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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2/10] 일제의 치욕에 당당히 맞선 조선의 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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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의 기개 이어 독립투사로 활약한 의기(義妓)


일제 치욕과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의로운 기상과 굳은 절개 떨치다 


글 | 편집부 

일제강점기 창기로 취급받던 기생들은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치욕에 당당히 맞섰다. 진주·수원·해주·통영 등 전국 곳곳에서 기생들이 만세 시위에 나섰다.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었고, 금비녀·금반지 등을 팔아 만든 소복 차림으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기생들은 독립사상을 품은 남성들과의 빈번한 교류 속에서 조선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3·1운동 이후에는 김향화를 이어 현계옥, 정칠성 등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기생들이 다수 출현해 논개의 의로운 기개를 이어갔다. 

본래 조선의 기생은 관기(官妓)로서 나라의 연회를 도맡던 존재였다. 교방(敎坊)을 두고 춤과 노래, 기예나 시, 서화뿐 아니라 행동의 올바름까지 가르쳤다. 하지만 일제는 공창제(公娼制)를 강화하고 기생을 조합 형태로 편성해 식민 지배의 통제 아래에 두었으며, 천한 기생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당시엔 권번에 속해야 기생이 될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교육뿐 아니라 기생들이 요정에 나가는 것을 지휘·감독했다.

일제강점기 창기로 취급받던 기생들은 3·1운동을 기점으로 일제의 치욕에 당당히 맞섰다. 진주·수원·해주·통영 등 전국 곳곳에서 기생들이 만세 시위에 나섰다. 3월 19일 진주 기생독립단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촉석루로 향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수원에서 3월 29일 수원기생조합 소속 기생 3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했고, 4월 1일에는 해주에서 읍내 기생들이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만세 시위에 나섰다. 이튿날인 4월 2일 통영에서도 기생시위가 일어났다. 통영 예기조합 기생들은 금비녀·금반지 등을 팔아 만든 소복을 입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기생들은 독립사상을 품은 남성들과의 빈번한 교류 속에서 조선 청년들에게 독립사상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3·1운동 당시 일제의 치안 책임자 지바 료(千葉了)는 기생들이 “화류계 여자라기보다 독립투사”였다고 회고했다. 기생들의 불온한 행동에 대한 경찰들의 경계가 점점 삼엄해져, 1919년 11월 종로경찰서는 기생들이 술자리에서 불온한 사상을 선전한다는 이유로 경찰서로 소환해 엄포를 놓기도 했다. 

3·1운동 이후 기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었고, 기생들 스스로 집단적인 투쟁을 감행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아울러 김향화를 이어 현계옥, 정칠성 등 사회운동과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기생들도 다수 출현하게 되었다.

대구 달성 출신의 현계옥(玄桂玉, 1897~미상)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17세에 기생이 되었다. 타고난 미모에 풍류가무에 뛰어났으며 당시 소리와 산조, 춤과 가야금에는 그와 대적할 만한 이가 없어 풍류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고 한다.

의열단 유일의 여성 단원 
현계옥(1897~미상)

현계옥은 비록 기녀였지만 구국의 정신을 표명한 여성이었다. 진주 논개와 평양 계월향의 사당이 퇴락했다는 말을 듣고 비녀와 가락지를 팔아 중수했다가 경관에게 잡혀가 고문을 당했다. 이후 현진건의 사촌 형인 현정건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어 독립운동가로 나서게 된다. 상해로 떠난 현정건이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몰래 서울로 잠입했을 때 현계옥은 “나를 애인으로 혹은 한 여자로만 보지 말고 같은 동지로 생각해 달라”며 강인한 독립 의지를 불태웠다.
 
21세에 만주를 거쳐 상해로 떠났지만, 기생 출신이라는 편견으로 인해 독립운동에 제약이 많았다. 음악회 출연 등 공개적인 활동을 하면서 자금을 모으는 일에 앞장섰다. 차츰 진정성을 인정받아 의열단 유일의 여성 단원이 되었다. 의열단장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제조법과 육혈포(탄알을 재는 구멍이 여섯 개 있는 당시 권총) 사격법 등을 배웠고, 만주와 상하이를 오가며 목숨을 건 비밀공작 활동을 수행했다. 외국어에 능통해 영어뿐 아니라 일본어, 중국어까지 유창하게 해 폭탄을 운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제의 검문이 있을 때마다 알지 못하는 서양인 옆으로 가서 말을 걸어 부부가 여행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을 정도로 외국어 실력과 기지가 뛰어났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밀정’에서 배우 한지민이 맡았던 연계순 역할의 모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계옥은 변장술에도 굉장히 능한 인물이었다. 남성으로 위장해 상황을 탈 없이 넘기고 임무를 완수해낸 그녀의 업적이 당시 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1928년 시베리아로 망명한 후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했다. 하지만 그 후 행적은 알 수 없다.

수원 기생 만세시위 주도
김향화 (1897~미상)

김향화(金香花, 1897~미상)는 서울 태생이며 본명은 김순이다. 조선의 기생들을 소개해 놓은 ‘조선미인보감(1918)’에 따르면, 김향화는 검무, 승무, 가사, 시조, 경성잡가, 서관소리, 양금치기 등에 능했다. 서울 출생으로 어린 나이에 결혼했으나 18세에 이혼하고 가족 부양을 위해 기생이 되어 수원기생조합에 소속되었다. 

3·1운동 당시 23세로 조합 기생들의 맏언니 역할을 했던 김향화는 30여 명의 기생들을 이끌고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이끌었다. 이후 3월 29일 기생 30여 명은 검진을 받으러 자혜의원으로 가던 중 수원경찰서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병원에 가서도 검진을 거부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당시 화성행궁 봉수당은 전통의 말살을 명목으로 자혜의원을 세우고 기생들의 성병 검사를 시행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29일 창기 취급하던 일제의 치욕스러운 위생 검사에 부당함과 불쾌함을 느낀 수원 지역의 기생들은 일본 경찰과 수비대가 총칼을 겨누는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기개를 떨쳤다. 

결국 김향화는 만세운동을 벌인 주동자로 체포돼 2개월간 고문을 받았고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9년 10월 27일 가출옥돼 수원으로 돌아온 뒤 행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2009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으며, 수원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여성평등 외친 페미니스트
정칠성(1897~미상)

정칠성(丁七星, 1897년~미상)은 대구 출신으로 유년 시절에 기녀가 되어 ‘금죽(錦竹)’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남도 기생들이 중심이 된 기생학교 한남권번에 있다가 1919년 3·1 만세운동을 계기로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5월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여성운동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해 발기인·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경북 도 단위 사상단체인 사합동맹(四合同盟) 결성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일본 유학 중 동경에서 여자 유학생 단체인 삼월회를 조직했다. 1926년 삼월회 간부로 『조선일보』에 “진정한 신여성은 불합리한 환경을 모두 거부하고 강렬한 계급의식을 지닌 무산여성”이라는 요지의 글을 실었다. “단순한 자유를 넘어서 남성과 가정, 가족으로부터 독립하지 않는 한 여성의 권리를 찾는 것은 요원한 일”, “성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연애도 결혼도 모두 평등한 여성으로서의 인권을 보장받을 수 없다” 등을 외친 그는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이기도 했다.
 
귀국 후 1927년에는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결성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이어 1928년 임시전국대회자격심사위원, 1929년 제2회 전국대회준비위원회 의안부 책임자와 중앙집행위원장을 지냈다. 이때 전국을 순회하며 여성의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강연을 했고, 일본 경찰에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소위 ‘조선공산당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 중앙상임위원 겸 조직부 차장으로 활약하다가 월북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1958년 국내파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을 제거할 때 숙청되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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