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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전설 [2022/07] 경기도 김포의 독립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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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5천여 명 참여…경기도에서 두 번째 큰 만세 시위


학생·지식인층 주도하에 조직적으로 전개


글 | 전혜빈(국가보훈처 연구원)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하구의 김포(金浦) 지역은 1910년대만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낙후된 농업 지역이었다. 수리시설이 부족해 오직 천수(天水)에 의존해 농업용수를 확보했고 매년 우기 때는 한강이 범람하여 농작물 피해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개인의 경작 부담이 컸던 김포 일대는 왕실에서 군량이나 관청의 경비로 쓰이는 둔전(屯田)으로 토지를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김포 지역의 만세운동은 3월 22일부터 29일까지 9개 면 중 7개 면에서 발생하였다. 학생 및 지식인층이 주도하여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는 특징을 보이며, 김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했던 오라니 장터와 군하리 장터 시위와 같이 장날을 이용했다. 집회 횟수는 총 15회, 참여 인원은 약 1만 5,000명으로 규모는 경기도에서 두 번째로 컸다.  


김포(金浦) 지역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하구의 넓은 평야지대로 곡창지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1910년대만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낙후된 농업 지역이었다. 1918년 12월 말 김포지역 거주 일인 가구수는 59호(179명)로 전북 평야지대인 김제 697호(2,292명), 익산 1,100호(3,699명)과 비교하면 현저하게 적었다. 그 이유는 수리시설이 부족해 오직 천수(天水)에 의존해 농업용수를 확보했고 매년 우기 때는 한강이 범람하여 농작물 피해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개인의 경작 부담이 큰 김포 일대는 왕실에서 군량이나 관청의 경비로 쓰이는 둔전(屯田)으로 토지를 관리할 수밖에 없었다. 김포의 통진(通津), 양천(陽川) 지역에는 왕실의 토지와 재산을 관리하는 명례궁(明禮宮, 지금의 덕수궁 안에 있었음)의 궁방전(宮房田)이 있었고, 구김포 고촌면에도 왕실 재정을 담당하는 내수사(內需司)와 가마나 말을 관리하는 사복시(司僕寺)의 토지가 있었다. 이후 김포 지역은 1914년 3월 일제의 전국 행정구역 강제 통폐합 때 양천·구김포·통진군이 통합되어 김포군이 되었다. 

 

3월 22일 

경기 김포군 월곶면 군하리 장날 독립만세운동


김포 지역 독립만세운동의 시작은 1919년 3월 22일 월곶면(月串面)과 검단면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월곶면의 만세운동은 통진교회 전도사로서 경성 성서학교 학생이었던 이살눔(李撒路美, 본명 이경덕, 33세)이 독립선언서를 옷 속에 숨겨 고향으로 가지고 와 비밀리 배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선언서를 받은 성태영(成泰永, 44세), 박용희(朴容羲) 등은 태극기를 만들고 사람들을 모아 의거할 것을 약속했다. 한편, 성태영의 「신문조서」에는 “경성 및 기타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른다는 것을 전해 듣고 있었는데, 통진(군하리) 장날 박용희가 독립운동을 권하여 동참하기로 했다”라고 나타난다. 


「판결문」에는 “1919년 3월 22일 김포군 월곶면 면사무소 구내에서 한국독립만세를 외치는 폭민 약 300명이 집합하였다”라고 하며, 일제의 「전국각지 3월 22일 시위운동 상황」 문서에는 “경기도 김포군 군하리에서 약 400명이 있었으나 주모자를 체포하고 해산시켰다”라고 쓰여 있다. 3월 22일 오후 박용희·성태영·백일환(白日煥, 36세)은 군하리(郡下里) 장날을 기회로 장에 나온 군중 수백 명과 만세시위를 시작했다. 


“조선의 독립을 원하는 자는 공자묘(향교)로 모여라!” 


성태영은 주민들에게 만세운동을 하도록 권하였고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공자묘에 집합하였다. 그리고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이 모이자 다 같이 마을 안을 돌면서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당시 이살눔은 오후 2시경 집에서 군중이 만세를 부르고 있는 것을 듣고 뛰쳐나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살눔의 「신문조서」에는 “3월 22일 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으므로 그 속에 들어가 만세를 부르고 일단 집으로 돌아오니 자택에 종이로 만든 태극기가 있어서 이를 들고 다시 밖으로 나가 만세를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살룸은 이어 주재소 앞에서도 만세를 불렀으며 특히 부인들의 행진을 독려했다. 「판결문」을 보면 그녀가 “미치광이처럼 맨발로 군중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부인들을 독려 선동하며 치열하게 만세를 고창하였다”라고 한다.

이후 박용희가 군중들을 지휘하고 성태영, 백일환이 선두에 서서 군중들과 함께 월곶면 면사무소로 나아갔다. 박용희는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치며 면사무소 앞에 나와 있던 면서기 4명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고 성태영이 높은 단에 올라 독립 관련 연설을 하려고 했다. 이때 군경이 출동하여 이를 막자 백일환이 군중 속에 뛰어나와 일경의 얼굴을 구타하고 호신용 총을 빼앗아 넘어뜨렸고, 군중들도 가세하여 때렸다. 


400명으로 늘어난 군중은 군하리 경찰관주재소로 몰려가 주재소를 포위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고창했다. 백일환은 군하리 경찰관주재소 순사보 이성창(李聖昌)에게 만세를 부르라고 요구했다.


“너는 조선인이므로 독립만세를 크게 외쳐라!”


그러자 순사보는 


“순사는 관리이므로 독립만세를 부를 수 없다!”


그러자 일본 순사는 “순사는 관리이므로 독립만세를 부를 수 없다! 만세를 부르지 말라!”고 엄명하면서 순사보를 지붕 위로 끌어 올리려 했다. 군중은 순사보를 끌어내려 끌고 가서 차고 밟고 구타했다. 

박용희, 성태성 등은 군중과 함께 다시 면사무소로 가서 면서기에게 태극기를 들고 만세 삼창을 하라고 요구하였다.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삼창하라!”


조원석, 박용돈 등 4명의 면서기는 군중이 위협하자 차례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외쳤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김포경찰서장 등이 출동해서 시위대 수십 명을 체포하고 해산시켰다. 그리고 시위를 지휘했던 박용희는 면 뒷산으로 도주하여 만주 길림으로 들어가 형을 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위 주도자들에 대한 체포 및 서울 압송 장면은 신문에서 확인된다.



■ 매일신보(1919. 4. 3)

○강화(江華) 김포(金浦)에 소요(騷擾) 수모자(首謀者), 열한 명이 올라와 (상략) 24일 통진 25일 김포 등 각지에서 소요 수괴자 18명은 4, 5명의 보병과 2, 3명의 순사의 호위로 오후 7시 인천발 열차로 경성에 향하여 압송되었는데 그 수괴 중에는 나이 30세가량의 여자 1명도 있다더라.



이처럼 김포 등의 만세시위 주도자들은 보병과 순사의 호송 하에 4월 3일 오후 7시 인천발 열차로 경성으로 압송되었는데, 성태영은 징역 1년, 백일환은 징역 2년, 이살눔은 징역 6개월 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3월 23일 양촌면 오라니 장터 독립만세운동


1919년 3월 23일 오후 2시 양촌면(陽村面) 오라니 장터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양촌면 출신 박충서(朴忠緖, 22세)가 주도하였다. 박충서는 당시 경성제1고보에 재학 중이었는데 그는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과 3월 5일 남대문역(현재 서울역) 만세 시위에도 참여했다. 박충서의 아들 박찬영 씨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박충서가 만세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할아버지 박승혁(당시 훈장)이 일경에게 협박을 받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박충서는 고향으로 오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박충서는 김포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3월 19일 친척 안성환(安聖煥, 32세)의 집에서 친척 박승각(朴勝珏, 23세)·박승만(朴勝萬, 24세)·전태순(全泰順, 24세)과 모여 만세운동을 협의하였다. 또 그 계획에 찬성한 오인환(吳仁煥), 정억만(鄭億萬)과 함께 7개의 부서를 만들고 만세운동 계획을 알리는 격문과 경고문을 작성해 양촌면 주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당시 김포에서 가장 번창했던 오라니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약속하였다.


거사 당일인 오라니 장날에 이들은 군중과 만세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하지만, 사전에 경찰이 이를 감지하여 실패하게 된다. 「일본 육군성 문서」에는 “오후 1시 30분경 약 2천 명의 폭도가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해 헌병과 경찰이 해산시켰다”라고 기록하고 있을 만큼 규모가 큰 시위였다. 결국, 헌병대가 출동하여 현장에서 이들을 체포하였고 박충서는 징역 2년, 박승각, 박승만, 정억만은 징역 1년, 안성환, 전태순, 오인환은 태형 90도에 처했다.


같은 날 서당교사인 정인섭(丁寅燮, 36세), 분남학교를 졸업하고 참봉직에 있었던 임철모(林哲模, 37세)에 의해서 제2차 오라니 장터 만세운동이 계획되었다. 정인섭은 무명천에 먹으로 쓴 독립만세 태극기를 만들었다가 오후 4시 장에 모인 300여 명의 시위대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임철모는 태극기를 휘둘렀다.


정인섭, 임철모는 군중을 이끌고 주재소, 면사무소로 향하던 중 출동한 용산 헌병대에게 태극기를 압수당하고 체포되었다. 이에 따라 정인섭은 징역 1년 임철모는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임철모는 옥고를 치르면서도 다른 수감인들을 규합해 독립만세를 외치다 고문 끝에 5월 10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이러한 오라니 장터 시위 이후 양촌면에서는 3월 27일 7천여 명이 대규모 횃불 시위를 전개하기도 했다.


김포지역의 만세운동은 3월 22일부터 29일까지 9개 면 중 7개 면에서 전개되었다. 김포지역 만세운동은 학생 및 지식인층이 주도하여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는 특징을 보였다. 그리고 김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했던 오라니 장터와 군하리 장터 시위는 장날을 이용했다. 아울러 주변이 평탄한 지형으로 높은 곳의 봉화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알리고 횃불 시위를 전개했다. 이러한 김포 지역의 독립만세운동 집회 횟수는 총 15회, 참여 인원은 약 1만 5,000명으로 규모는 경기도에서 두 번째로 컸다.   


필자  전혜빈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를 졸업하고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사 석사 및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서강대 박물관,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다양한 역사 관련 강의와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서울역사박물관, 공평도시유적관 특별전 전시를 기획했다. 현재는 국가보훈처 공훈관리과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역사에 관한 글쓰기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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