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Focus

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2/07] 조국 독립을 꿈꾼 과학자들

페이지 정보

본문

고난의 시대 과학 선진국의 씨앗 뿌린 선각자  


“인습적 생각 버리고 산업진흥에 힘써라” 

과학기술에서 국력 신장의 열쇠 찾아


글 | 편집부 


19세기 말 근대화에 성공한 제국주의 국가들이 전 세계를 전쟁과 침략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고, 우리나라 역시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이 시기 구학문으로는 외세의 침투를 이겨낼 수 없으며, 공업이 발달해야 국가가 부강해지고, 국가가 부강해져야만 외세에 멸시를 당하지 않으리라 판단한 선각자들이 있었다. 이상설은 서양 수학과 과학을 스스로 공부해 책을 펴내고, 박찬익은 1909년 김규식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공업·기술잡지인 『공업계』를 발간했다. 김용관은 식민지 조국에서 발명을 통해 과학기술인을 양성해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1924년 ‘발명학회’를 만들고, ‘과학의 날’을 처음 제정하는 등 과학대중화운동을 주도했다. 일제강점기에도 포기하지 않고 과학기술 발전에 고군분투한 그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었으리라. 

일제강점기 과학대중화운동의 기수
김용관(1897~1967)

김용관(金容瓘)은 1933년 찰스 다윈의 사망 50주기를 기념해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정했다. 한국에서 ‘과학의 날’이 처음 제정된 것이다. 그는 1930년대 과학대중화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과학의 생활화와 공업 지식의 보급을 통해 조국 독립을 이루고자 했다. 

김용관은 1913년 공업전습소를 졸업한 후, 1916년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해 1918년 1회로 졸업했다. 조선총독부 장학생에 선발되어 일본 유학길에 올라 동경고등공업학교에서 1년간 공부했다. 유학 시절, 일본 근대화의 뿌리가 과학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식민지 조국에서 발명을 통해 과학기술인을 양성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동기생들을 비롯한 과학기술인들을 찾아다니며 설득한 끝에 1924년 과학대중화운동의 뿌리가 되는 ‘발명학회’를 창립했다. 이후 학회의 모든 경비를 부담하면서 고군분투했지만, 6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유명무실하게 사라진 발명학회를 재건하기 시작한 것은 1931년이다. 김용관은 동아일보에 민족공업화 진흥 방안과 관련한 글을 틈나는 대로 연재하면서 일상생활의 필수품을 자체 제작해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도 1927년 벽돌공장을 경영하며 과학운동의 자금을 마련했다.

1932년 김용관과 박길룡, 현득영 등은 발명학회를 재건하기로 결의했다. 김용관 등 주도자들은 물산장려회의 틀을 벗어난 독자적인 발명진흥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고, 이듬해 학회 기관지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잡지인 『과학조선(科學朝鮮)』을 창간하며 새로운 과학문화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6월 창간호를 시작으로 1년간 발간된 『과학조선』은 1934년 과학지식보급회에 인계되어 1944년까지 발행됐다.

이후 김용관은 과학지식과 사상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4월 19일을 ‘과학데이’로 지정하고, 대중들이 참여하는 과학행사를 대대적으로 펼쳤다. 1934년 열린 제1회 과학데이 행사에는 800여 명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뤘다. 민중들의 모임을 극구 반대했던 일제의 간섭과 탄압으로 1937년 과학데이는 막을 내리고 말았지만, 김용관은 해방 이후에도 발명단체 등에 참여하고 과학 강연에 나서며 과학의 날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분투했다. 오랫동안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다가 2020년 ‘과학기술유공자’로 선정됐다.

한국 근대 수학교육의 선구자
이상설(1870~1917)

헤이그 특사로 널리 알려진 이상설은, 독립운동가 이전에 한국 근대수학 및 과학교육을 시작한 ‘선구자’였다.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은 19세기 말 제국주의의 침략을 피할 수 있는 조선 국력 신장의 열쇠는 서양의 선진학문 특히 자연과학 분야의 학습과 교육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30여 년 전 중국, 일본, 미국의 책으로 독학하면서 서양 근대수학과 과학을 스스로 이해하고 『수리』와 『식물학』, 『백승호초』, 『화학계몽초』를 집필해 강의했다. 1900년 수학 교과서 『산술신서』를 발간한 후 1907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기까지 이상설은 특히 수학교육에 몰두했다. 서양의 선진 과학기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학교육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측량이나 천문관측, (고차)방정식의 해법 등 전통 산학의 역사가 존재했지만, 현재 우리가 공부하는 서양 수학의 방법론은 조선의 산학자들이 1730년 중국에서 전해진 『수리정온(數理精蘊)』(1722)을 공부한 데서 시작했다. 이상설은 수리정온을 공부한 후 그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의 전통 산학과 서양 수학을 연결하는 첫 번째 수학책인 『수리(數理)』를 저술했다. 

고종은 1895년 ‘교육조서’를 발표하면서 과거 대과에 합격하고 외국어와 서양 수학 및 과학에 능한 이상설을 성균관장으로 임명해 공교육의 근대화를 시도했다. 성균관장이 된 그는 성균관 경학과 교과과정에 수학과 과학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과학, 특히 근대 서양 수학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수학 교과서를 저술하고 관립 교육기관의 교과과정에 수학을 필수과목으로 도입하는 등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우리나라 최초 공업·기술잡지 발행
박찬익(1884~1949)

남파(南坡) 박찬익(朴贊翊)은 민영환이 “조선 청년들아! 모든 인습적인 생각을 버리고 산업진흥과 공업 습득에 힘을 써라”는 신문 기사를 보고 그가 세운 상공(商工)학교에 진학할 것을 결심했다. 구학문으로는 외세의 침투를 이겨낼 수 없으며, 공업이 발달해야 국가가 부강해지고, 국가가 부강해져야만 외세에 멸시를 당하지 않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상공학교에서 박찬익은 신학문을 익히는 데 최선을 다했다. 특히 일본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어학의 천재’라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 2학년이 되던 해 ‘수학여행’을 떠났는데, 경부선 철도 공사장에서 학생들을 혹사하는 모습에 항의해 일본인 교사를 때리고 서울로 도망쳐 퇴학을 당했다. 복학한 후에도 일본인 교사들과 충돌이 잦아 결국 다시 퇴학당했다.

1907년 안창호의 주도로 신민회를 결성하자 이에 가입했으며, 황해도 등 서북 지방을 돌며 계몽운동을 펼쳤다. 신민회의 활발한 교육 사업과 산업 활동을 접한 그는 1908년 공업전습소에 입학해 학생 127명을 회원으로 하고 신규식·양기탁·신채호·안창호 등을 후원자로 하여 ‘공업연구회’를 조직했다. 또한 김규식과 함께 『공업계(工業界)』라는 학회지를 발행하고, ‘색채의 리(理)와 염료의 혼합법’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공업계』는 1909년 1월 28일 자로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공업·기술잡지로, 통권 4호까지 나왔다. 대한제국 말기에 선각(先覺)한 두 젊은이가 힘을 모아 발행한 잡지로 그 의미가 크다. 

1910년 최우등으로 공업전습소를 졸업한 박찬익은 방직공장을 세울 결심을 했다. 일본 상품이 판을 치는 상황이 계속되면 일제의 경제적 침식과 착취를 면할 수 없으므로 우리의 산업을 직접 일으켜 보겠다는 의지였다. 일본인 교장이 그에게 일본 유학을 권유했으나 이를 거절하고 방직공장 설립에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일제의 경제침략 정책에 따라 방직공장 설립의 허가는 보류되었다. 신민회 역시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 상태에 이르자 1910년 12월 만주로 망명, 일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