개를 표현했다. 그리고 자식 같은 그림을 팔아 군자금을 지원하면서 화가의 본분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일제 간담 서늘케 한 사군자 대가
김진우(1883~1950)
일주(一州) 김진우는 당대 최고의 서화가요,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좌우 이데올로기에 휘말려 40년간 독립운동사와 미술사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다.

강원 영월군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김진우는 12세에 유인석 의병장 문하에 들어갔다. 유인석은 대한제국기 정미7조약 체결 후 연해주에서 13도창의군의 도총재로 활약한 인물이다. 어린 소년은 유인석을 스승으로 모시고 서간도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의병 전쟁을 치렀고, 만주 벌판의 추위를 이겨낼 정도로 강인했다. 독립운동을 하며 수차례 압록강을 건너 국경을 넘기도 했다. 1915년 스승이 서간도에서 생을 다하자, 일제 치하의 조국으로 돌아와 서울 종로에 작은 서화상을 차렸다. 그리고 그림을 판 돈으로 독립운동 단체의 군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꾸려진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곧바로 서화상을 정리해 떠날 채비를 했다. 그리고 한 쌍의 화폭 중 난초 그림에 ‘사천이백오십이년 기미년 초여름에(時 四千二百五十二年 己未肇夏)’라는 단기(단군기원 연호)를 남겨 놓고 중국으로 떠났다. 일제가 단군을 부정하던 시기였으니,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919년 7월,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한 김진우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차 회기에 강원도 대표의원으로 이름을 올리면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다. 이종률의 회고록에는 “임시정부에서 대(竹)를 그려 중국 사람들에게 비싼 값으로 팔아 독립운동자금을 댔다”는 문구가 나온다.
1921년 상해임시정부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귀국길에 일제 경찰에 체포돼 황해도 서흥 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옥살이 중 돗자리 지푸라기를 뜯어내 만든 붓을 맹물에 적셔 대나무 치기를 수련했다. 이때부터 온건했던 묵죽법은 매섭고 강인하게 변했다. 대나무 마디는 결이 모질고, 댓잎은 살기를 띤 칼날 같아 어떠한 폭력에도 꺾이지 않는 기상을 드러냈다. 총칼보다 날카로운 붓을 연상시킨다.
‘대구 권총사건’ 주역으로 8년간 옥고
김진만(1876~1934)

1926년 조선총독부 주관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내면서, 임진왜란 당시 승병장 서산대사의 시를 써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만국의 도성은 개밋둑 같고, 수많은 집의 호걸은 초파리 같다(萬國都城如蟻垤, 千家豪傑若醯鷄)’며 일제와 부역자들을 개미와 초파리에 빗댄 것이다. 총독부는 이 작품에 상을 줄 수 없어, 함께 출품한 ‘가을난초(秋竹)’라는 묵죽화를 특선으로 뽑았다. 이후 제7회, 8회에도 특선과 입선을 거듭하고 신문에 작품이 게재되며 당대 최고의 사군자 대가로 인정받았다.
좌우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그는 여운형, 송진우 등 당대 애국지사들과 긴밀히 교류했던 인물이었지만, 전쟁 중 좌익으로 몰려 수감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사와 근현대 미술사에서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1991년 간송미술관의 작품 전시를 계기로 2005년 뒤늦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긍석(肯石) 김진만은 국내외에 시서화로 이름을 떨치던 석재(石齋) 서병오의 수제자로, 서화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김진만은 1915년 7월 대구에서 결성된 대한광복회에 가입, 본격적으로 무장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총사령관은 박상진이었다. 대한광복회는 독립군 양성을 목적으로 군자금 모집과 무기 구입, 친일부호 처단 등을 당면과제로 삼았다.
1916년 8월 김진만은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권총을 휴대하고 동생 김진우와 정운일, 최병규 등과 함께 대구지역 부호 서우순(김진만의 장인)의 집에 숨어들었다. 그러나 서우순이 비명을 지르고 집사가 달려와 격투가 벌어지면서 김진우는 권총을 발사한 뒤 도망쳤다. 일행은 탈출했으나 곧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유명한 ‘대구 권총사건’이다. 김진만은 이 사건의 주모자로 10년 징역을 선고받아 8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1924년 6월 출옥했다.
항일전투에 참전한 ‘광복군 화가’
최덕휴(1922~1998)

이후 서병오의 사랑채를 드나들며 교남시서화연구회를 꾸려갔다. 1931년에는 팔공산 동화사 사적비 글씨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둘째 아들 김영우가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돼 31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정신적 충격과 옥고로 인한 건강 악화로 생을 마감했다. 손자 김일식 역시 대구고보 동맹휴학을 이끌다 퇴학당한 뒤 대구 항일학생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는 등 3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항일가문이다. 1977년 독립운동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다.
김진만은 오랜 기간 독립운동과 옥중생활을 했기 때문에 서화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고, 남아 있는 작품 또한 많지 않다. 기명절지화와 묵죽화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기명절지화는 학식 있는 문인의 품격을 나타내는 고동기나 도자기에 꽃가지·과일·채소 등을 곁들인 일종의 정물 그림이다. 김진만의 묵죽화는 기교를 찾아볼 수 없는 강직한 필법을 보여준다. 오직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강인한 의지와 곧은 절개를 드러내는 것이 서화의 중심이었다.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 활약해 ‘광복군 화가’로 알려진 최덕휴(崔德休)는 1922년 7월 4일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 신곡리에서 태어났다. 홍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휘문중학교에서 수학했으며, 휘문중 2학년 때 장발(張勃, 전 서울대학교 미술대 학장)의 영향으로 화가에 뜻을 품게 되었다. 1941년 3월 일본 동경제국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이듬해 일본군 학병으로 강제 배속돼 만주 등지에서 복무하다 임시정부와 광복군 소식을 접하고 필사적으로 탈출해 중국군을 거쳐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명으로 제9전구 내에 중국군사위원회 지원으로 창설된 제1지대 제3구대에 참가했다. 또 중국 후난성(湖南省) 구이동(桂東)에서 한국임시정부의 광복군 상위(上尉)로 항일전투에 투신했다. 광복 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군에 입대해 1956년 5월까지 육군본부와 국방부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1950년 5월 4일부터 11일까지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을 경기여중의 후원으로 개최한 이래 1991년의 고희전까지 총 28회의 개인전을 열었다. 1950년대의 군 복무 중에도 개인전을 지속해 ‘군인 화백’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1956년, 1958년, 1959년에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최덕휴는 전후(戰後) 미술교육에 뜻을 두고 많은 활동을 펼쳤다. 1954년 미술교육연구회를 조직해 덕수궁 박물관에 ‘교사를 위한 미술교육 정기강좌’를 개설했는데, 국내 최초의 미술교사 교육 강좌 프로그램으로 꼽힌다. 1966년 유네스코 산하 국제미술교육협회 한국위원회(INSEA-Korea)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해 1991년까지 이끌면서 해외 미술교육 참관과 학생 미술작품의 해외 교류를 주관하기도 했다.
1951년 무공훈장 화랑장, 1984년 서울시 문화상, 1987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1991년 삼일문화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