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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2022/08]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의 항일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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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군정서 대원으로 입단해 항일독립군으로 활약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1919년 3·1 독립운동의 불길이 전국을 휩쓸 때, 남자현은 독립선언서를 가슴에 품고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그리고 3월 9일 이른 아침, 압록강을 건너 류하현 삼원보로 향했다. 남자현은 청산리전투에 참전해 독립군의 간호에 전력을 기울여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어졌다. 그 후 이상룡이 한족회를 발족하고, 뒤이어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군사기관으로 서로군정서를 창설하자, 남자현은 서로군정서의 대원으로 입단하여 항일독립군으로 활약했다.  


1933년 8월 22일, 이날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었던 남자현(南慈賢)이 순국하였다. 그녀는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어떤 순간이라도 우리가 독립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잊지 않는다면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라는 귀한 유언을 남기고, 영면의 길에 들었다. 


그녀는 1872년 음력 12월 7일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서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남정한(南珽漢)의 1남 3녀의 막내딸로 태어나 부모님으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글공부를 했는데, 일곱 살 때 이미 한글을 깨우치고 열두 살 때부터는 소학과 대학을 읽었다고 한다. 열네 살 때에는 사서에 통달했다고 하니, 참으로 총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아버지는 명망있는 유학자로서 그 문하에 많은 제자들이 학문을 수학하고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투철한 분이었다. 따라서 그의 문하에 있는 제자들은 나라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남자현의 삶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을미의병이었던 남편 전사 후

날마다 원수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 되새겨


그런데 그녀는 열아홉 살 되던 1891년에 김영주(金永周: 1862~1896)와 결혼하면서, 그녀의 항일투쟁에 한발 더 다가갔다. 


그 당시로 되돌아가보자.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이날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우리나라 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지휘하는 일본의 검객 및 낭인들에 의해서 참살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우리는 이 사건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 이름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축발된 의병항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을미의병(乙未義兵)이다.  


이때 김영주는 김도현(金道鉉: 1852~1914) 의병장이 지휘하는 영양의진에 참여하여 경상북도 진보군 진보면 홍구동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던 중 전사하였다. 이때가 1896년 음력 7월 11일이었다. 

이로써 남자현은 기댈 언덕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이에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날마다 남편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홀로 된 시어머니를 봉양해야 한다는 며느리로서의 효성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이러는 사이에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1904년으로 접어들면서 미국을 위시하여 자국의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각기 군대를 서울에 입성시키고, 일본은 우리 조정으로부터 황무지개간권을 얻어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공작을 펼쳐나가고 있었다. 또 이 무렵 일본은 우리나라 전 지역을 대상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면서 영토를 한 뼘 한 뼘 점령해갔다.   


  그리고 1904년 2월 23일에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면서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내정간섭이 노골화되었다. 이에 이어진 1905년 11월 17일의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에 의해서 우리나라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통감에 의한 내정간섭이 더욱 심화되었으며, 우리의 외교권마저 일본에 빼앗기고 말았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독립국가로서의 국제적 지위를 잃고 말았다.  


압록강 건너 만주 망명 길에 올라 

죽는 날까지 항일독립운동 식을 줄 몰라 


한 나라가 망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의하여 나라가 병탄됨으로써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땅에는 벌거벗은 식민지의 백성들이 있을 뿐이었다.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자 많은 애국지사들은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어떤 이는 중국으로, 또 어떤 이는 미국으로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망명길에 올랐다. 국권회복의 뜻을 품고 망명의 길에 오르는 애국지사들을 지켜보면서 남자현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함께 망명의 길에 오를 수 없는 심정을 달래면서 때를 기다렸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1919년 3·1 독립운동의 불길이 전국을 휩쓸면서, 남자현의 가슴에도 불길이 당겨졌다. 그녀도 분연히 일어났다. 독립선언서를 가슴에 품고 애국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그리고 3월 9일 이른 아침에 전국 각지에서 만세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을 때, 그녀는 짐을 챙겨들고 압록강을 건너 류하현 삼원보로 향하였다. 이곳에는 항일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하여 미리 망명해온 이회영(李會榮)·이동녕(李東寧)·주진수(朱鎭洙) 등이 신흥강습소(뒷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배출된 독립군들이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와 10월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장식한 주역이었다는 것은 우리 항일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아있는 사실이다. 이때 남자현은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여 독립군의 간호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로써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리어졌다. 


그 후, 이상룡(李相龍)이 서간도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한인사회의 지도자들을 하나로 모아 한족회를 발족하고, 뒤이어 항일무장투쟁을 위한 군사기관으로 서로군정서를 창설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이때 남자현은 서로군정서의 대원으로 입단하여 항일독립군으로 활약하였다. 


또 1922년에는 김동삼(金東三)이 남만주 지역의 독립운동단체인 통의부를 조직하였는데, 간부들 사이에 복벽(復辟)이냐 공화(共和)냐의 문제로 이념갈등을 겪고 있었다. 이때 남자현이 뛰어들어 통합운동에 힘을 보탰다. 


이처럼 남자현의 항일독립운동은 식을 줄 몰랐다. 1933년 3월 1일, 길림주민회장 이규동(李圭東)과 함께 만주괴뢰국(滿洲傀儡國) 건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할 예정인 일본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격살할 계획을 세우고, 치밀하게 노력하였다. 2월 27일, 그녀는 중국 노파의 차림으로 변장하고 폭탄과 권총을 소지하고, 평생의 대업을 이루려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하얼빈 교외에서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는 불운을 맞았다. 


그로부터 하얼빈 소재 일본영사관 감옥에 수감되어 6개월간 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나 당당하였다. 일본이 주는 식사를 거절하고,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였다. 마지막으로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오지 못한 먼길을 떠났다.  


필자  권용우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ㆍ법과대학장ㆍ산업노사대학원장ㆍ행정법무대학원장ㆍ부총장ㆍ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正心法學) 포럼 대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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