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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더 생각하는 역사 [2022/10] ‘임정의 아들’ 김자동 선생을 떠나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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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불요불굴 독립의지 평생에 새긴 임정의 산증인


민족의 평화통일 염원한 높은 기상 되새기다


글 | 김학준(단국대학교 석좌교수) 


‘임정의 아들’로 불리던 임정의 산증인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김자동 선생은 할아버지와 부모의 항일운동 정신, 특히 어머니의 불요불굴의 독립의지를 늘 기억하며 살았다. 행여 자신이 ‘타락’하지 않을까 경계하는 마음으로 정·관계는 멀리하면서 언론계에 몸을 담고 ‘통일정부’의 수립을 지향하는 논설들을 발표했다. 5·16군사정변 이후 군사정부로부터 요직 제의가 있었지만 그러한 뜻을 지키며 거절했다.  

거족적 독립운동이었던 3·1운동의 산물로 중국 상하이에서 1919년 4월 11일에 출범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일제패망으로부터 3개월 뒤인 1945년 11월에 귀국할 때까지 26년 7개월에 걸쳐 얼마나 어려운 길을 걸었던가에 대해서는 우리 국민이 잘 기억하고 있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주석과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부주석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글자 그대로 풍찬노숙 속에 가시밭길을 걸으면서도 임정을 유지하기 위해 진력한 사실은 사료에서도, 저술에서도, 그리고 요인들의 회고록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 우리에게 그러한 애국지사들이 있었고 또 그들이 끝까지 임정의 간판을 떠받들고 있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격스럽다.

최근에 출판된 윤대원(尹大遠) 교수의 『제국의 암살자들: 김구 암살공작의 전말』(태학사, 2022)은 임정을 파괴하기 위해 일제가 벌였던 공작을 다시 일깨워준다. 이 책은 일제가 백범을 암살하기 위해 세 차례나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음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임정이 직면했던 역경이 얼마나 컸던가를 새삼 깨닫게 하고, 그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웠던 임정 중심의 노(老) 애국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더욱 높여준다. 

이러한 배경에서, 임정의 참모습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후대에 회상해준 애국지사가 최근 별세했다는 보도는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한다. 임정 요인 부부의 아들로 1929년에 임정 청사에서 태어났고 백범,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그리고 성재(省齋) 이시영(李始榮) 선생들의 품에서 자라 ‘임정의 아들’로 불리던 임정의 산증인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김자동(金滋東) 선생이 바로 그분이다. 

‘임정의 살림꾼’으로 활약한 정정화 여사
광복 후 큰 시련 겪으면서도 기개 높아

김 선생은 대한제국의 대신이었지만 항일비밀결사조직인 ‘조선민족대동단’ 총재로 활동하다가 임정에 참여한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선생의 손자이면서, 역시 임정에서 활동한 김의한(金毅漢) 선생과 정정화(鄭靖和) 여사 사이의 아들이다. 김가진 선생의 항일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장명국(張明國) 내일신문사 사장이 출판한 『대동단총재 김가진』(석탑, 2021)이 자세히 밝히고 있기에, 여기서 부연하지 않기로 하겠다. 

그렇지만 정정화 여사에 대해서는 다시 말하고 싶다. 정 여사의 회고록 『녹두꽃: 여자 독립군 정정화의 낮은 목소리』(미완출판사, 1987)와 『장강일기: 양자강 푸른 물결 위에 실린 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학민사, 1998)가 준 감동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이 회고록에 자세히 나타났듯, 정 여사는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고국을 몇 차례 왕래하는 위험을 성심성의껏 감당했으며, 그래서 백범으로부터도 ‘임정의 살림꾼’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독립투사로서 조국해방의 감격을 안고 귀국한 정 여사는 훗날 대한민국 정부 아래 여러 형태의 고초를 겪었다. 

일제패망에 뒤따른 남북분단 상황에서 남편과 함께 ‘통일정부’ 수립을 지향한 백범노선을 지지해 대한민국정부 수립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 ‘반(反)정부 인사’로 보이게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6·25전쟁은 우리 민족 다수에게 그러했지만 정 여사에게도 큰 상처를 남겼다. 

남편의 납북에 따라 이산가족이 되었고, 이후 남편이 보냈다는 북(北)의 사람을 정부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연락을 취했다는 혐의로 감옥살이를 겪어야 했다. 이후 살림은 여전히 넉넉하지 못했다. 정 여사에게는 큰 시련이었으나 ‘독립운동의 여장부’로 기개가 높았던 여사는 잘 이겨내면서 향년 91세의 수를 누렸다.

군사정부 요직 제의 거절하며
‘통일정부’ 수립의 뜻 이어가

김자동 선생은 할아버지와 부모의 항일운동 정신, 특히 어머니의 불요불굴의 독립의지를 늘 기억하며 살았다. 행여 자신이 ‘타락’하지 않을까 경계하는 마음으로 정·관계는 멀리하면서 언론계에 몸을 담고 ‘통일정부’의 수립을 지향하는 논설들을 발표했다. 5·16군사정변 이후 군사정부로부터 요직 제의가 있었지만 그러한 뜻을 지키며 거절했다.

『상하이 일기: 임정의 품 안에서』(두꺼비, 2012)와 『임시정부의 품속에서』(푸른역사, 2014), 그리고 『영원한 임시정부 소년: 김자동 회고록』(푸른역사, 2018)과 같은 자신의 회고록을 펴내 후배들에게 임정의 정신과 역사를 가르치며 생활하다가 75세가 된 2004년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운동을 주동했고, 그것은 마침내 열매를 맺어 2022년 3월 1일에 국가기관으로 설립됐다. 생전에 기념관 건립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큰 보람이었을 것이다. 그사이 아버지는 건국훈장독립장을, 어머니는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2006년에 ‘재북애국지사후손성묘단’을 조직해 평양을 방문하고 아버지가 묻혀있는 재북인사묘역을 참배할 수 있었다.

선생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불의를 미워하고 정의를 사랑하는 열정이 가득 차 있었다. 또 분단된 조국이 하나가 되기를 기원하며 살았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필자는 선생의 글을 접할 때마다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끼곤 했다. 이제 선생은 떠났으나 선생의 그 높은 뜻이 앞으로 실현되기를 기원한다.  

필자 김학준 
1943년 중국 심양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켄트주립대와 피츠버그대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단국대학교 이사장, 인천대학교 총장, 동아일보사 사장·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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