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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더 생각하는 역사 [2022/09] 대한제국은 왜 멸망했나? 9┃대롱 시각[管見]으로 바깥세상을 보는 어리석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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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약 국가로 몰락하는 과정이 곧 망국의 과정


안목 좁은 군주는 늘 백성을 힘들게 했으니


글 | 신복룡(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대한제국의 해방(海防)의 실패가 망국의 원인의 맨 앞자리에 있으며, 그러한 결과가 초래되기까지에는 중화 중심의 세계관과 일본을 이적(夷狄)으로 본 편협한 인식,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들어온 서양 문물까지 거부함으로써 취약 국가(脆弱國家)로 몰락하는 과정이 곧 망국의 과정이었다. 결국 문제는 시각과 시야, 견문의 차이 그리고 국가 개혁 의지가 명군(明君)과 혼군(昏君)을 구별하는 준거인데 1910년대를 전후한 한국의 지도자들은 혼군과 그 근신으로 가득 찼다는 것이 국가적인 재앙을 낳았다. 안목이 좁은 군주는 늘 국가와 백성을 힘들게 했다.  


앞섰으니 그리 큰 시차라고는 볼 수 없다. 그 뒤 1549년에 스페인의 선교사 프란치스코 자비에르(Francisco Xavier)가 가고시마(鹿兒島)에 상륙했을 때 일본의 쇼군(將軍)은 그들을 박해하지 않았으며, 그들에게 묻어 들어온 서양 문명의 이기들을 십분 활용했다.


특히 일본 에도(江戶) 막부의 개명 군주였던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 1684~1751)는 네덜란드(和蘭)의 상인들에 의해 반입되는 서구 문명의 가치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해양 기술은 물론이고 총포와 기계, 의학, 농학, 인쇄 기술까지 일본화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이른바 난학(蘭學)이라는 독특한 학문 영역을 개척했다. 이때로부터 일본에는 번역 문학이라는 색다른 장르의 학술 체계도 개척했다. 이런 점에서 일본의 문화는 창조적이라기보다는 번안(飜案) 문학이었다. 그 뒤 일본도 천주학이 수평적 인간 관계를 주창함으로써 수직적 통치 관계를 주장하는 막부 치하에서 핍박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막부는 한때 천주학을 탄압하면서도 그들의 문명은 고스란히 존속했다.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해군


“미국의 역사를 움직인 백 권의 책”에 포함된 알프레드 마한(Alfred Mahan)의 『해상권이 역사에 미친 영향』(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 1889)에 따르면, 전쟁에서 최후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해상권이라고 한다. 미국 해군사관학교의 교장이었던 그의 해상 이론은 맥아더(Dougls MacArthur)를 중심으로 하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략에서 중심적인 개념이었다. 


조선이 난학을 배워 일본의 식민지주의에 대항할 기회는 많았다. 앞서 지적한 월터브레라든가 하멜의 이야기는 지나간 이야기라 치더라도, 그 뒤 일본에 왕래하던 수신사들은 난학의 경이로움을 목격했고, 숙종 시대의 조태억(趙泰億)과 같은 인물은 1711년에 일본에 수신사로 갔다가 네덜란드의 상인(和商)들을 직접 만나 대담한 적이 있었다. 이들은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의 문물을 소개하는 등의 치계(馳啟)를 올렸다가 왜구와 내통했다는 죄목으로 귀국과 더불어 곧 투옥된 사실이 있었다.(『숙종실록』 37년 12월 30일, 38년 3월 27일 등) 왜(倭)에게서 마치 배울 것이 있다는 식의 논변(論辨)조차도 허락되지 않는 것이 당시 조선의 중화주의와 대일 인식, 그리고 서구 문물에 대한 자세의 본질이었다.


대한제국 멸망은 편협한 대외 인식의 결과


대한제국은 왜 멸망했는가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하려는 것이 이 글의 주제인데, 그 결론 가운데 하나는 대한제국의 해방(海防)의 실패가 망국의 원인의 맨 앞자리에 있으며, 그러한 결과가 초래되기까지에는 중화 중심의 세계관과 일본을 이적(夷狄)으로 본 편협한 인식,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들어온 서양 문물까지 거부함으로써 취약 국가(脆弱國家)로 몰락하는 과정이 곧 망국의 과정이었다. 어느 대통령은 미국을 가 보지 않고서도 국가 원수가 된 것을 자랑이나 되는 듯이 말한 적이 있다. 미국 유학이 대단한 자랑이 아니듯이, 미국을 가보지 않은 것이 자랑일 수는 없다. 


결국 문제는 시각과 시야, 견문의 차이 그리고 국가 개혁 의지가 명군(明君)과 혼군(昏君)을 구별하는 준거인데 1910년대를 전후한 한국의 지도자들은 혼군과 그 근신으로 가득 찼다는 것이 국가적인 재앙을 낳았다. 안목이 좁은 군주는 늘 국가와 백성을 힘들게 했다.  


필자 신복룡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객원교수와 대한민국 학술원상 심사위원,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그리고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출판부장, 중앙도서관장, 대학원장,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는 『한국분단사연구』, 『한국사 새로 보기』, 『한국정치사상사』, 『해방정국의 풍경』, 『전봉준평전』, 역서 『한말 외국인기록』(전 23권)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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