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시론 [2020/10] 한글을 지켜낸 최후의 보루, 조선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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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가혹한 탄압에서 지켜 낸 한글
학술·문화항쟁도 중대한 독립운동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는 한힌샘 주시경(周時經)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1876년(高宗 13년) 12월 22일(음력 11월 7일),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상주주씨(尙州周氏)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이 곳에서 아버지로부터 한학(漢學)을 수학하면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런던 중 작은 아버지에게 입양되면서 1887년(高宗 24년) 6월에 상경하였으며, 1894년(고종 31년) 9월에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면서 신학문에 입문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은 나라의 사정이 참으로 암울할 때였다. 1894년 2월, 전라도 고부군수(高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항거한 동학농민봉기(東學農民蜂起)가 일어났으며, 7월에는 일본군이 경복궁(景福宮)을 침입하는 갑오변란(甲午變亂)으로 말미암아 나라의 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백성들은 참으로 어리둥절하였다. 그 배후에 일본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라가 없는데 우리말과 글까지 없다면… 이 뿐이 아니었다.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 세계열강들이 우리나라에 진출하여 경제적 이권을 챙기기 위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로써, 민중들 사이에는 반외세의 소리가 높았다. 이 무렵, 주시경은 새로 창간된 독립신문(獨立新聞)의 제작에 관여하면서, 한글에 깊이 빠져들었다. 따라서, 그는 단순히 신문제작에 머물지 아니하고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여, 국문철자법의 통일을 연구하였다. 이 때가 1896년(高宗 33년) 5월이었다. 주시경은 이를 통해서 독립신문의 국문(한글)표기를 체계화하고, 더 나아가 국문(한글)철자법을 통일해나갔다. 이러한 노력은 뒷날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1933년)에 반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주시경은 서우학교(西友學校)‧오성학교(五星學校)‧중앙학교(中央學校)‧이화학당(梨花學堂)‧휘문의숙(徽文義塾)‧보성학교(普成學校)‧배재학당 등에서 강의에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 국어교육에 힘을 쏟았다. 이 무렵에 『국어문법』(1905년) 『대한국어문법』(1906년) 『국어연구안』(1907~08년) 『국어문전음학』(1908년) 『말』(1908년) 『국문연구』(1909년) 『고등국어문전』(1909년) 『국어문법』(1910년) 『말의 소리』(1914년) 등의 교안 내지 저술을 통해서 국어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주시경은 외세의 물결이 거세게 밀려오고 있는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말과 글을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나라가 없는데, 우리말과 글마저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1911년 그는 조선어강습원(朝鮮語講習院)을 개설하고, 조선어교육에 힘을 쏟았다. 우리 글의 수난을 극복하다 그러나, 「한글학회」가 걸어온 발자취는 참으로 험난한 길이었다. 「조선어학회」 시절로 되돌아가보자. 그 당시 「조선어학회」가 정력을 기울여 추진한 사업이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의 편찬이었다. 이를 통해서 말과 글을 비롯한 우리의 고유문화(固有文化)를 유지 ‧ 발전시키고, 민족정신(民族精神)을 지켜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업은 순탄하지 않았다. 가장 큰 어려움은 출판비용이었다. 각계의 독지가를 설득하여 사전편찬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고, 1936년 4월 1일 편찬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속담에 “노루를 피하니 범이 나온다”는 말이 있다. 출판비용을 확보하고 편찬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하는데,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강행하면서 탄압의 손길이 뻗혀왔다.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가리켜 ‘학술단체를 가장하여 국체변혁(國體變革)을 꾀한 독립운동단체’로 몰아갔다. 말하자면, 학술단체를 가장한 반일비밀결사(反日秘密結社)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이때, 한글을 지켜내려던 수많은 선각자들이 일제에 의하여 말할 수 없는 곤혹을 치루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단은 이러하였다. 함흥(咸興) 영생여학교(永生女學校) 4학년 박영옥(朴英玉)이 2학년 때 쓴 일기장에 “오늘 국어를 썼다고 선생님에게 꾸지람을 들었다”가 문제였다. 여기의 ‘국어’라는 것은 일본어를 가리키는 것인데, 그러하다면 이는 반일처사(反日處事)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기장을 검인한 담임선생을 지목하고, ‘학생들에게 조선독립사상(朝鮮獨立思想)을 침투시킨 불순분자’로 몰아갔다. 이 일로 하여, 영생여학교 교사였던 정태진(丁泰鎭)이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이 때 그가 조선어학회의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에 종사하고 있음을 빌미로 하여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그들의 국어(일본어) 상용정책의 걸림돌로 보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조선어학회의 독립정신과 업적 되살려야 함흥과 홍원 두 경찰서에 구속된 이들 33명은 그로부터 언제 열릴지도 모르는 재판을 기다리면서 구치감(拘置監)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견뎌야만 하였다. 어디 그 뿐이던가. 이들은 일본 경찰의 비행기태우기‧물먹이기‧난장질하기 등의 견디기 어려운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혹독한 고문과 굶주림으로 한징과 이윤재는 옥중에서 목숨을 잃었다.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3년 간 구치감에서 뼈를 깎는듯한 고통을 참으면서 우리 한글을 지켜냈다. 조선어학회, 우리 한글을 지켜낸 초후의 보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