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시론 [2020/11] KAL 858편 폭파사건을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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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승객 115명 전원 사망한 비극적 대참사
민족화합 거스르는 원망스러운 대남도발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1987년 11월 29일, 이 날 이라크(Iraq)의 수도 바그다드(Baghdad)국제공항에서 서울을 향하여 출발한 대한항공(KAL) 858여객기가 2인조 북한(北韓) 특수공작원에 의하여 인도양(印度洋) 상공에서 폭파되었다. 이로써, 승객 95명(대부분 중동 근로자)과 승무원 20명 전원이 귀한 목숨을 잃는 뼈아픈 상처를 남겼다. 범인은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공항(Abu Dhabi空港)에 내린 김승일(金勝一)과 김현희(金賢姬)였는데, 이들은 각각 하치야 신이치(蜂谷眞一), 하치야 마유미(蜂谷眞由美)라는 이름으로 위장하여 일본 여권(旅券)을 소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현지에 급파된 국가안전기획부(현재 국가정보원) 수사관들에 의하여 체포됨으로써 밝혀졌는데, 이들은 검거 직후 청산가리 앰풀을 먹고 자살을 기도하였다. 이 때, 김승일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으나, 김현희는 미수에 그쳤다. 그리고, 1987년 12월 15일 우리 수사관들이 바레인(Bahrain) 정부의 협조를 얻어 김현희를 국내로 압송하여 심문한 결과, 이들은 북한 조선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공작원으로 밝혀졌다. 북한, 반인륜적 사건으로 테러국 지목 이들 공작원 2인조는 바그다드국제공항에서 서울행 KAL 858여객기에 탑승하여 시한폭탄을 기내(機內)에 장치하고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공항에 내려 오스트리아 비엔나(Vienna)를 경유하여 평양으로 귀환한다는 계획이었는데, 우리 안전기획부의 신속한 대처에 의해서 이들을 체포함으로써 북한의 숨은 속내가 국제사회에 들어나게 된 것이었다. 이 반인륜적(反人倫的) 여객기의 폭파사건으로 말미암아 북한이 국제사회로부터 테러국으로 지목되게 되었다. 그런데, 북한의 우리 대한민국에 대한 불법적인 공세(攻勢)는 6‧25 전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우고 38선 전역에 걸쳐 일제히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이로부터 3년 1개월 동안 같은 피를 나눈 동족(同族)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1967년 4월 12일 화천군 비무장지대 침투사건, 1968년 10월 30일~11월 2일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침투사건, 1969년 4월 15일 EC-121 정찰기 납치사건, 1971년 1월 23일 대한항공 F-27기 납북미수사건,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장 저격사건,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83년 10월 9일 미얀마(당시 버마) 아웅산묘역(墓域) 폭탄테러사건, 1986년 9월 24일 김포공항 폭탄테러사건 등이 줄을 이었다. 필자는 지금도 1968년 1월 21일에 있었던 북한 민족보위성(民族保衛省) 소속인 124군부대 게릴라전 특수훈련을 받은 31명이 우리 국군 복장으로 위장하고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하여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서울에 침투했던 ‘1‧21 사태’를 잊을 수가 없다. 이들은 21일 밤 세검정(洗劍亭)파출소 자하문(紫霞門)검문소에 이르러 검문을 받으면서 정체가 탄로나자 검문경찰관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발사하면서 출동한 우리 병력과 접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출동한 군경합동수색대에 의해서 28명이 사살되고 1명이 생포되었으며, 2명은 도주하였다. 이 때, 우리 국민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정부에서는 이러한 북한의 대남적화공작에 대비한 조처로써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88서울올림픽 방해공작으로 이처럼 북한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停戰協定) 이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대남도발(對南挑發)을 자행해왔다. 특히,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후부터는 앞에서는 대화를 하는 척 하면서 뒤에서는 적화통일전략(赤化統一戰略)으로, 때로는 간첩을 침투하거나 요인(要人) 저격‧시설물 폭파‧무장공비남파 등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도발을 서슴지 않았다. 1987년 11월 29일의 KAL 858여객기 폭파사건도 이러한 대남도발의 연장 선상에서 자행되었는데, 이 경우는 특히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테러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때 2인조 공작원은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하여 김정일의 ‘1987년 11월 28일 23시 30분 바그다드발 서울행 858여객기를 폭파하라’는 지령에 의해서 저질러진 테러사건으로 밝혀졌는데, 이를 위해서 이들 공작원은 1987년 10월 7일부터 시한폭탄 장치방법을 익혔다고 한다. 그리고, 11월 12일 평양 순안국제공항을 출발하여 모스크바–부다페스트–비엔나를 거쳐 11월 28일 오후 8시 30분(현지 시각) 바그다드국제공항에 도착한 이들은 휴대품으로 위장한 라디오 시한폭탄의 폭발시각을 9시간 뒤로 조작한 후 서울행 KAL여객기에 탑승, 시한폭탄을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여객기가 바그다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중간 기착지인 아부다비공항에 착륙하자 이들 공작원은 선반 위에 올려놓은 시한폭탄을 그대로 놓아둔 채 내림으로써 그 폭탄이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5분경(한국 시각) 폭파됨으로써 115명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갔던 대참사였다. KAL기 폭파 사건 33주기…'아직도 논란' 이러한 의미에서, 11월 29일의 KAL여객기 폭파사건은 그 당시에 전개되고 있는 정치일정에도 적지 않는 혼란을 가져왔다. 이러한 혼란을 지켜보면서 북한의 계속된 대남도발을 원망했던 기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필자의 머리속을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