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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시론 [2023/01] 추강 김지섭 일왕 궁성을 겨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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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왕실과 정부 권위 추락시킨 통쾌한 사건


“다시 고향 돌아갈 길 묻지 않는다”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추강은 경관을 향하여 폭탄 한 발을 힘껏 던지고, 니주바시 건너편 궁성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폭탄 두 발을 모두 던졌다. 추강이 던진 폭탄 3발이 모두 불발이었다. 이를 어찌하랴! 습기가 많은 화물선을 타고 오는 여러 날 폭탄의 화약이 모두 젖은 탓이었다. 폭탄투척사건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지만, 일본의 왕실과 정부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통쾌한 사건이었다. 일왕이 거주하는 궁성에 조선 사람이 폭탄을 던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1924년 1월 5일, 추강(秋岡) 김지섭(金祉燮)이 일왕(日王)이 거주하는 궁성을 향하여 폭탄을 던진 날이다. 오후 7시 20분경 추강은 양복 주머니에 폭탄 3개를 숨기고, 니주바시(二重橋) 부근에 도착하였다. 


1923년 12월 20일, 추강은 일본 도쿄(東京)로 가기 위하여 화물선 덴조산마루(天城山丸)로 상해(上海)를 떠났다. 이때 배 안에서 읊은 시(詩)가 필자의 가슴을 적신다. 


“표연히 이 한 몸 만리(萬里) 길 떠날 때 / 배 안에 모두 원수이니 뉘라서 벗할 것인가 / 기구한 세상 앞길 촉(蜀) 나라보다 험난하고 / 분통한 겨레 마음 진(秦) 나라인들 더할 소냐 / 오늘 몸 숨기고 바다 건너는 사람 / 지난 몇 해를 와신상담한 사람인가 / 이미 정한 이 걸음 평생의 뜻이기에 / 다시 고향 돌아갈 길 묻지 않는다.”


이때 추강은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자기 한 몸을 바치기로 결심을 굳혔다. 참으로 당당한 결심이었다. 추강은 화물선 덴조산마루를 타고 긴 여정을 거쳐, 12월 30일 늦은 밤 일본 후쿠오카(福岡)에 도착하여 그의 평생의 꿈이 성공하기를 빌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자기를 이곳까지 무사히 올 수 있게 도움을 준 의열단 동지 윤자영(尹滋英)을 떠올렸다. 


이날 밤, 추강의 머리는 참으로 복잡하였다. 고향 선배인 하구(何求) 김시현(金始顯)과의 만남을 통해 의열단의 울타리에서 동지로서의 인연을 떠올렸다. 그리고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았다. “… 우리는 혁명수단으로 우리 생존의 적인 강도 일본을 살벌함이 곧 우리의 정당한 수단임을 선언하노라”를 입으로 소리내어 외면서, 일왕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렇다. 침략자에 대한 엄정한 응징을 할 때였다. 양복주머니에 넣어둔 폭탄이 잘 있었다. 1월 5일 아침이 밝았다. 이제 우리 2천만 민중들을 일제의 무단정치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추강의 꿈이 열매를 맺으려는 순간이 눈앞에 한 발짝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제국주의의 상징 일왕을 처단하여 우리 민족의 원수를 갚고, 세계만방에 대한의 독립을 호소는 기회가 왔다. 

1924년 1월 7일, 일본 내무성은 “그저께 오후 7시에 조선 사람 한 명이 도쿄 궁성 니주바시 밖에서 배회하던 중 경관이 누구냐 함에 폭탄 같은 것을 던졌으나 터지지 않고, 현장에서 경관과 보초병이 범인을 체포하여, 즉시 히비야(日比谷)경찰서에 구금하고 취조 중인데…”라는 발표가 있었다. ‘적 궁성에 의열 폭탄’….

추강이 던진 폭탄 3발이 모두 불발이었다. 이를 어찌하랴! 습기가 많은 화물선을 타고 오는 여러 날 폭탄의 화약이 모두 젖은 탓이었다. 폭탄투척사건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지만, 일본의 왕실과 정부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통쾌한 사건이었다. 일왕이 거주하는 궁성에 조선 사람이 폭탄을 던질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의열단에 투신하다


추강 김지섭은 1884년 음력 7월 21일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풍산 김씨(豊山金氏) 집안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그는 한학자로 명망이 높던 운재(雲齋) 김병황(金秉璜)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는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러한 그의 성격이 뒷날 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그런데, 추강의 유소년시절은 나라의 정세가 참으로 암울한 때였다. 1884년 10월, 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 등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으로 말미암아 청·일 두 나라가 조선에 대한 종주권 싸움이 격화되었으며, 1894년 1월 동학농민봉기로 말미암아 나라의 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가 우리의 조정에 손을 내밀게 되었는데, 청·일 두 나라의 세력을 견제할 목적으로 조정에서는 친러적(親露的) 정책으로 기울게 되었다. 이처럼 외세의 각축장이 된 조선의 상황은 날이 갈수록 어려워져만 갔다. 일본은 이러한 어수선한 상황을 놓치지 아니하고 갑오변란(甲午變亂, 1894년)을 일으켰는데, 그 후 조정에 압력을 가하여 친일성향의 김홍집(金弘集)을 영의정으로 하는 내각을 출범시키고 내정개혁을 추진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갑오개혁(甲午改革)이다. 


그런데,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의 내정을 요리하려는 일본의 계획이 명성황후와 그 척족들에 의하여 방해를 받게 되므로 이의 제거에 나섰다. 일본공사 미우라 고오로(三浦梧樓)는 1895년 8월 20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새벽 5시에 암호명 ‘여우사냥’ 작전을 개시하였다. 일본군대가 경복궁으로 진입하여 황후 침실인 옥호루로 난입하여 황후를 참살하였다. 이를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 하는데, 일본이 우리나라의 국정을 마음대로 요리하려는 계책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나라의 사정은 나날이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그런데,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되고 통감에 의한 내정간섭이 노골화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910년 8월 29일, 오호 통재라! 껍데기만 남아있던 나라가 통째로 일본에 넘어가고 말았다. 이로써, 2천만 민중들은 일제의 무단정치의 질곡에 빠지고 말았다. 


이처럼 암울한 시기에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일제의 침략에 분개하여 국권회복에 뛰어들었다. 이 무렵, 추강 김지섭도 해외에서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2년 여름, 김원봉(金元鳳)·김시현 등과의 만남을 통해서 의열단에 가입하여, 조국광복을 위한 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일왕을 참살하는 길밖에 없다는 결심을 하고, 일본에 잠입하였다. 


드디어 1924년 1월 5일, 거사의 그 날이 밝았다. 오후 7시 20분, 니주바시 부근에 도착하여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경관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다가와서 접근하지 말라는 손짓을 하였다. 추강은 경관을 향하여 폭탄 한 발을 힘껏 던지고, 니주바시 건너편 궁성을 향하여 마지막으로 폭탄 두 발을 모두 던졌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모두 불발이었다. 추강은 현장에서 경관에 의하여 체포되었으며, 재판에 넘겨졌다. 


추강은 재판과정에서 의열단 단원으로서 당당한 모습이었다. 추강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지바(千葉)형무소에 수감되어 고난의 시간을 보내던 중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28년 2월 20일 뇌출혈로 순국하였다. 


필자 권용우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립 Herzen 교육대학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처장ㆍ법과대학장ㆍ산업노사대학원장ㆍ행정법무대학원장ㆍ부총장ㆍ총장 직무대행 등의 보직을 수행하였다. 전공분야는 민법이며, 그중에서 특히 불법행위법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을 하였다. 정년 이후에는 정심서실(正心書室)을 열고, 정심법학(正心法學) 포럼 대표를 맡아서 회원들과 법학관련 학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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