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스크랩 [2022/10] 10월과 관련된 순국선열의 작은 역사, 소중한 이야기
페이지 정보
본문
결사항전의 굳은 각오로 이룩한 승리…청산리독립전쟁
일제에 맞선 불굴의 의지·헌신과 희생정신
글 |장세윤(월간 순국 편집위원)
올해 10월은 만주 독립군 부대의 청산리독립전쟁 102주년이 되는 달이다. 김좌진의 대한(북로)군정서 독립군 부대와 함께 대한독립군 등 독립군 연합부대를 지휘하여 추격하는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던 홍범도는 늘 조국 독립과 민족 해방을 위한 독립전쟁의 결의를 다지며 부하들에게 강한 정신교육을 실시하며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그는 1920년 중반 중국 동북(만주)의 독립전쟁 과정에서 자신의 독립군 부대를 후원하는 동포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국권회복을 뜻한 이래로 이미 10년의 세월을 보냈으며, 독립의 의군(義軍)을 일으켜 한족(韓族)의 독립을 힘써 외친 이래 1년 반을 지냈다. (중략) 우리들 의로운 독립군 부대들은 일의 성공과 실패를 따지지 않고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평소의 의지 관철에 분투함으로써 우리 한민족 독립을 최후까지 힘을 다하여 외쳐, 죽은 뒤에야 그쳐야 한다는 것을 항상 부하에게 훈시하고 있다.”(「間島地方武力不逞鮮人ノ動靜ニ關スル件」,『現代史資料』27(朝鮮3), 姜德相·梶村秀樹 編, 東京: みすず書房, 1970, 360쪽.) 참으로 대단한 독립군 대장의 기개와 용기이다. 역경에 굴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강한 정신력, 헌신과 희생 정신! 우리가 다시 음미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일제 조선어학회사건 조작
관련 인사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을 통해 경찰은 ‘조선어학회는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라는 자백을 받아냈다. 조선어학회는 조선어를 연구하고 맞춤법을 제정하며, 조선어사전 편찬을 당면 목표로 삼았던 단체였다. 사실 회원들은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활동했지만, 치안유지법을 어길만한 단체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조작으로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확대되었다(장신,「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단과 민족서사의 탄생」,『한국독립운동사연구』53, 2016).
1931년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개편된 후 장지영(張志暎)·김윤경(金允經)·권덕규(權悳奎)는 맞춤법 제정위원과 표준어 사정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완성하고 1935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1940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확정하는 등 사전 편찬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말 큰사전』 편찬에 힘쓰던 중 1942년 일제가 한글 연구 탄압을 목적으로 일으킨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사전 편찬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광복 후 재건된 조선어학회가 사전 편찬을 이어나가 1957년 『조선말 큰사전』이 완간되었다.
일본, 명성황후 민씨 시해
‘을미사변’ 발생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새벽 일본 외교관, 군인 등 공권력과 민간인, 낭인(떠돌이 부랑배) 등 수십명이 합세하여 서울 경복궁에서 조선의 왕후 민씨(명성황후, 1851~1895)를 무참히 살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났다.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弑害事件)’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 당시 경복궁 현장에서 이를 지휘한 일본측 최고위 인물은 부임한지 37일 밖에 안된 일본공사 미우라 고루(三浦梧樓)였다. 주요 무력은 서울 주둔 일본군 수비대였고, 행동대는 일본공사관원, 영사 경찰, 신문기자, 낭인배 등이었다. 이들은 미우라의 직접 지시로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기습하여, 고종의 왕후인 중전 민씨(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를 참혹히 살해했다. 그리고 시신은 근처의 숲속으로 옮겨 불태워 버렸다. 127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 사건의 진상은 제대로 규명되지 않고 있다.
처음부터 비밀리에 진행된 만행인 데다가 사건 직후, 일본측이 철저히 자료를 없애고 왜곡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결국 일본 정부 차원에서 조선 반일세력의 핵심이자 러시아와의 주요 연결고리로 지목된 왕후를 제거한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나중에 감옥에 수감된 범죄자들을 ‘증거불충분’이라며 전원 무죄 방면하였다(1896.1.20). 일본인 범죄자들은 감옥에서조차 일본 관민으로부터 영웅처럼 대우받았고, 사건의 주범 미우라가 석방되어 토쿄에 도착하자 일본 일왕은 그의 ‘노고’를 치하하기까지 했다.
을미사변은 단발령과 함께 사건 직후부터 항일의병이 대거 봉기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또 신변이 위태롭게 된 고종이 이듬해 2월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아관파천). 을미사변은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만행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으로 우리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을미사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명성황후 시해에 직접 가담한 일본 외교관이 고향 친구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126년 만에 발견됐다. 편지에는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는 내용 등 명성황후 시해 사건 경위가 상세히 기록되었다. 당시 조선에 영사관보(補)로 머물던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 1865~1945)는 외교관·경찰·민간인 등으로 구성된 을미사변 실행단의 일원이었다. 그는 편지에서 “나는 진입을 담당했다. 담을 넘어 (중략) 간신히 오쿠고텐(奧御殿·경복궁 옥호루 안의 건물, 침소)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고 썼다. 또 “생각보다 간단해서 오히려 놀랐다”는 소감도 덧붙였다(『아사히신문(朝日新聞)』 2021.11.16 ; 『경향신문』 2021.12.6). 을미사변이 일본 국가 차원의 범죄라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중국 우한에서 조선의용대 창설
1938년 10월 10일 중국 우한(武漢)에서 관내(關內)지역 최초의 한인 무장조직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결성되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공산당 세력과 함께 대일항전을 벌인 조선의용군의 모체가 된 조직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무장조직인 한국광복군의 한 뿌리가 되는 독특한 조직이다.
해방 직후 조선의용군은 북한 건국 및 건군에 주요한 기반이 되었고, 1950년대 중반 중국 동북 연변지역에 성립한 ‘연변조선족자치주’건립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초기 조선의용대 구성원의 자질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군관학교나 군관학교 부설 훈련과정을 마치는 등 당시의 다른 항일무장 세력보다 우수했다. 당시 조선의용대 대장 김원봉(金元鳳)은 “군중 단체가 아니라 간부집단”이며, “관내에서 제일 우수한 군사정치 간부의 절대 다수 골간(骨幹)으로 조직된 간부집단”이라고 매우 높이 평가했다. 조선의용대 주요 대원들은 후일 조선의용군과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정치세력화 기반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의용대는 출범부터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의 지원과 통제가 상당한 제약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조선의용대는 출범 초기 100여 명에 불과했지만, 1년 반여동안 대원이 314명으로 늘어났다. 조선의용대 구성원들은 주로 평안도·함경도·경상도 출신 인사들이 많았고 간부진도 이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창립 당시 평균연령은 27.8세, 1941년 중반 중국 화북지방으로 북상한 뒤 화북지대 전체 구성원의 평균연령은 29.5세로 파악된다(장세윤, 「조선의용대의 조직편성과 구성원」,『한국근현대사연구』11, 1999).
이봉창 의사
일본이치가야형무소에서 순국

현재 이치가야형무소는 없어지고 주택가로 변했다. 당시 사형장 터로 보이는 어린이놀이터 한구석에는 1964년 일본 변호사연합회에서 세운 '형사자위령탑(刑死者慰靈塔)’이라는 비석이 남아있다. 이 형무소에서 이봉창 외에도 김지섭 의사가 수감중 1928년 2월 20일 옥사하였고, 박열(朴烈) 의사도 옥고를 치렀다.
조명하 의사 타이페이형무소에서 순국
1928년 10월 10일 대만의 타이페이형무소에서 단도로 일본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장인을 척살코자 한 조명하(趙明河, 1905~1928.10.10) 의사가 순국하였다.
일제 당국의 처형으로 순국 직전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 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 하리라.”는 유언을 남겼다.
동아시아 침략의 주범 일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는 조의사가 순국한 지 3개월 17일 뒤인 1929년 1월 27일 단도의 독약이 온 몸에 퍼져 목숨을 잃었다.
향산 이만도 자정 순국
1910년 10월 10일 안동 출신 관료, 유림 지도자, 의병장 출신 이만도(李晩燾,
1842~1910.1010) 열사가 일제의 한국 강점에 항의하여 자정, 순국하였다.
그는 퇴계 이황(李滉)의 11세손이다. 지속적으로 위정척사 운동과 의병 항쟁을 전개하던 이만도는 1910년 일본의 강제병합으로 나라가 멸망하자 단식을 시작했다. 처음 단식을 시작한 곳은 봉화 재산의 묘막이었으나, 동생 이만규(李晩煃), 아들 이중업 등의 간청으로 종가인 만화공(晩花公) 댁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본 경찰이 와서 강제로 미음을 떠먹이려 하자, “누가 감히 나를 회유하고 협박하느냐!”라고 호통을 쳤다. 1910년 10월 10일(음력 9월 8일) 단식 24일 만에 순국했다(김희곤, 『안동 독립운동 인물사전』(선인 2011, 326~327쪽).
이강년 의병장 경성감옥에서 순국

이강년(李康秊, 1858~1908.10.13)은 1880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어 벼슬길에 올랐지만, 1884년 갑신정변 때 물러나 고향인 경북 문경에 은거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에 투신했다. 관료 출신으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예는 매우 드물다. 그는 충북 제천에서 유인석(柳麟錫) 의병부대가 봉기했다는 말을 듣고 1896년 1월 문경에서 봉기하였다. 일제 침략이 심화되자 1907년 3월 제천에서 재봉기하여, 경북 북부지방과 충북·강원도 일대에서 맹활약을 했다. 그러나 결국 1908년 6월 충북 청풍 까치성(鵲城) 전투에서 일본군의 탄환에 맞아 사로잡히고 말았다. 서울로 압송된 후 평리원(平理院)에 이송되어 교수형을 선고받고 1908년 10월 51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1권, 1986),
고광순 의병장 구례 연곡사에서 전사
1907년 10월 16일 고광순 의병장이 전남 구례 연곡사에서 일본군의 기습으로 전사, 순국하였다.
고광순(高光洵)은 전남 담양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고경명·고종후 부자 의병장의 후손이다. 그는 1907년 1월 24일 고향인 창평 저산(猪山)의 제각에서 고제량·고광훈·고광채 등 집안 일가들, 윤영기(尹永淇)·박기덕(朴基德)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여러차례 전투를 치른 뒤 같은 해 8월 구례 연곡사(燕谷寺)로 가서 주둔하며 의병부대를 훈련시키고 군량을 보충하였다.
특히 ‘불원복(不遠復)’이라는 깃발을 만들어 사기를 북돋웠다. 이후 지리산을 거점으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10월 16일 새벽에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부장인 고제량 등 주요 장졸들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고광순은 특히 ‘지리산 근거지론’을 수립하고, 장기 항전을 구상하였다(홍영기,「한말 고광순의 의병활동과 지리산 근거지론」,『역사학연구』47, 호남사학회, 2012).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
발기회 개최

1920년 청산리독립전쟁 후 일본군의 중국 연변(북간도)지방에서의 한인 대학살과 1921년 러시아에서의 자유시참변 등으로 만주·연해주 지역 독립운동이 분산·침체되면서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22년 남만주 서간도 지역에서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 등의 단체를 통합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가 결성되었다. 그 뒤 통군부를 바탕으로 같은 해 8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확대, 발전하면서 독립운동 역량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주도세력 내부에 갈등이 생기며 일부 복벽세력이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자, 대한통의부 의용군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1924년 6월 참의부(參義府)를 결성하였다.
이후 이에 반발하는 대한통의부 중앙조직과 민간 요원들을 중심으로 통합운동이 재개되어 1924년 7월 이장녕(李章寧)을 회장으로 하는 과도기 조직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가 소집되었다. 대한통의부·군정서·대한독립군·대한독립군단·광정단(匡正團)·의성단(義成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노동친목회·카륜(佧倫)자치회·고본계(固本契)·학우회 등 11개 단체 대표들은 1924년 10월 18일 지린에서 발기회 본회의를 열고, 통의부 대표인 김동삼(金東三)을 전만통일회의주비회의 의장으로 선출했다.
이날 열린 발기회에서 새로운 독립군단의 명칭과 이후 결성될 독립군단의 운영방식 등을 논의하고 지방자치를 위해 무장대를 둔다는 등의 3개항을 결의하였다. 또 자치·군사·교육·재정·생계 등 6개 분과 위원과 중앙행정위원을 선임하여 통합조직 논의를 지속하였다(채영국, 『한민족의 만주 독립운동과 정의부』, 국학자료원, 2011, 77~86쪽).
청산리독립전쟁 개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중국 연변(북간도)의 백두산 동북쪽 청산리 골짜기 일대에서 독립군의 ‘청산리독립전쟁’이 전개되었다. 1920년 6월의 봉오동전투와 10월의 청산리독립전쟁(일명 청산리전투, 청산리전역[warfare], 청산리대첩)은 한민족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대표적 ‘독립전쟁’의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청산리독립전쟁은 1920년 10월 김좌진(金佐鎭)·나중소(羅仲昭)·이범석(李範奭) 등이 지휘하는 대한(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영도하는 대한독립군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 연합부대가 독립군 탄압을 위해 연변지역에 출동한 정규 일본군 히가시(東正彦) 지대(支隊)를 상대로 대소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대파한 일련의 전투를 말한다.
청산리전투, 나아가‘청산리대첩’, 청산리독립전쟁은 독립군의‘일방적 대승’이었다기보다는 2,000여 명의 여러 독립군 부대가 추격해오는 5,000여 명 규모의 일본군 여러 부대들을 상대로 십여차례 계속해서 치고 빠지는 소규모·대규모의 유격전 형태로 전개되었다. 홍범도 독립군 부대는 끈질기게 추격해온 일본군과 마적의 연합공세로 한 때 곤경에 처했으며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 휘하 부대와 북로군정서 등 독립군 병사들을 규합하여 다시 역습을 가함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청산리독립전쟁 가운데 완루구전투와 고동하전투는 홍범도 연합부대가 수행한 전투이고, 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이 단독으로 수행한 전투였다, 어랑촌전투와 천보산전투는 양 세력이 함께 싸운 전투였다.
일본군은 최대의 격전 어랑촌전투에서 패전한 사실을 디음과 같이 간접적으로 실토하였다. “봉밀구(蜂蜜溝) 및 청산리 부근에서 히가시(東支隊) 지대의 전투 조짐이 있는데, 이 방면에 있는 적도(賊徒:독립군)는 김좌진 지휘하에 있는 군정서 일파와 독립군 중 홍범도가 지휘하는 일단(一團) 등이 합하여 기관총 등 신식 병기를 갖고 약 6,000명으로 이루어진 것 같으며, 다른 방면과 달리 완강히 저항하고 있다……”(「電報」朝特 114號, 1920년 10월 25일자(發信 朝鮮軍司令官 受信 陸軍大臣),『現代史資料』28(朝鮮 4), 姜德相 · 梶村秀樹 編, 東京: みすず書房, 1972, 222쪽)
허위 의병장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1908년 10월 21일(음력 9월 27일) 경북 구미 출신의 허위(許蔿. 1854~1908.10. 21) 의병장이 막 새로 신축 이전한 경성감옥(구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그는 1908년 1월 말 전국 연합의병부대인 ‘13도 창의대진소(倡義大陣所)’의병을 이끌고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일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해 6월 11일 경기도 양평군 유동(柳洞) 산중 마을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 뒤 경성감옥에 이송되었다. 한국주차군(駐箚軍) 참모장겸 한국주차 헌병대장 아카시 모토지로(明石元二郞) 소장은 허위의 경력과 충군애국 사상, 동양평화에 대한 탁월한 식견, 한학 소양 등을 알고 회유하는 한편, 그를 구하고자 했지만, 허위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결국 그는 ‘경성감옥 사형수 1호’로 교수대에 올라 54세를 일기로 의연하게 순국하였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1권, 1986 및 경운대학교 산학협력단, 『구미독립운동사』, 구미시, 2021, 110~145쪽).
안중근의사,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사살

안중근은 교수형으로 순국하기 직전 “이등박문 사살은 동양평화를 위해 한 것이므로, 일·한 양국인이 서로 일치협력해서 동양평화 유지를 도모하기 바란다”라고 유언을 남겼다.
유명작가 김훈은 올해 8월 발간한 장편소설 『하얼빈』(문학동네, 2022, 167쪽)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죽기 직전 비서관에게 자신을 저격한 ‘범인’이 조선인이라는 보고를 받고 “바보같은 놈”이라고 말했다고 썼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자신을 저격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 채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죽었다. 특히 1910년 2월 10일에 열린 4번째 공판에서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好雄) 검찰관(검사)은 “이토가 ‘바보같은 놈’이란 말을 남기고 죽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진술하였다.
안중근의 의거는 미주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 하와이에서 발행되던 『신한국보(新韓國報)』는 안중근 의거 직후인 1909년 11월 2일자(제35호)에 의거 소식을 대서특필하였다. 미주동포들은 의거 직후 곤경에 처한 안중근 의사와 그의 유족을 돕기 위해 성금을 모아 보내는 등 안의사의 독립전쟁을 적극 지지하고 성원하였다. 또 1911년 1월 신한국보사(新韓國報社)는 한글판 『대동위인 안중근전』을 최초로 간행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