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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2022/07] 대한매일신보 항일의 선봉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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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신문과 짝 이루어 일제 침략주의 가차없이 공격


응어리진 국민 가슴 시원하게 열어주다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1907년 5월 23일부터 대한매일신보는 한글판을 별도로 발행하여 한문판·한글판과 영문판 등 세 종류로 확대하였다. 이 무렵 논설진으로는 양기탁을 비롯하여 박은식·신채호 등 당대의 쟁쟁한 논객들이었다. 논객들의 논설은 거칠 것이 없었다. 일제의 침략과 우리 내각의 친일국정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신속한 보도로 응어리진 국민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주었다. 더욱이 대한매일신보는 황성신문과 짝을 이루어 일본의 침략주의를 가차없이 공격하였다.   


1904년(고종 41년) 7월 18일, 이날 영국인 베델(Bethell, E. T)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하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가 창간되었다. 

이는 고종황제의 영어통변인(英語通辯人) 양기탁(梁起鐸)과 베델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베델이 「데일리 크로니클」(The Daily Chronicle)의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파견되어 왔을 때였다. 

이 무렵은 일본이 군대를 서울에 주둔시켜 놓고 한국 언론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고 있을 때였는데,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내세움으로써 일본의 사전검열을 피할 수 있었다. 또 베델은 우리나라에 오기 전 일본 고베(新戶)에서 무역상 베델 브라더스(Bethell Brothers)를 경영하면서 15년간 체류한 바 있어서 일본을 잘 알고 있었던 것도 신문제작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로써 대한매일신보는 우리 국민들의 가슴에 항일애국사상(抗日愛國思想)을 심어주는 대표적인 항일언론(抗日言論)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한문판·한글판·영문판 세 종류로 확대
우리 내각의 친일국정 날카롭게 비판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될 당시에는 타불로이드판 6면으로 발행하였는데, 그중 2면이 국한문판이고 4면이 영문판이었다. 이듬해 8월 11일부터는 국한문판과 영문판으로 분리하여 두 개의 신문으로 발행하였는데, 이때 영문판 제호는 「The Korea Daily News」였다. 그러다가 한글과 한문을 혼용한 국한문판을 읽지 못하는 독자를 위하여, 1907년 5월 23일부터는 한글판을 별도로 발행하여 한문판·한글판과 영문판 등 세 종류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논설진으로는 양기탁을 비롯하여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 당대의 쟁쟁한 논객들이었는데, 이들의 날카로운 논설이 우리 국민들의 가슴에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을 심어주었다. 이들 논객들의 논설은 거칠 것이 없었다. 일제의 침략과 우리 내각의 친일국정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신속한 보도로 응어리진 국민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주었다. 더욱이 대한매일신보는 황성신문과 짝을 이루어 일본의 침략주의를 가차없이 공격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체결되자 대한매일신보는 “칙어엄정(勅語嚴正) 칙약무효(勅約無效)”라는 제목의 사설을 발표하여,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일본의 침략을 준엄하게 꾸짖었다. 이때 황성신문 사장 장지연(張志淵)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날에 목을 놓아 통곡하노라)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발표하였는데, 이로써 경향 각지에서 조약의 반대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리고 1907년 4월 민족운동의 요람인 신민회(新民會)가 결성된 후에는 그 기관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민회는 을사늑약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되고 통감에 의한 내정간섭이 노골화됨으로써 종래와 같은 계몽주의적인 온건한 방법에 의한 독립운동 방략이 실효를 거둘 수 없게 되었으므로, 새로운 비밀결사의 필요에 의해서 결성된 단체이다. 따라서 신민회의 역할은 국권회복을 위한 전진기지였는데, 대한매일신보와 짝을 이루어 항일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동참
여성 참여와 해외로 확대 

또 대한매일신보는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여기 ‘국채보상운동’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빌린 국채 1,300만 원을 갚기 위하여 2천만 국민이 담배를 끊고 절약한 돈으로 이를 상환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민중운동·구국운동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이 중심이 되어 시작하였는데, 2월 2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그 취지서를 게재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 같은 날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에 동참을 권유하는 군민대회를 열고, 22일에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가 조직되면서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나갔다.  

이처럼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조정(朝廷)의 관료나 양반뿐만 아니라 노동자·농민·상민·군인·승려·학생·노비·초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이 참여하여 많게는 100원, 1,000원, 적게는 1전, 10전의 지원금을 기탁하였다. 이는 우리 국민들이 일본 차관(借款)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때 국채보상운동은 처음에는 남성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지만, “나라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 어찌 남녀가 다르겠느냐”라며, 여성들도 반찬값을 절약하거나 비녀와 가락지를 내놓기도 하였다. 이에 크게 감동을 받은 여성들이 부인탈환회(婦人奪還會)·부인감찬회(婦人減饌會) 등을 조직하여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 선두에 섰던 단체가 1907년 2월 23일 대구에서 조직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정경주 외 6인)였다. 이 부인회는 “우리가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나라의 빚을 갚는 일에 어찌 남녀가 다르리요”라는 내용을 담은 「敬告, 我 婦人 동포라!」(우리 부인 동포에게 공경스럽게 고한다)라는 격문을 전국에 발송하였다.  

이렇게 대구에서 불을 댕긴 여성들의 ‘나라 빚 갚기운동’은 서울의 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진명부인회·대한부인회로 이어졌으며, 경기도의 김포검단면 국채보상의무소·안성군 국채보상부인회, 경상도의 대구남산국채부인회·부산항좌천리부인회·영도국채보상부인회 등이 크게 활동하였다. 이 밖에도 충청도의 진천군 국채보상부인회, 전라도의 금산봉황부인회·제주삼도리부인회, 평안도의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선천군부인의성회, 함경도의 영흥군 국채보상감반회, 황해도의 안악군 국채보상탈환회 등이 있었다.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은 해외에서도 동참하였는데, 미국 하와이에 거주하는 부인들도 지원금을 보내왔으며, 일본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그런데 국채보상운동이 전 국민의 호응을 얻으면서 전국적으로, 또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나가게 되면서 이 운동을 ‘국권회복을 꾀하는 항일독립’으로 간주한 조선총독부는 그 저지에 나섰다. 친일단체인 일진회로 하여금 모금활동을 방해하고,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회계책임자 양기탁을 ‘국채지원금 횡령’의 누명을 씌워 구속하는 사태로 몰고 갔다.  이로 말미암아 국채보상운동 그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좌절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9년 5월 1일 베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한말 최대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는 그 구심점을 잃고 말았다. 이로써 일본의 한국침략에 가장 큰 장애물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필자  권용우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ㆍ법과대학장ㆍ산업노사대학원장ㆍ행정법무대학원장ㆍ부총장ㆍ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正心法學) 포럼 대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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