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항쟁사 [2020/11] 순국선열 독립항쟁사 4 국외 항일투쟁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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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연해주 등 한인동포 사회 중심으로 전개
뜨거운 독립전쟁의 불길이 타오르다
글 │ 편집부
1920년대 만주·연해주 일대의 무장 독립 투쟁은 승전의 연속이었다. 1920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등이 연합하여 벌인 삼둔자 전투와 봉오동전투, 그리고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등의 연합 부대가 참가한 청산리대첩은 모두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어 한국 무장 독립 투쟁사에 빛나는 승전보를 기록하였다.
독립군을 재정비하다
3부의 성립과 통합운동
일제의 보복작전이 극심해짐에 따라 만주 각처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들은 새로운 독립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러시아·만주 국경지대인 밀산부에 모였다. 1920년 12월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대한국민회·대한신민회 등 10개 독립군 부대들은 하나의 독립군 부대로 통합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서일을 총재로 한 3,500명 규모의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러시아로 이동한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와 군사협정을 맺으며 일본군 토벌에 나섰다. 이를 안 일제는 독립군부대에 무장해제 명령을 내리도록 러시아에 요구하였고 결국 러시아는 무장해제 명령을 내리면서 이에 따르지 않는 독립군들을 공격하였다. 이러한 자유시사변으로 독립군부대는 많은 희생자를 내며 만주로 되돌아왔다. 대한독립군단은 1922년 재조직되어 다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만주 지역에서의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자 일제는 독립항쟁과 독립군들을 탄압하기 위해 1925년 만주 군벌과 미쓰야 협정을 맺고 중국을 통해 우리 민족의 독립항쟁을 탄압하였다. 만주 관리들의 강력한 독립항쟁단속으로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은 약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일제의 탄압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루어지면서 만주에서의 독립 투쟁은 잠시 침체되기도 하였다. 이에 만주 지역 독립항쟁단체들은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독립군 단체 통합 운동을 추진하였다. 1922년 대한통군부가 조직되어 통의부로 확대되고, 통의부를 이탈한 일부조직이 192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직할 부대를 표방하며 남만주에 참의부를 결성하였고 당초 통의부는 1924년 남만주에 자치 정부로서의 성격이 강한 정의부를 세웠다. 또한 자유시 참변을 겪고 연해주에서 돌아온 대한독립군단을 중심으로 1925년 북만주에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대한통의부

육군주만참의부
대한통의부와 의군부의 상호대립에 실망한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기관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을 자각하고 임정군무부 산하의 군사단체로 활동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대표를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전에 있었던 광복군사령부의 전통을 계승하여 정부직속의 군사단체로 승인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임시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승인하고 부대명칭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로 하고 집안, 무송, 장백, 안도, 통화, 유하 등의 각 현을 관할구역으로 하여 민정(民政)과 군정(軍政)을 맡도록 하였다. 참의부는 1923년 창립 당시의 편제는 참의대장 겸 제1중대장에 백광운, 제2중대장에 최석순, 제3중대장에 최지풍, 제4중대장에 김창빈, 제5중대장에 김창천, 독립소대장에 허운기, 훈련대장에 박응백, 중앙의회의장에 백시관, 민사부장에 김소하가 각각 담당하였다.
정의부
임시정부 직속의 육군주만참의부가 결성되었을 때 가담하지 않은 단체들이 별개의 통합체를 구성하였는데 그것이 정의부(正義府)이다. 정의부는 통의부의 일부와 군정서·광정단·의성단·길림주민회 등 8개 단체의 연합체로서 1924년 11월에 결성되었는데 입법·사법·행정기관을 설치하여 한인사회 지방정부로서의 대규모행정조직을 갖추었다. 정의부 군사조직으로서 참모장 김동삼, 군사위원장에 이청천, 사령관에 오동진을 각각 임명하였고, 의용군 상비조직으로 8개 중대와 헌병대 및 민경대를 두었다. 정의부의 군대는 동포 사회의 치안확보와 독립군으로서 국내진공작전(國內進攻作戰)을 통한 일제(日帝) 세력을 공격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만주의 독립군은 일반적으로 의용군이라 불렸는데 정이형, 양세봉, 문학빈, 장철호, 이규성 등이 중대장 또는 유격대장으로 직접 대일항전 전선에 참가하고 있었다.
신민부(新民府)
북만주에서는 김좌진, 양규열 중심으로 독립군의 통합운동이 전개되었다. 1925년 대한군정서·대한독립군단 계열 등 10개 단체와 각 지역대표들이 영안현 영고탑(寧古塔)에서 부여족통일회의를 개최하여 통합기관으로 신민부를 창립하였다. 신민부(新民府)의 군사조직은 총사령관에 김좌진(金佐鎭), 보안대장에 박두희(朴斗熙), 제1대대장에 백종렬(白鍾烈), 제2대대장에 오상세(吳祥世), 제3대대장 겸 별동대장에 문우천(文宇天), 제4대대장에 주혁(朱赫), 제5대대장에 장종철(張宗哲) 등이 각각 선임되어 편제를 이루었다. 만주 독립운동 단체는 모두 독립전쟁을 제1차의 목표로 하였던 만큼 자연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목릉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연 2기의 속성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는데, 여기서 배출한 인원은 도합 5백여명에 달했다고 하며, 김혁이 교장, 김좌진이 부교장, 박두희·오상세 등이 교관을 맡았다고 한다.
3부통합운동 | 민족유일당회의

기존의 단체를 중심으로 유일당을 조직하는 협의회파와 기존의 단체를 모두 해체하고 개인을 본위로 조직하자는 촉성회 파가 대립하여 결렬되었다. 이에 민족주의진영의 유일당 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정의부는 신민부와 참의부를 결속해 민족진영 내부의 통일을 강화하고, 항일운동단체들에 대한 영도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1928년 7월 신민부·참의부에 3부 통일회의의 개최하였으나 또다시 결렬되었다.
3부 통합회의가 결렬된 후 신민부·참의부는 물론 정의부까지도 자체 내의 분열이 표면화되기에 이르렀다. 김좌진·황학수(黃學秀)·정 신 등 신민부의 군정파와 김희산·김소하 등 참의부 주류, 이청천·김동삼 등 정의부 탈퇴파가 주축이 된 촉성회 측은 1928년 12월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했고, 현익철(玄益哲)·이웅(李雄)·김이대(金履大) 등 정의부 주류와 심용준(沈龍俊)·이호(李虎) 등 참의부 일부, 송상하(宋尙夏)·독고악(獨孤岳) 등 신민부 민정파는 1929년 3월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했다.
1930년대 민족주의 항일 투쟁의 양대 산맥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
남만주에서 활동한 조선 혁명군(총사령 양세봉)은 초기 일제기관 파괴, 일제 관헌 응징 등 항일무장투쟁을 비롯하여 친일인사 숙청, 악덕 부호 응징 등 독립항쟁에 비협조적인 인사들을 처벌하는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 중국 의용군과 연합 작전을 통해 만주에서 일제를 몰아내고 조선 해방 전쟁을 하기로 계획하고 여러 차례 공동 투쟁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29년 유하현 조선혁명군, 1932년 양기하 부대의 혈투, 흥경현 영릉가 전투가 대표적이다. 특히 1932년 3~7월 벌어진 영릉가 전투는 조선 혁명군 1만여 명과 중국 의용군 2만여 명이 연합 전선을 통해 일본·만주 연합군 5만여 명을 상대로 크게 승리하였다. 3월에는 일본군 사상자 30여 명을 냈고, 5월과 7월에는 100여 명의 일본군 사상자를 냈다. 이후 양세봉이 암살되었으나 남만주 일대에서의 무장 투쟁은 1938년까지 활발히 지속되었다.
그런가하면 북·동만주 일대에서는 한국독립군(총사령 지청천)이 한국독립당의 당군으로 중국군과 연합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북만주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한 길림자위군과 합동하여 일본군 및 만주국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1933년에는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대전자령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당시 일본군 130여 명을 살상하고 무기·탄약과 같은 상당한 군수물자를 탈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밖에도 중국 호로군과 연합 작전을 펼쳐 쌍성보 전투, 경박호 전투,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전투 등 항일 전투에서 연이어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중국군과 갈등을 겪은 한국 독립군은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주요 인물들이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항일 유격대와 조국 광복회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만주 일대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주도로 반일유격대, 항일구국유격군 등 여러 항일 유격대가 결성되어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한인 항일 유격대는 중국 공산당의 동북인민혁명군에 소속되었다가 ‘민생단 사건’ 등을 겪으며 1935년 동북항일연군이 되었다. 이들은 함경남도 갑산의 면소재지인 보천보를 공격하여 관공서 등을 파괴하고 군수품을 빼앗은 보천보 전투를 일으켰다. 이 전투는 국내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민중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었다. 하지만 1930년대 말 일본군의 항일 연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이루어져 1940년대 근거지를 연해주로 옮겨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를 조직해 소련군 제88정찰여단에 편입되어 해방 전까지 그곳에서 훈련에 열중하였다.
한인 항일 연군의 일부 공산주의자들 주도로 1936년 동만주에는 조국 광복회가 결성되었다. 군사활동과 국내 정치활동에 주력하였고 기관지 ‘3.1월간’을 발간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광범위한 반일세력을 모으기 위해 함경도 일대 천도교도 등 민족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민족 통일 전선을 형성하였다. 동북항일연군의 조선인 무장부대와 함께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기도 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보천보 전투를 들 수 있다. 모든 계층과 단체가 이념과 노선을 떠나 단결할 것을 주장하며 국내와 만주·연해주 일대에서 해방이 될 때까지 투쟁하였다.
본토로 거점을 옮기다 |
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민족혁명당 결성 당시 김구 계열과 임정 고수파를 제외한 중국 관내 독립 단체 대부분이 참여함으로써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통일 전선 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계가 당권을 장악하자, 이에 불만을 가진 지청천, 조소앙 등 민족주의 계열이 차례로 이탈하면서 좌파적 성향이 강해졌다.
민족혁명당은 일제와 봉건 세력, 반혁명 세력을 투쟁 대상으로 삼았으며 민주 공화국 수립, 토지 및 대규모 생산 기관의 국유화를 강령으로 내세웠다. 결성 이후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아 왔던 민족혁명당은 1941년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광복 직후까지 활동하였다. 중·일 전쟁 직후인 1938년 김원봉이 이끄는 민족혁명당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아 중국 한커우에서 독립운동단체인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국민당 정부군과 함께 항일 전쟁에 참가함에 따라 지도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세력은 조국 방향으로 북상 중 중국 공산당이 활동하는 화북 지방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조선의용대는 화북 지대를 결성하고 1940년대 초, 호가장 전투, 반소탕전 등 수많은 전투에 참여한 후 중국 공산당 군대와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1942년 조선의용대 잔여 세력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고, 주력은 화북조선독립동맹이 지도하는 조선 의용군에 합류하였다.
독립항쟁세력의 재편 |
한국독립당과 한국광복군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독립운동은 지역적 기반에 큰 변화를 겪었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고 스탈린이 한인강제이주정책을 펼친 것이 그 원인이었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뒤 지속적으로 이른바 ‘토벌작전’을 전개하자 만주 독립군들은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으며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다. 만주와 연해주가 그 기반을 상실하자 자연스레 중국 관내가 독립운동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다.
지역적 기반이 변화하면서 동시에 독립항쟁세력도 재편되었다. 1940년 재건 한국독립당 조소앙, 조선혁명당 이청천, 한국국민당 김구 등은 민족주의 계열 3개 정당을 통합하고 김구를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하는 한국독립당을 새롭게 결성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주도 하에 항일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해나갔다. 건국 강령은 삼균주의에 바탕을 두었다. 삼균이란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말하는 것으로 선거를 통한 정권의 균등, 국유 제도를 통한 이권의 균등, 공비 교육(의무교육)을 통한 학권의 균등을 의미한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충칭에서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인 1941년 대일 선전포고를 한 한국광복군은 영국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미얀마·인도 전선에 파견되는가 하면(1943년) 미국의 도움을 받아 특수 훈련을 하며 국내 진입 작전을 준비하였다. 한편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좌파 진영이 참여함에 따라 좌우 통합정부로 변모하였다. 김원봉·장건상 등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혁명당 인사들이 임시정부에 참여한데 이어 화북 지역의 조선독립 동맹과도 통일 전선의 결성을 협의하였다. 1941년 조선의용대 화북 지대는 한인 중국공산당원들과 손잡고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듬해에는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확대 개편하여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였다.
세계 곳곳에서 펼쳐진 독립항쟁 |
그 외 지역 독립항쟁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도 망명한 독립투사들이 한인 동포 사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며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미국에서는 안창호, 박용만 등이 대한인국민회(1910년)를 조직하여 재외한국인의 권익을 대변하는데 앞장섰다. 기관지인 ‘신한민보’를 발간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해외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하와이에서는 박용만, 박종수 등이 독립군사관을 양성하기 위하여 군사교육단체인 대조선 국민군단(1914년)을 조직하였고 멕시코에서는 이근영, 양귀선 등이 한인무관양성학교인 숭무학교(1910년)를 만들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