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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2022/09] 황성신문 민중계몽에 앞장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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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대표 민족지로 민중계몽에 앞장


찢어질 듯한 가슴으로 쓴 “시일야방성대곡”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황성신문은 창간 당시부터 재정적인 토대가 잡히지 않아서 어려움이 참으로 많았는데, 1902년 8월 제2대 사장으로 장지연을 선출하였다. 하지만 신문사의 재정은 여전하였고, 설상가상 나라는 나날이 기울고 있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을사오조약이 체결되면서 나라의 명운은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를 지켜본 백성들은 울분을 터뜨리고, 상인들은 상가를 철시하고 생업을 접었다. 이러한 정황을 지켜본 사장 장지연은 찢어질 듯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붓을 잡았다. 


1898년 9월 5일, 이날 나수연(羅壽淵)·류근(柳瑾)·윤치호(尹致昊)·남궁억(南宮檍) 등이 힘을 모아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였다. 이때 류근·박은식(朴殷植)이 주필을 맡았으며, 남궁억이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로써 한말의 대표적인 민족지로서 민중계몽에 앞장서 나갔다.


이때 황성신문은 대한황성신문(大韓皇城新聞, 그 전신은 경성신문)을 인수하여, 신문사업에 찬동하는 전국의 여러 사람들로부터 자본을 모금하여 합자회사(合資會社) 형태로 출발하였다. 모금방법은 오늘날의 주식에 해당하는 고표(股票)를 발행하여 자본을 모았으며, 고표를 소지한 사람은 주식회사의 주주와 같은 자격을 부여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말의 여러 신문은 대개 개인소유이거나 몇 사람의 합자로 운영되었는데 반하여, 황성신문은 고표를 발행하여 많은 사람을 신문사업에 참여토록 하였다는 점이 큰 특색이었다. 


그리고 황성신문은 국한문 혼용으로 제작되었다. 황성신문의 전신인 경성신문과 대한황성신문은 한글전용이던 것을 국한문 혼용으로 한 것은 “황제 폐하께서 갑오경장(甲午更張) 때 공문 등을 국한문으로 혼용하라는 분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편 1896년에 창간된 독립신문이 한글전용인 것과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황성신문은 창간부터 자본의 모금이 순조롭지는 못하였지만, 민중들의 여망에 따라 신문은 계속 발행되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4년간 남궁억이 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두 차례나 구속되는 일제의 탄압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1904년에 접어들면서 미국을 비롯한 세계열강들이 자국의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서울에 군대를 입성시켰다. 


이때 일본은 한국의 황무지개간권을 얻어내 일본예속화를 위한 놀임수를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1904년 2월 23일에는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강제로 체결하고, 내정간섭을 시작하였다. 이 의정서에 일본이 한국의 독립과 영토에 대한 보전을 확보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지만(3조), ‘일본의 시정개선에 관한 충고를 한국이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제3국의 침략에 의하거나 내란으로 인하여 한국 황실의 안녕보존이 위험에 처할 경우에 일본은 이에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거나 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 후 두 차례에 걸친 한일협약을 통하여 식민지화를 위한 터전을 다져나갔다. 8월 22일의 제1차 한일협약에 의하여, 일본정부가 추천하는 사람을 재정고문이나 외교고문으로 초빙하는 이른바 고문정치가 시작되었으며, 1905년 11월 17일의 제2차 한일협약(이른바 乙巳五條約)에 의하여 한국에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고, 통감(統監)에 의한 내정간섭이 노골화되었다. 이 뿐이 아니었다. 외교권(外交權)이 박탈됨으로써 독립국가(獨立國家)로서의 국제적(國際的) 지위를 잃고 말았다. 나라가 있으나, 껍데기뿐이었다.   


독립협회와 짝을 이루다 


1898년 황성신문이 창간될 무렵, 독립협회(獨立協會)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면서 자주국권운동(自主國權運動)을 전개하였는데, 이로써 민중들에게 커다란 자극제(刺戟劑)가 되었다. 이 때 만민공동회에서 관리들의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고, 비자주적(非自主的)인 외교(外交)를 비판하면서 조정(朝廷)을 압박하였다. 윤치호·이상재(李商在)·남궁억 등 독립협회 간부들은 세계열강들의 침략적(侵略的) 야욕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자주국가(自主國家)의 건설을 부르짖었다. 이때가 1898년 3월 10일이었다. 


뒤이어진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개최된 만민공동회에서는 전·현직 관료와 각종 단체의 회원·교원·종교인·학생·노동자 등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참석하였는데, 이 집회에서는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황제권을 공고히 하고 국정을 쇄신해야 한다는 6개항의 개혁안을 채택하였다. 이것을 ‘헌의6조’(獻議六條)라고 이름하였다. 이 헌의6조의 제1조는 “외국인에게 의존하지 말고, 관민이 마음과 힘을 합쳐 전제황권(專制皇權)을 공고히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관민이 하나되는 국가를 열어가야 한다는 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었다.


이때 황성신문은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황성신문의 사장 남궁억이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의 설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그 후로도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창간에 참여하고 민중계몽과 항일투쟁에 관한 논설을 발표하면서 독립협회의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음에 비추어볼 때 황성신문이 만민공동회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하였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도, 황성신문도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바로 잡을 수는 없었다.


일제 강압으로 을사늑약 체결 

나라 명운은 곤두박질


황성신문은 창간 당시부터 재정적인 토대가 잡히지 않아서 어려움이 참으로 많았는데, 1902년 8월 사원총회를 열고 제2대 사장으로 장지연(張志淵)을 선출하였다. 

 

장지연이 사장으로 취임하였지만, 신문사의 재정의 어려움은 여전하였다. 재정의 어려움을 타개할 목적으로 종래 10명이던 찬무원을 15명으로 추가하여 각 부(府)와 군(郡)에 밀린 신문구독료를 독촉토록 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격”이라고 했던가. 탁지부에서 황성신문이 사옥으로 쓰고 있던 건물을 비워달라는 통보를 해왔다.         

황성신문이 이처럼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나라는 나날이 기울고 있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을사오조약이 체결되면서 나라의 명운은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를 지켜본 백성들은 울분을 터뜨리고, 상인들은 상가를 철시하고 생업을 접었다.  


이러한 정황을 지켜본 사장 장지연은 찢어질 듯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붓을 잡았다. 


“지난 번에 이토(伊藤博文)가 한국에 오매 우리 인민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토는 동양3국(東洋三國)을 정립하여 안녕하기를 맡아 주선하던 인물이니 이번에 한국을 찾아옴도 반드시 우리나라 독립을 공고히 할 방략을 권고하리라 하여 관민이 그를 환영하였더니, … 천만 뜻밖에도 오조약(五條約)을 어떤 연유로 제출하였는고? … 아아, 개 · 돼지 새끼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大臣)이라는 것들이 … 나라를 팔아먹은 적(賊)이 되기를 서슴치 않았으니 4천년 강토(疆土)와 5백년 종사(宗社)를 남에게 바치고 2천만 생령(生靈)들을 남의 노예로 만들었다. … 아프고 아프도다. 동포여, 동포여!” 


이것이 1905년 11월 20일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발표한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날에 목을 놓아 통곡하노라)의 일부이다. 어찌 장지연만의 심정이겠는가.   


필자  권용우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ㆍ법과대학장ㆍ산업노사대학원장ㆍ행정법무대학원장ㆍ부총장ㆍ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正心法學) 포럼 대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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