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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스크랩 [2022/08] 8월과 관련된 순국선열의 작은 역사, 소중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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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가 해산되는 때는 곧 나라가 망하는 것


국가·민족의 위기, 살신성인의 각오로 나서야 


글 |  장세윤(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 


1907년 8월 1일 일제의 대한제국군 시위대 해산에 항거하여 일본군과 싸우다가 부상을 입은 이충순(李忠純) 참위는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결심하고 차고 있던 칼로 몸을 찔러 자결하고 말았다. 그는 하루 전날 고향의 부친에게 부친 편지에서 군인의 각오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군대를 기르는 날은 나라를 보존하는 것이요, 군대가 해산되는 때는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저의 직분은 비록 낮으나 몸을 이미 허락하였습니다. 이러한 국가 망극의 변고를 당하였으니 부모가 계시다는 이유로 살기를 도모할 수 없는 것입니다.”(박민영,「대한제국 군인 李忠純의 생애와 순국」,『한국독립운동사연구』59, 2017, 66쪽) 국가와 민족이 누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충순처럼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여 목숨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직분을 다했더라면 1910년 8월의 망국은 없었을 것이다.   


대한제국군  

일본의 강제해산에 항거 봉기


일본은 1907년 7월 24일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정미7조약)을 강요하여 일본인 차관(次官)을 임명하여 내정에 간섭하는 등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았다. 나아가 일본은 이 협약 체결 직후 얼마 남지 않은 한국군대를 해산하는 조치를 강행했다. 이에 따라 7월 31일 순종황제로 하여금 해산 조서(詔書)를 내리게 하여 8월 1일 군대해산이 강행되었다. 


그러나 이에 항거하여 시위(侍衛)보병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參領)이 자결하자 대한제국 군대는 봉기하여 서울 시내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특히 남상덕(南相悳) 참위는 시위보병 1연대 1대대 소속 장교로서 상관 박승환이 자결하자 휘하 부하들을 이끌고 일본군을 공격하여 남대문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이날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남상덕 등 한국군은 이 전투에서 일본군 장교 가지하라(梶原義久) 대위 등 4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38명에 부상을 입혔다. 가지하라는 1904~5년 러일전쟁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도깨비대장’으로 불리던 자였다. 이준영(李峻永) 참위도 시위보병 제2연대 1대대로 전속되어 복무 중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가 이날 전사했다. 이충순 참위 역시 같은 2연대 1대대 장교로서 시위대가 해산되자 이를 거부하고 미리 와있던 일본군과 서소문 일대에서 접전하던 중 크게 부상을 당했다. 이 때문에 사로잡힐 위기에 처하자, 자결하는 기개를 보였다. 이날 일본군과의 전투로 한국군의 준사관 이상 장교 13명과 하사 이하 병졸 56명 등 모두 69명이 장렬히 전사하였다(박민영, 위 논문, 62쪽과 국가보훈처,『독립유공자 공훈록』1, 1986). 군대 해산 이후 전국으로 흩어진 구 한국군 장병들은 전국 각지에서 의병 진영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을 지속하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폐간 


1940년 8월 10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되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무단정치’를 지양하고 ‘문화정치’를 실시한다는 구실로 처음으로 민간 신문의 발행을 허가하게 되었다. 『조선일보』가 1920년 3월 6일자로 창간하고, 『동아일보』가 4월 1일 창간되었다. 그 뒤 두 신문은 일제의 억압 아래에서도 나름대로 민족의 대변지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정신을 함양하며 일제의 통치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두 신문은 여러 차례 무기정간과 발행정지 처분을 받는 등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친일적 성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결국 1940년 8월 10일 두 신문은 조선총독부의 강압에 자진 폐간 형식으로 폐간되고 말았다(정진석, 『한국 언론사 연구』, 일조각, 1983). 

  

박상진·김한종 의사 

대구감옥에서 순국


1921년 8월 11일 1910년대 후반 의열투쟁 단체인 광복회의 주역 박상진(朴尙鎭)·김한종(金漢鍾) 의사가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광복회는 흔히 ‘대한광복회’로 알려졌는데, 1915년 8월 25일(음력 7월 15일) 강순필·박상진·우재룡 등이 대구에서 조직했다. 


박상진은 1884년 경남 울산에서 태어났다.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으로 발령났지만, 사퇴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광복회 총사령을 맡아 전국 각지에 곡물상점을 세우고 이를 연락 거점으로 삼아, 무장투쟁을 통해 일제 지배체제 타도를 추진했다. 공화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근대적 국민국가를 세우려 했다. 1916년 중국동북(만주)에서 무기를 들여오다가 잡혀 이듬해에 6개월 징역을 선고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8년 2월 경찰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21년 8월 11일 대구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이날 동지 김한종(예산, 1883~1921)도 같은 곳에서 순국했다(『동아일보』1921.8.13).


일본,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 

제2차세계대전 종전(광복절)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은 소위 ‘전쟁 종결의 조서(詔書)’를 방송하여 연합국에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제2차세계대전은 끝나게 되었다.


김구는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소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중략)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였다(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1997, 399쪽).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등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투쟁이 구체적 결실로 나타나기 직전에 일본이 항복한 것이다. 


우리민족은 35년 동안의 일제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났지만,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분할점령함으로써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남한은 3년 동안 미군정의 통치를 받아야 했다. 이날 여운형 등은 서울에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해방정국에 대응하는 발빠른 행보를 보였다. 


한국광복군 국내정진대 

서울 여의도비행장 진입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 수뇌부는 1945년 8월 9일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광복군을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으로 편성하여 고국으로 진입시키고자 하였다. 8월 11일 광복군 제2지대 본부가 있는 중국 서안(西安)에서 김구 주석의 주재로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장래, 향후 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긴급회의가 열렸다. 회의 결과 지체없이 국내정진군을 조직해서 한반도로 진입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에 임시정부와 광복군 총사령부는 미군의 OSS훈련을 받은 대원들과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을 중심으로 국내정진군을 편성했다. 


국내정진군 총지휘에는 이범석이 임명되었다. 총지휘 이하 각 도별로 반장 이하, 각 조별 인원 모두 94명으로 편성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국내질서 유지, 일본군 무기 접수, 임시정부 귀국을 위한 기반 조성 등이었다. 그러나 국내정진군의 파견은 여러 사정으로 실현되지 못하고, 대신에 ‘선발대’라고 할 수 있는 ‘정진대(挺進隊)’의 국내 파견을 추진했다.


이범석·김준엽·노능서·장준하 등 한국광복군 국내정진대와 미군 OSS 측 책임자 버드 대령 등 18명, 모두 22명이 미군 수송기로 국내 진입을 시도한 것은 8월 18일이었다. 이들은 정오(12시) 무렵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으나, 일본군의 진입 거부로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 가야 했다(김광재,『한국광복군』, 독립기념관, 2007, 279~282쪽).   


러시아 연해주에서 성명회 결성  


1910년 8월 23일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직전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 聲鳴會)가 조직되었다. 

이 해 8월 23일 오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들은 『다리요카야 우크라이나』신문을 통해 일본의 대한제국 합병 확정 소식을 전해들었다. 이에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이상설(李相卨) 등 주요 한인 지도자들과 동포 200여명은 바로 한인학교에 모여 대책을 협의하였다. 비통한 분위기 속에 이튿날 새벽까지 진행된 회의의 결의에 따라 ‘성명회(聲明會)’ 명의로 “유혈적인 방법으로 일본의 합병을 저지한다”는 내용의 격문 1,000매를 인쇄하여 러시아와 중국 동북(만주) 각지의 애국 동포들에게 배포하기로 하고 결사 항쟁을 호소하였다. 분격한 동포들이 계속 회의장에 들어와 참가자는 700여 명에 이르렀다.


유인석·이범윤·김학만(金學萬)·김치보(金致寶) 등 6인 이름으로 된 취지서는 소위 일본의 ‘한일합방’의 부당성을 각국 정부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후 성명회는 일본 정부에 ‘국제공약 배신’을 질타하는 공한을 보내고 각국 정부에는 합병 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 선언서를 발송하기로 했다. 선언서는 이상설이 기초하였고, 성명회 대표로 추대된 유인석이 보완하여 완성하였는데, 유인석·이상설 등 총 8,624명 독립운동가들의 서명이 첨부되었다.


각국 정부에 보낸 전문 내용은 ‘대한일반인민총대 유인석(大韓一般人民總代 柳麟錫)’ 명의의 한문으로 작성되었다. 이  때문에 중국(淸) 정부에는 그대로 보냈지만, 다른 열강에는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보냈다.


그러나 9월 11일 일본이 러시아에 항의하여 주동 인사들의 체포와 인도를 요구했다. 러시아 당국은 이상설·이범윤 등 성명회와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 간부 20여 명을 체포, 수감하고 한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하였다. 그 결과 더 이상의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해체되고 말았다. 성명회는 러시아 당국의 압력으로 해산되고 말았지만, 1911년 권업회가 조직됨으로써 이념을 계승하여 연해주지역 한인사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성명회의 이념과 주요 인맥은 1917년 ‘대동단결선언’,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등으로 계승, 발전되었다(윤병석,『이상설전』, 일조각, 1984 및 김소진, 「성명회선언서를 통해 본 독립운동의 이념」,『한국민족운동사연구』10, 1994).


소련 당국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결정


19세기 후반부터 러시아 극동의 연해주(沿海州) 지역에 이주하여 평화롭게 살던 한인(고려인)들은 1937년 8월 21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 인민위원회 의장인 몰로토프와 전연방 볼셰비키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스탈린이 서명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인민위원회의와 전연방(全聯邦) 볼셰비키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의안 No.1428-326cc’에 의해 하루아침에 갑자기 중앙아시아지역으로 강제 이주되기 시작했다. “극동지역에서 일본 간첩활동 방지, 혹은 일본 간첩 침투를 저지하기 위해” 한인들을 이주시킨다는 이 결정에 따라 고려인들은 1937년 말까지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다(장세윤,「‘독립전쟁의 영웅’ 홍범도의 귀환, 그 시사점과 과제」, 『역사와 현실』 121,  2021).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된 고려인 숫자는 1938년 2월까지 모두 37,061가구에 174,979명이나 되었다(홍웅호, 「홍범도의 중앙아시아에서의 생활」, 『사림』 61, 2017). 강제이주 직전인 1936~37년에 이미 연해주지역 한인 지도자 2,000여 명이 체포되고 처형당하는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한인들의 반발을 최소화하고, 짧은 기간 동안에 급속히 강제이주가 가능했다. 강제이주에 저항하는 한인들에 대한 탄압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1937년 8월 21일 이후부터 이 해 말까지 모두 1,100여 명이 체포되어 800명 이상이 총살당했다(윤상원, 「1937년 강제이주 시기 한인 탄압의 규모와 내용」, 『한국사학보』78, 2020). 


남자현 순국


1933년 8월 22일 만주 북부의 중심도시 하얼빈에서 ‘혁명의 어머니’·‘전율할 노파’·‘근대 한국의 여걸’로 불렸던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南慈賢)이 순국했다. 


남자현은 여성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라 할 수 있다. 그는 경북 안동의 유가(儒家)에서 태어나 1919년 중국 동북지방(만주)으로 망명하여 끝까지 항일투쟁 현장에서 활약한 보기 드문 여걸이다. 투쟁방법도 무장투쟁과 의열투쟁, 교육을 통한 여성계몽운동, 거침없는 단지(斷指)혈서 쓰기와 단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이 때문에 국내여성으로는 가장 높은 훈격인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의병전투 도중 전사한 남편의 복수를 위해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을 처단하려 했고, 만주 독립운동계의 대부 김동삼(金東三) 구출작전까지 구상한 사실은 놀라운 일이었다. 또 국제연맹조사단에 혈서로 한국 독립을 호소한 것은 조국 독립의 열망을 절감케 한다. 그는 일본인 고관 처단을 도모하다가 1933년 2월 말 하얼빈에서 체포되었다. 6개월여 옥고를 치르던 8월 초에 죽기로 결심하고 옥중에서 15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였다. 결국 위독하여 가석방된 직후 “독립은 정신에 있다”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그는 남편과 아버지의 경북지방에서의 의병항쟁을 통해 의병들의 사생취의(捨生取義)와 불굴의 충의정신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남자현은 독립운동사는 물론, 한국근대사에서 독특한 위상을 차지한다고 평가되고 있다(강윤정,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의 항일투쟁」,『한국독립운동사연구』64, 2018)

 

전해산 의병장 대구감옥에서 순국 


1908~9년 호남의병장으로 크게 용맹을 떨친 전해산(全海山, 전수용, 전기홍) 의병장이 1910년 8월 23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전해산은 1906년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의 의병항쟁에 영향을 받았다. 1908년 이석용(李錫庸)의 창의동맹단 참모로 전북 남원에서 거병하여 의병대열에 합류했다. 이 해 8월 대동창의단 의병대장으로 추대된 이후 나주·영광 등 호남지방에서 일본 군경과 70여 차례나 전투를 치렀다. 열악한 조건에서 의병전쟁을 전개하여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로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1909년 후반 남원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1910년 6월 3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 받은 후 대구감옥소에 이감되었다. 의병 동지 박영근·심남일·오성술·강무경 등과 함께 8월 23일(음력 7월 18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그의 부인 김해 김씨 역시 장례식날 자결하고 말았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3방면군 

안도현 대사하전투


1939년 8월 24일 새벽 진한장(陳翰章, 중국인)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3방면군은 중국 동북(당시 간도성)의 안도현(安圖縣) 대사하(大沙河) 집단부락을 기습공격하였다. 제3방면군은 이 해 8월 초 항일연군 제2군 4·5사(師)가 제1로군 제3방면군으로 연합편성된 뒤 수행한 첫 전투였다. 3방면군에는 참모장 박득범(朴得範) 외에도 최현(崔賢)·안길(安吉)·양형우  등 많은 한인들이 간부와 대원으로 참가하고 있었는데, 2/3가량의 대원이 한인이었다.  


대사하는 연길현 명월구와 돈화현으로 연결되는 교통요지였는데, 소수의 일본군과 괴뢰 만주국군 2개 중대, 경찰, 자위단원 100여 명 등 수백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특히 사방에 높은 담장을 쌓고 네 모퉁이와 거리 중앙에도 포대를 설치하여 요새화한 곳이었다. 그러나 300여 명의 항일연군 3방면군은 이른 아침에 대사하의 서대문을 돌파하는 공격을 감행하여 결국 성안의 경찰서를 격파하고 만주국 군경의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대사하전투에서 일본군 2명과 괴뢰 만주국 군경, 자위단원 100여 명을 살상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중국 동북(만주) 지방에서 항일세력이 일제의 탄압으로 거의 쇠퇴하는 가운데 거둔 귀중한 승리였다 (황룡국 주필,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료녕민족출판사, 1988, 439~441쪽 ; 김철수,『연변항일사적지연구』, 연변인민출판사, 2002, 917~938쪽).


대구에서 광복회(대한광복회) 결성 


1915년 8월 25일(음력 7월 15일) 대구 달성에서 한말 의병계열과 구국계몽운동계열 지사들이 연합하여 광복회를 결성하였다. 광복회는 ‘대한광복회’로 알려졌다. 


1913년 채기중(蔡基中) 등이 경북 풍기에서 조직한 풍기광복단(대한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광복회로 통합되었다. 강순필(姜順必)·박상진·우재룡(禹在龍) 등이 주도했다. 이후 충청·전라·경기·황해·평안도와 중국 동북(만주) 각지에 조직을 두어 1910년대 후반 대규모 독립운동 단체로 발전하였다. 


조직은 본부에 총사령 박상진, 지휘장 우재룡·권영만(權寧萬)을 두었고, 그 아래에 재무부·선전부를 두었다. 이 밖에 중국 동북에 이석대(李奭大)를 부사령으로 임명했는데, 나중에 김좌진(金佐鎭)을 파견했다. 본부는 박상진가에 두었으며 대구에 설치한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가 본부기능을 분담했다. 후일 만주 길림(吉林)에서 주진수(朱鎭洙) 등이 만주 본부 성격을 갖는 ‘길림광복회’를 결성했다. 


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중국동북에 독립군기지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거점을 중심으로 적당한 시기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했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운동거점으로 각처에 곡물상점을 세웠다. 광복회의 독립운동은 공화주의 이념을 중심으로 군자금 조달, 독립군기지 건설, 조선총독 및 친일부호 처단 추진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활동은 1920년대 의열투쟁의 선구적 모습이었다.


그러나 1916년 전남 벌교 서도현, 1917년 11월 경북 칠곡 장승원(張承遠), 1918년 1월 충남 아산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 처단 등 잇달은 친일부호 처단을 계기로 조직이 경찰에 드러나 많은 사람이 투옥되었다. 결국 1918년 초 박상진과 김한종, 김경태, 강순필, 장두환 등 지도자들이 체포된 뒤 사형에 처해지거나 옥사함으로써 광복회의 활동은 큰 타격을 받았다. 이후 체포를 면한 한훈 등이 광복단결사대를 결성하거나, 우재룡 등이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하여 1920년대 초에 활동을 지속했다(이성우, 『광복회 연구』, 충남대 박사학위논문, 2007).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25일자 석간 2면에 베를린올림픽대회마라톤 우승자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사진을 게재하면서, 유니폼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버렸다. 사실 8월 13일자 『조선중앙일보』 4면과 『동아일보』 지방판 조간 2면에도 일장기가 지워진 채 보도되었지만, 조선총독부 검열당국은 인쇄불량으로 보고 묵인했다. 그러나 이후 동아일보가 조선인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민족의식을 고양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이를 계기로 일대 탄압에 나섰다. 8월 25일자 일장기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는 8월 29일자로 무기정간 처분을 당했고, 『조선중앙일보』는 9월 5일부로 자진 휴간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의 송진우 사장·김준연 주필·설의식(薛義植) 편집국장 등이 물러났다. 또 사회부 현진건 부장과 이길용(李吉用)·장용서(張龍瑞) 기자, 조사부 이상범 화백, 사진부 신낙균·백운선·서영호, 그리고 월간 『신동아』에 전재(轉載) 책임으로 최승만 잡지부장 등 8명의 사원이 구속되었다.


그동안 일장기 말소 보도는 1936년 8월 13일에 『조선중앙일보』가 『동아일보』보다 먼저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근래 연구결과 동아일보도 8월 13일자 조간 지방판에 조선중앙일보와 같은 사진을 실은 것으로 확인되었다(채백,「『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사건 연구」,『한국언론정보학보』 39-3, 2007). 


대한제국 멸망(경술국치)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 ‘조선’으로 격하되었다. 

일본은 1910년 5월 말 육군대장이자 육군대신인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를 3대 한국 통감으로 임명하고 대한제국 병합조치를 단행하도록 했다. 데라우치는 이를 위해 헌병 경찰제를 강화하고 일반경찰제를 서둘러 정비했다. 이 해 6월 종래의 사법·경찰권 외에 일반경찰권까지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후 데라우치는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할 시기를 노리다가, 8월 16일 비밀리에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수락할 것을 독촉했다. 이에 따라 같은 달 22일 형식적인 어전회의를 거쳐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이른바 ‘합병조약’이 조인되었다.


조약이 체결된 뒤 일본 당국은 한국인들의 저항을 두려워하여 발표를 보류하였다. 조약 체결을 숨긴 채 정치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 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에야 순종으로 하여금 양국(讓國)의 조서를 내리게 하였다. 8개조로 된 이 조약은 제1조에서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 영구히’ 일본국 황제에게 양여(讓與)할 것을 규정하였다. 이로써 한국은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27대 519년 만에, 그리고 대한제국이 성립한 지 14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이광린, 『한국사강좌』5(근대편), 일조각, 1983, 501~502쪽). 


독립선언 33인 중 1인 이종일 서거


1925년 8월 31일(음력 7월 13일) 1919년 3·1운동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이종일(李鍾一)이 별세했다.  


그는 독립협회와 대한제국민력회(大韓帝國民力會) 등에서 크게 활약했으며, 1898년 9월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사장겸 기자로 10여 년간 발간을 주도했다. 이를 통해 언론구국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여성해방운동론을 제창했다. 또 1906년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회월보』 과장, 보성사(산하 출판사) 사장 등을 맡아 천도교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사립 흥화학교 설립과 보성학교 교장 등 교육구국운동과 국문연구에 종사하기도 했다.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1912년)와 천도구국단(1914년) 등 비밀결사 주도와 1914년 갑오동학농민전쟁 계승 등 신생활운동인 삼갑(三甲)운동을 주창하였다. 또 1919년 2월 천도교주 손병희와 함께 3·1운동 준비단계를 주도했는데. 특히 독립선언서 인쇄와 배포, 3월 1일 독립선언에 크게 공헌했다. 


3·1운동 직후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지만 옥중투쟁을 전개하였고, 1921년 12월 가출옥으로 석방되었다. 1922년 3월 1일을 기해 제2독립선언을 계획했으나, 실패하였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고생하다가 굶주림으로 1925년 8월 31일 순국하였다(박걸순, 「옥파 이종일의 사상과 민족운동」,『한국독립운동사연구』9, 1995).  

  

필자  장세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나와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연구원, 성균관대학교 연구교수,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 동북아역사재단 교수실장 등을 거쳐 현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 역사연구소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 『중국 동북지역 독립운동사』 『봉오동 청산리전투의 영웅-홍범도의 독립전쟁』 『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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