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2/11] 이름 없는 투사들, 무명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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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잊힌 독립운동사의 주역들
조국 해방에 뛰어든 ‘무명의 헌신’
이름 없이 스러져간 젊은 넋들이여
글 | 편집부 참고자료 | 『독립운동열전2』(임경석 지음, 푸른역사 펴냄)
독립운동사는 정의에 헌신했으되 역사에서 잊힌, 이름 없는 투사들로 가득 차 있다. 수십만, 수백만 민중이 조국의 해방을 위해 기꺼이 헌신했다. 하지만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몫이 되어 후손이 없는 경우에는 소리 없이 잊혀갔다. 학계에선 독립운동가 약 15만 명 가운데 입증자료가 부족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을 2만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대의에 헌신했던 이름 없는 민중의 헌신을 기억하고 독립운동사의 주역으로 바로 세우는 일이 절실하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잊히겠죠? 미안합니다.”
영화 ‘암살’에서 김원봉(조승우 분)은 독립을 위해 싸우다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이들을 기리며 쓸쓸한 목소리로 읊조린다. 영화 속 대사처럼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누군가는 평생을, 또 누군가는 목숨을 바쳤다.
독립운동가는 물론 독립운동가 가족의 삶도 처참했다. 홍범도의 부인 이씨는 남편에게 투항을 권하는 편지를 쓰라는 일본 경찰의 귀순 공작을 거부하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었다. 혁명에 몸 바친 김사국, 김사민 두 아들을 잃은 어머니는 탁발로 만년을 보냈다. 독립운동가를 도운 무수한 선의(善意)들 역시 일제의 총칼에 짓밟혔다. 그리고 너무 많은 독립운동가의 이름이 역사에서 잊혔다.
1923년 1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 의거’ 후 경찰들은 분노와 복수심에 휩싸여 김상옥에게 숙식과 활동의 편의를 제공한 사람들까지 대거 체포해 심각한 폭행과 가혹 행위를 했다. 연락과 통신의 편의를 제공한 여관업자 이수영(37)과 승려 이종옥(40), 지방 도시 원산에서 숙소를 제공해준 주광보(19)가 이에 속했다. 효제동 은신처를 제공한 이태성(63) 집안의 경우에는 일가족 6명이 모두 고초를 겪었다. 이 집은 딸 부잣집이었다. 아내 고성녀(61)와 맏딸 이혜수(28)를 비롯한 네 명의 딸들이 경찰 문초를 당했다. 미혼이었던 이혜수는 얼마나 참혹한 고문을 당했는지 혼수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사건 발생 11개월이 지난 뒤에 열린 재판 때까지도 회복되지 못했다. 그는 병상에 누운 채로 재판정에 출정해야만 했고, 침대에 누워서 신음하는 소리로 가족의 입을 거쳐 겨우 문답에 응할 수 있었다.

광주학생운동 지도자
장재성(1908~1950)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지도자로 손꼽히는 장재성(張載性, 1908~1950)은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해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감옥에서 총살당했다.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1962년 해방 후 처음 시행하는 독립유공자 대상자로 지정되었지만 ‘공산당에 관련된 혐의’로 인해 서훈이 취소됐다. 죽음도 사후도 불운했던 독립운동가가 어디 한둘이겠는가.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장재성은 1926년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 16명을 모아 ‘성진회(醒進會)’라는 비밀결사 모임을 조직했다. 이후 광주고보를 졸업하고 도쿄 주오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929년 6월 귀국한 후 본격적으로 비밀결사 운동에 뛰어들었다. 광주 지역 비밀 단체들을 규합해 학교별 독서회를 지휘하는 ‘독서회중앙부’를 결성하고 책임비서직에 올랐다. 장재성은 활동 영역을 비밀결사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1929년 광주 출신의 국내외 유학생들을 규합해 ‘광주유학생회’를 조직하고 간부로 활동했으며 소비조합 운동도 펼쳤다.
장재성은 광주 학생들의 11월 3일 첫 시위, 11월 12일 2차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체포됐다. 1930년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고, 이듬해 상급심에서 4년 형이 내려졌다. 동료 피고인들 가운데 가장 무거운 형이었다. 1934년 만기 출옥한 뒤에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1937~1940년 반일 시국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3년을 복역했다. 해방 후 1949년 남로당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돼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았다.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인민군이 빠르게 남하하는 정세 속에서 다른 정치범 수감자들과 함께 총살되고 말았다.
조선 학생 연합시위 주모자
장석천(1903~1935)
1929년 12월 3일 경성 시내에서 ‘조선 학생 청년 대중아 궐기하라’는 제목의 전단 포함 6종의 등사판 유인물이 발견됐다. 장석천(張錫天, 1903~1935)은 주모자로 지목되어 경찰의 추적을 받다가 격문 살포 사건이 발발한 지 사흘 만에 10여 명의 동료와 함께 붙잡히고 말았다. 그날 밤부터 종로경찰서에서 시작된 취조는 이듬해 1월 5일까지 한 달간 계속됐다. 취조실에 갇혀 있던 장석천은 몰래 예리한 단도를 지니고 있다가 발각됐다. 그가 얼마나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였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격문 살포 사건의 의의는 컸다. 당시 경성의 학생운동은 국내 문제에 국한되어 있었다. 광주학생운동이 1929년 11월 3일과 11월 12일 두 차례에 걸쳐 시위 형태로 폭발했는데도 그랬다. 식민지 통치 당국은 이 폭발의 재연과 확산을 막고자 총력을 기울였다. 이때 장석천이 나섰다. 11월 17일 긴급 상경한 그는 식민지 수도 경성에서 학생들의 연합시위를 이끌고자 고군분투했다. 마침내 12월 3일 격문 2만 매 살포 사건이 터졌고, 그것이 징검다리가 되어 학교 울타리 안에 갇혀 있던 학생운동은 대규모 독립운동으로 발전했다. 전국 194개 학교에서 5만 4,000여 명의 학생이 가두시위, 동맹파업, 격문 살포 등의 행태로 행동에 나섰다. 그로 인해 1,462명이 검거됐고 2,330명이 무기정학을, 582명이 퇴학 처분을 받았다.
장석천은 광주학생운동을 전 조선 학생운동으로 전환한 지도자였으며, 학생운동 현장에서 노동운동 현장으로 이전해간 지식계급 출신의 전형적인 혁명가였다. 1931년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적색노동조합운동 현장으로 달려갔다. 노동조합 조직 계획을 추진하던 그는 경찰에 적발되어 경성지법에서 2년 형을 선고받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중병에 걸려 보석으로 출옥했지만, 1935년 10월 18일 숨을 거두었다. 앞날이 창창한 33세의 청년이었다.
천황 암살의 모의자
김중한(1902~1934)

스탈린 집정 시기 소련 국가폭력의 희생자들 가운데 ‘유동식’이라는 조선 사람이 있다. 일본의 정치적 박해를 피해 소련으로 이주한 지 5년째 되는 망명자였다. 그는 1933년 5월 14일 체포되어 1년간이나 엄중한 취조를 받다가 1934년 총살당했다. 향년 33세였다.
그의 혐의는 ‘일본제국주의의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데 있었다. 소련 정부나 코민테른의 허락을 받지 않고 국경을 넘어서 일본제국 영토의 일부분인 조선으로 오갔으며, 신원이 불확실한 사람들을 안내해 불법적인 월경을 방조한 혐의를 받았다. 조선, 소련, 중국 국경지대에 직업을 구해 장기간 체재한 사실도 문제였다.
그런데 유동식의 본명이 뒤늦게 밝혀졌다. 놀랍게도 김중한(金重漢, 1902~1934)이었다. 세칭 ‘박열 사건의 공범’으로 지목된 아나키스트, 1923년 도쿄 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의 소용돌이 속에서 천지를 뒤흔들었던 천황 암살 모의 사건의 연루자였다. 김중한은 천황 암살을 음모한 박열로부터 폭탄 구입을 요청받고 노력했다는 혐의로 일본 사법부의 재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