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스크랩 [2022/11] 11월과 관련된 순국선열의 작은 역사, 소중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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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체결 후 국내외에서 목숨 건 항일투쟁 확산
식민지국가 중 독립을 보장받은 유일한 나라
글 | 장세윤(월간 순국 편집위원)
1943년 11월 말의 카이로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후 한국의 진로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열강 수뇌들의 모임이었다. 미·영·중 3국 정상이 참가한 결과, 1943년 12월 1일 공식발표된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문제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일본은 또한 폭력과 탐욕으로 탈취한 모든 지역에서 축출될 것이다. 앞의 세 열강은 한국인들이 노예상태에 있음을 유의하여 적절한 절차에 따라(혹은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자유롭게 독립시킬 것을 결의한다.” (카이로선언의 한국어 번역문은 미주 한인 발행 신문 『신한민보 별보』 1943년 12월 2일자에 최초 게재). 미·영·중 세 열강이 한국인들이 “노예상태”에 있다고 지적한 부분이 매우 주목된다. 이 선언 당시 100여 개의 약소민족이 식민지나 반(半)식민지 상태에 있었지만, 열강들에게 이처럼 독립을 보장받은 민족은 한국이 유일하였다. 이 선언은 1945년 7월 26일의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에도 계승되었다. 때문에 일찍이 인도의 독립영웅이자 유명한 정치가인 자와하랄 네루(JaWaharlal Nehru)는 그의 저서 『세계사편력((Glimpses of World History)』에서 아시아 식민지국가 가운데 열강들에게서 독립을 보장받은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라며 부러워하였다. 이처럼 우리민족의 독립을 가능케 해준 순국선열들의 독립운동과 희생을 길이 기억·기념, 이야기하는 한편, 열강의 도움과 그 의도를 정확히 알고 미래에 대비토록 하자!
광주학생독립운동 전개
최근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 역사관’의 조사에 따르면 광주학생독립운동에는 국내외에서 모두 320개 학교가 참가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 가운데 남한지역 학교가 171개, 북한지역 학교가 117개, 간도(현재 중국 연변)지역에서 32개 학교가 참가한 것으로 파악되었다(광주광역시 교육청,「광주학생독립운동 참가학교 명단」). 종래에는 조선총독부측의 집계에 근거하여 이 기간에 194개 학교(초등 54, 중등 136, 전문학교 4개)의 54,000여 명 학생이 참여했다고 파악했다(조선총독부 경무국,『조선의 치안상황』1930, 74~75쪽).
채응언 의병장, 평양형무소에서 순국
1908년 봄부터 황해도·평안도·강원도·함경도 일대에서 의병부대를 이끌고 1915년까지 끈질기게 항일투쟁을 지속한 최후의 의병장 채응언(蔡應彦, 1883~1915)이 평양형무소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그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도 강원도 이천, 함경남도 안변, 평안남도 성천, 황해도 곡산 등 한반도 중북부 일대에서 항일전을 벌였다. 이에 일본군 평양헌병대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 대대적 탄압작전을 전개하였다. 결국 1915년 7월 5일 평안남도 성천군 처인리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일본군 성천분대 헌병과 싸우다가 잡히고 말았다. 평양으로 이송되어 평양감옥에 투옥되었다. 9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살인·강도죄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에 불복해 상고했지만, 10월 28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이 해 11월 4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중국동북 길림에서 의열단 결성

처음에는 황상규가 지도자인 의백(義伯)으로 추대되었다. 명칭은 공약(강령) 제1조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에서 ‘정의’의 ‘의(義)’와 ‘맹렬’의 ‘열(烈)’을 따온 것이었다. 암살 대상으로 정한 이른바 칠가살(七可殺)은 다음과 같다. ①조선총독 및 조선총독부 고관 ②일본 군부 수뇌 ③대만 총독 ④매국적 ⑤친일파 거두 ⑥적의 밀정 ⑦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臣). 다음은 파괴 대상으로 ①조선총독부 ②동양척식회사 ③매일신보사 ④각 경찰서 ⑤기타 왜적 주요 기관 등이었다. 이들은 본거지를 중국 동북(만주)에서 상해(上海)·남경(南京) 등지로 옮겨다니면서 국내의 일제 경찰서 폭파, 일제 요인 및 친일 주구배 처단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지속하였다(김영범,『의열투쟁 1-1920년대』, 독립기념관, 2009).
일본,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 강요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초 태프트-가쓰라(桂)각서(밀약), 제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강화조약 등의 체결로 미국·영국·러시아 등 여러 나라로부터 한국에서의 특수 이익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에 대한제국을 먼저 외교권이 없는 ‘보호국’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특히 포츠머스강화회담의 대표였던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가 귀국하여 제출한 ‘만한(滿韓)경영강령’이란 의견서를 토대로 1905년 10월 27일 내각회의에서 보호조약의 원안을 작성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추밀원(樞密院)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한국에 파견하고 조약 체결을 11월 초순으로 정했다.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 히로부미는 다음날 고종황제를 알현하여 일본 천황의 친서를 정하고, 15일에 다시 알현하여 조약의 원문을 제시하고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17일 이토는 주한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함께 일본군대를 거느리고 궁궐에 들어가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보호조약안을 승인토록 강요하였다. 결국 11월 18일 새벽 2시에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등 소위 ‘을사5적’을 찬성으로 이끌어 5개조의 조약을 성립시켰다(이광린, 『한국사강좌』 5, 일조각, 1983, 485~486쪽). 이를 보통 ‘한일신협약’, 또는 ‘을사보호조약(과거)’으로 불렀으나, 최근에는 ‘을사(5)조약’ 또는 ‘을사늑약(乙巳勒約)’ 등으로 부른다. 이 조약은 여러 부분에서 문제가 많은 불법부당의 무효조약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순국선열의 날
한국인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1905년 11월 23일 공식적으로 을사5조약을 공포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 서울에 있던 각국 공사관에 철수를 요구했다. 또 서울에 한국통감부를 설치하고 대한제국의 내정을 간섭하였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들이 대거 봉기하였다.
윤봉길 의거 이후 1932년 5월 상해(上海)를 떠나 중국 여러 지역을 옮겨다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9년에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1월 17일 을사늑약 강제체결일을 ‘순국선열의 날’로 지정했다. 1939년 11월 21일, 임시의정원 제31회 임시총회에서 지청천(池靑天)·차리석(車利錫) 등 6인 의원의 제안으로 11월 17일을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순국선열공동기념일’로 제정했다. 이후 임시정부는 매년 이날 순국선열 추모행사를 개최하고, 굳은 독립의지를 되새기며 조국광복을 다짐하곤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5월 9일에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면서 정부기념일로 복원했다. 이 해 11월 17일부터 정부 주관 행사로 진행, 기념하고 있다. 국권회복과 자유·정의·평등의 가치 실현을 위해 헌신한 순국선열의 독립정신과 희생을 후세에 전하고, 선열의 얼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제정한 법정기념일이다. 우리 모두 이 날을 잊지말고 꼭 기억하도록 하자!
이회영 뤼순감옥에서 순국
일제강점기 신민회 중앙위원, 항일구국연맹 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이회영(李會榮) 선생이 1932년 11월 17일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하였다.그는 중국 상해(上海), 북경(北京) 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는데,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1931년 9월 일본군의 침략으로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 남부에서 조직된 항일구국연맹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1932년 11월 만주지역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을 조직하는 한편, 일본군사령관 처단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중국 요동반도의 대련(大連)으로 갔다. 그러나 따렌의 일본 수상(水上)경찰서에 잡혀 뤼순 감옥에 수감중 악독한 고문을 받다가 옥사하였다. 형 이건영·이석영·이철영, 아우 이시영·이호영 등 6형제의 전 재산 처분 중국 동북(만주) 망명과 독립운동은 매우 유명하다.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논설 게재

「시일야방성대곡」의 주요 부분을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전략)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하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 밖에 5조건(을사5조약)이 어찌하여 스스로 제출되었는가. 이 조건(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하는 조짐을 빚어낼 것인즉, 이등(伊藤, 이토 히로부미) 후작(侯爵)의 원래 본뜻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고종 황제) 폐하의 강경하신 성의(聖意)로 거절함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이 조약이 성립하지 않은 것은 이등(伊藤) 후작이 스스로도 잘 알고 스스로 파기할 바이어늘, 슬프도다. 저 개돼지만도 못한 소위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은영달과 이익이나 바라면서 거짓 위협에 크게 겁을 먹어 머뭇대며 죽기를 두려워하면서, 나라를 팔아먹는 도적이 되기를 감수하여 4천년 강토와 5백년의 종사(宗社,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生靈, 살아있는 영혼, 백성)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가 되게 하였으니, 저들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족히 깊이 꾸짖을 것도 없거니와, 명색이 참정(參政)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규(首揆, 으뜸가는 벼슬아치, 재상)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반대함으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이나 남길거리를 꾀하려 했던가. (중략)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래 4천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독립협회, 독립문 건립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서재필·이상재·남궁억 등의 주도로 서울에서 조직된 사회·정치단체였다. 1896년 7월부터 1898년 12월에 걸쳐 열강의 국권 침탈과 조선 지배층 다수의 민권 유린이 자행되는 상황 속에서, 자주국권·자유민권·자강개혁사상을 내세우며 나름의 민주주의·근대화 민족운동을 전개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간 단체였다. 독립협회는 국민의 자주독립 의식과 애국심을 드높이기 위해 영은문(迎恩門)을 철거한 자리에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독립문을 세웠다. 독립문 기공식은 1896년 11월 21일 태극기가 여러 군데 내걸리고, 독립협회 회원·시민·정부 고관·각국 외교사절·학생 등 수천 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제1진 귀국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한 뒤 임시정부 요인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학수고대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귀국은 뜻대로 쉽게 이룰 수 없었다. 김구·김규식·이시영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은 1945년 11월 5일 장제스(蔣介石) 중국 국민정부가 내준 비행기를 타고 5시간 만에 충칭(重慶)에서 상해로 돌아왔다. 당초에 국내 귀환을 위해 미국이 보내주기로 한 비행기는 상해에 머문 지 18일 만인 11월 23일에야 도착했다. 이날 김구 등 1진 15명은 미군 C-47 중형 수송기편으로 3시간 만에 김포공항에 도착, 환국하였다. 한편, 신익희 등이 탑승한 2진은 1주일 후 전라북도 옥구비행장을 통해 귀국했다. 국내에는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지만, 미군정 측은 이를 알리지 않아 공항에는 환영객이 아무도 없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자격으로 돌아와야 했다.
남만주 통합 독립운동 조직
정의부 창립
1924년 10월 18일 중국동북 길림성(吉林省)의 중심도시 길림(吉林)에서 전만통일의회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 발기회가 개최되었다. 그 뒤 대한통의부·군정서(軍政署)·광정단(匡正團)·의우단(義友團)·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노동친목회·변론자치회·고본계(固本契) 등의 각 대표들이 길림성 유하현(柳河縣)에서 모여 통합회의를 개최한 결과, 같은 해 11월 24일 독립운동연합체인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었다. 이후 정의부는 남만주지역 수십만 한인 교민들을 기반으로 하여 교민자치·군사·교육·재정·한인 생계도모 등 각 분야와 국내진입작전 등 항일무장투쟁 독립운동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20년대 후반 민족유일당운동과 3부(정의부·참의부·신민부) 통합운동 결과 1928~29년 혁신의회와 한족총연합회, 국민부(國民府)로 통합되었다(채영국, 『한민족의 만주 독립운동과 정의부』, 국학자료원, 2011).
미·영·중 3국 카이로선언,
한국 독립 약속

이러한 상황에서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 한국광복군 사령관 이청천 등은 1943년 7월 26일 중국정부의 임시수도 충칭(重慶)에서 장졔스를 만났다. 김구와 조소앙은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임시정부측의 요구를 지지하여 이를 관철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장제스는 중국이 한국 측의 완전 독립을 지지·관철시키기 위해 미국과 영국이 국제공관(國際共管, 신탁통치)을 주장하는 것에 맞서 대항할 것이라고 약속했다(「總裁接見韓國領袖談話紀要」,『백범김구전집』, 김구전집편찬위원회, 대한매일신보사, 1999).
한국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의 이러한 방침은 1943년 11월에 개최된 카이로(Cairo) 회담에서 일단 성과를 거두었다. 미국과 영국, 중국의 수뇌들이 회합한 이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실현시키는 것으로 합의되었던 것이다. 이 회담에서 영국 처칠 수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제스가 적극 주장하여 한국독립에 관한 구체적 언급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물론 이를 과장된 것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으나,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한 장제스 총통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카이로선언은 1945년 7월 26일의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에도 계승되었다.
민영환 자결 순국
대한제국 황실의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이 1905년 11월 30일 자결, 순국하였다. 그는 1905년 11월 일본 정부가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외교권을 박탈하자, 원임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 등과 함께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 파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의 비답이 있기도 전에 일본 헌병에 의해 조병세가 구금되고 함께 상소를 올린 관리들이 해산당하자, 다시 두 차례나 상소를 올리고 궁중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후 일제의 협박으로 왕명 거역죄로 구속되어 평리원(平理院: 재판소)에 가서 대죄한 뒤 풀려났다. 결국 국운이 이미 기울었음을 깨닫고 죽음으로 항거하여 황제와 국민을 각성케 할 것을 결심하고 자택에서 자결하고 말았다. 그는 세 통의 유서를 남겼다. 한 통은 국민들의 각성을 요망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 통은 재경 외국사절들이 일본의 침략을 바로 보고 한국을 구해줄 것을 바라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한 통은 황제에게 올리는 글이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민영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