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2/10] 함남 정평의 만세시위 ❷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을 때 일어난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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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선언서 한 장에서 시작되어 4천 명 시위로 이어지다
“우리 모두 만세 부르면 독립할 수 있어요”
글 | 이정은(3·1운동기념사업회장)
1919년 3월 7일 정평 부내면에서 독립만세 시위의 첫 봉화가 오른 후 3월 11, 13일 인근 주이면 시위로 번졌다. 이 시위가 3월 13일 그 아래 춘류면 4,000명 시위로 이어졌다. 다음 날인 3월 14일 주재소를 습격한 만세시위로 5명이 사망한 선덕면 만세시위, 3월 15일 장원면 초원시장 시위, 3월 16~20일에 걸친 고산 면민들의 면사무소 접수 및 면장을 앞세운 헌병 주재소 시위를 거쳐 4월 6일 문화면 시위에 이르기까지 정평군에서 일어난 모든 만세시위가 3월 2일 독립선언서가 전달되면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세시위를 조직하고 참여하여 이루어진 일이다.
1919년 3월 2일 함경남도 정평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을 때 평안도나 함경도의 다른 지방처럼 천도교 또는 기독교 같은 종교단체나 학생층이 주도적으로 나선 것이 아니었다.
선언서를 받아 읽고 감동한 사람이 나서 주변 주민들을 끌어모으고, 태극기 100여 개를 만들어 3월 7일 읍내 장날에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여기에 주민들, 시장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주변 사람들을 참여시키면서 만세시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방식으로 3월 둘째 주에는 춘류면에서 4천 명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정평의 만세시위는 식민지 지배 하에서 독립선언서 한 장으로 각성된 개개인이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전국적인 모델이다.
3월 11, 13일 주이면 시위
3월 15일 장원면 시위
초원시장(草原市場)은 정평군 서남부 장원면(長原面) 교항리(橋項里)에 있는 오일장으로, 매월 음력 4, 9일에 열렸다. 3월 2일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이래 3월 7, 8일 정평 읍내면에서부터 만세시위의 불길이 일어나 주변으로 크게 번지자 박형인(朴亨寅, 27세, 농업)과 조문환(趙文煥, 24세, 농업)은 “우리 장원면에서도 독립만세 시위를 벌입시다”라고 하며 흰 옷베로 만든 태극기 2개, 종이 태극기 25개를 만들었다.
3월 15일 조문환은 교항리 채동식 집에서 채동식과 전창렬을 주도자로 참여시켰다. 이들은 초원시장으로 나아갔다. 박형인, 조문환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시장 군중들에게 나누어주며 독립만세를 이끌었다. 시장에는 천도교인, 야소교인 등 370명도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초원 헌병주재소 헌병들이 출동했다. 헌병들이 조문환을 체포하여 끌고 가려 하자 조문환은 손에 들고 있던 태극기를 군중에게 던지며 외쳤다.
“독립만세를 불러요!”
군중들이 소리 높혀 독립만세를 불렀다.
상흥리의 정명원도 마을 주민 약 40명을 이끌고 초원시장에 와서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헌병들의 탄압으로 군중들은 해산하고 4명이 체포되어 구금을 당했다.
3월 16~20일 고산면 시위

“각지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독립시위운동을 하고 있소. 우리도 해야 하오!”
김기룡도 찬성했다.
“합시다. 우리 모두 만세를 부르면 독립을 할 수 있다더군요.”
“그럽시다!”
김두환도 동의했다.
3월 16일 최병헌, 김기룡은 고산면민 200여 명을 모이게 하여 이끌고 풍송리 헌병주재소로 나아갔다. 이들은 주재소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음날인 3월 17일에도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헌병들에게 주도 인사 5명이 체포를 당했다. 최병헌은 징역 10월, 김기룡은 징역 8월 형을 받았다.
3월 17일 밤 고산면 신경리에서 이병근 등 마을 주민 약 90명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구창리로 향했다. 유제섭(劉悌燮, 30세)은 구창리에서 시위에 참가한 후 구창리 및 남양리 주민들에게도 시위운동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고, 시위대를 이끌고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구창리 헌병주재소로 나아가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내일도 나오시오!” “그럽시다.”

고산면 신풍리에서는 3월 16일에 이어 3월 17일에도 오전 10시경 흥덕리, 흥봉리 주민 700여 명이 깃발을 들고 북을 치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진택룡, 이학린, 고하원 등은 군중들을 이끌고 고산면사무소로 나아갔다. 이들은 면 사무소로 들이닥쳐 명령했다.
“면사무소 업무를 즉시 중단하시오!”
“면 서기들은 이리들 오라우!”
시위 대원들이 면서기 박계환(朴桂煥), 면회계원 강봉조(姜鳳朝)를 불러 세우고 구타하며 면사무소 문을 닫게 했다. 또한 고산면장 이봉주(李琫胄)에게 명령했다.
“면장은 시위대에 앞장을 서시오. 우리와 함께 풍송리 헌병주재소로 갑시다!”
시위대는 면장을 앞장세워 풍송리 헌병주재소로 가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한편 박영환에게 권유받은 풍서리 서당 훈장 정구갑(鄭龜甲, 27세)은 약 400명의 마을 주민과 독립만세를 외치고 헌병주재소 앞으로 가서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박영환은 군중들에게 ‘손병희 선생이 조선 13도에 조선독립선언서를 반포하여 각지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다. 우리 지방에서도 같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 독립만세운동으로 신풍리 구장 석근보, 풍송리 구장 한진룡이 붙잡혀 태형을 당했다. 이는 구장들이 앞장서서 주민을 동원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진택룡 등 6명과 최병헌과 김기룡, 정구갑은 각각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겪었다.
3월 17일 구창리 헌병주재소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후 약속대로 3월 18일 금진강 뚝에 신경리, 구창리, 남양리, 고양리, 풍양리 등의 천도교도, 야소교도 등 주민 약 700명이 집합했다. 유제섭은 군중들을 고무하며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학생 15명이 깃발을 흔들며 ‘조선건국만세’를 외치고 군중들도 ‘대한독립만세’, ‘만세’ 등을 불렀다. 유제섭은 점차 늘어난 약 1,000명의 군중들을 이끌고 구창리헌병주재소로 나아갔다. 군중들은 만세를 외치며 주재소 주위를 돌았다.

3월 18일 고산면 풍송리 헌병주재소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한 고산면 흥봉리 황명률(黃明律, 58세,농업)은 3월 19일과 3월 20일 이틀에 걸쳐 마을 주민 약 50명과 함께 흥봉리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4월 6일 문화면 시위
4월 6일 함경남도 정평군 문산면 덕화리에서 천도교도, 학생 등이 중심이 된 약 200명의 군중들이 집합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독립만세운동으로 주도 인사 1명이 체포를 당했다.
1919년 3월 7일 정평 부내면에서 독립만세 시위의 첫 봉화가 오른 후 3월 11, 13일 인근 주이면 시위로 번졌다. 이 시위가 3월 13일 그 아래 춘류면 4,000명 시위로 이어졌다. 다음 날인 3월 14일 주재소를 습격한 만세시위로 5명이 사망한 선덕면 만세시위, 3월 15일 장원면 초원시장 시위, 3월 16~20일에 걸친 고산 면민들의 면사무소 접수 및 면장을 앞세운 헌병 주재소 시위를 거쳐 4월 6일 문화면 시위에 이르기까지 정평군에서 일어난 모든 만세시위가 3월 2일 독립선언서가 전달되면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세시위를 조직하고 참여하여 이루어진 일이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3·1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한국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크고도 깊은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