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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2022/10] 고당 조만식의 애국·애족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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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물산장려회 창립한 ‘조선의 간디’


국산품 애용이 애국! 검소한 삶 스스로 실천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1913년 3월,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졸업하고 귀국한 고당은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해서 지리·역사·영어를 가르치면서 교육구국(敎育救國)의 길에 들어섰다. 이때 고당은 학생들에게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고, 앞장서서 스스로 실천하였다. 이것이 뒷날 조선물산장려회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고당은 국산품 애용이 곧 애국이라는 생각이었다. 개인이든 나라이든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면 남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고당을 가리켜 ‘조선의 간디’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은 1883년 2월 1일 평안남도 강서군의 창녕 조씨 집안에서 외아들로 출생하여,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그리고 열다섯 살이 되면서부터 친구 한정교와 동업으로 포목상을 경영하면서 삶의 법칙을 몸에 익혀갔다. 


그런데 고당의 청소년 시절은 나라의 정세가 참으로 암울한 때였다. 1894년 2월,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항거하는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났으며, 7월에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입한 갑오변란(甲午變亂)으로 말미암아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백성들은 참으로 어리둥절하였다. 1894년 7월, 김홍집 내각이 출범하면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내정개혁의 돛을 올렸다. 이때 내정개혁의 주된 내용은 청나라와의 주종관계를 청산, 각종 법제의 개편, 반상신분(班常身分)의 철폐, 과거제도의 폐지, 도량형의 개정, 공사노비의 혁파 및 과부의 재가 허용 등이었다. 그런데 이 개혁은 형식상으로는 시대적 조류를 반영한 대개혁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처음부터 일본의 일방적인 의도에 따라 그들의 권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빛을 잃고 있었다. 


더욱이 세상을 놀라게 하였던 것은 1895년 10월 을미사변(乙未事變)이었다. 이는 갑오변란이 있은 후 명성황후가 러시아를 끌어들였다고 판단한 일본이 우리나라 주재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일본의 검객과 낭인을 지휘하여 명성황후를 참살하였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사건을 지켜본 우리 민중들은 “왜놈들이 감히 궁궐에 침입해 국모를 살해하다니 개·돼지보다 못한 놈들”이라는 반일감정을 격화시켰으며, 전국에 걸쳐 항일의병이 일어나 나라가 참으로 어수선하였다. 


그리고 을미사변으로 말미암아 고종은 자신과 왕실의 안위에 대한 불안을 느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을 진압하기 위하여 친위대가 지방으로 내려간 사이에 친러파인 이범진·이완용 등이 고종과 세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가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는데, 이로써 앞날은 너무나 혼미하였다. 이때가 1896년(高宗 33년) 2월이었다. 


국내의 사정이 이러한 상황에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 세계 열강들이 우리나라에 진출하여 이권을 챙기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로써 민중들 사이에 반외세의 소리가 높았다. 이러한 가운데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고당은 나날이 기울어져가는 조국을 걱정하면서 1905년 23세의 늦은 나이에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려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고당은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꾸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마치고, 1910년 4월에 메이지(明治)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하여 학업에 매진하였다. 이는 법학을 통한 조직적이고 섬세한 리더십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꿈을 키워가고 있었는데,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강압에 의하여 대한제국을 자국에 병탄하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고당의 머릿속은 ‘어떻게 하면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을 수 있을까’로 채워졌다. 이 무렵에 김성수·송진우·장덕수·신익희·김병로 등과 교유하면서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아야 한다는 뜻을 굳혀나갔다.


교육구국(敎育救國)의 길에 들다


1913년 3월, 메이지대학 전문부를 졸업하고 귀국한 고당은 ‘경술국치의 설욕’을 다짐하면서, 조국을 위한 길을 찾고 있었다. 


이때 뒷날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게 되는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민족교육의 요람인 오산학교(五山學校)의 부름을 받았다. 1913년 4월, 고당은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해서 지리·역사·영어를 가르치면서 교육구국(敎育救國)의 길에 들어섰다. 2년이 지난 1915년 5월에는 교장에 취임하여 밤낮 없이 학생들과 함께 지내면서 학생지도에 온힘을 쏟았다. 


이때 고당은 학생들에게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고, 앞장서서 스스로 실천하였다. 이것이 뒷날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獎勵會)의 창립으로 이어졌다. 고당은 국산품 애용이 곧 애국이라는 생각이었다. 개인이든 나라이든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면 남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러한 물산장려운동을 지켜본 사람들은 고당을 가리켜 ‘조선의 간디’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고 한다. 아마도 고당이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여 국산품을 애용하고 소비절약을 통한 경제적 자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비폭력·무저항·불복종운동으로 잃어버린 조국을 찾는 길에 앞장서서 살아가는 모습이 인도의 민족운동지도자 마하트마 간디(Mahatma K. Gandhi 1869~1948)의 삶과 닮았다는 데에 연유한 것으로 짐작된다.


고당의 교육열은 오산학교를 놀랍게 변화시켜나갔다. 그러나 그의 교육열은 이에 머물지 않았다. 1922년 11월, 고당은 한규설·이상재·김성수 등과 조선민립대학(朝鮮民立大學) 기성회를 조직하고, 대학 설립의 기초를 다져나갔다. 이는 최고학부를 설립하여 나라를 이끌어갈 유능한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터잡고 있었다. 


이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민립대학의 설립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 “한민족 1,000만 명이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1천만 원을 목표로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민립대학 설립 계획은 일제의 압력과 자금난으로 그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말았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그러나 고당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8·15 광복 후 38선을 경계로 북쪽에 소련군이, 남쪽에 미군이 각각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하면서 더욱 빛을 발하였다. 1945년 12월 28일, 미국·영국·소련 3국의 외무장관이 참석한 모스크바삼상회의(Moscow三相會議)에서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을 제안하고, 남과 북에서는 찬탁과 반탁의 대립을 낳게 되었다. 이때 고당은 북한 동포를 위해서 북한에 머물면서 소련군정과 갈등을 빚었는데, 6·25전쟁을 일으킨 공산당에 의하여 최후를 맞고 말았다. 


고당은 일제강점기에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광복 후에는 통일된 대한민국의 건설을 위해서 온힘을 쏟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50년 10월 18일 영면의 길에 들었다.  


필자권용우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ㆍ법과대학장ㆍ산업노사대학원장ㆍ행정법무대학원장ㆍ부총장ㆍ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正心法學) 포럼 대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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