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1/01] 우리가 기억해야 할 외국인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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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운동에 함께한 외국인 독립 영웅들
“나는 죽을지라도 한민족을 구하라”
글 | 편집부
대한민국에 수훈된 5명의 중국인 장제스·쑨원·쑹메이링·천치메이·천궈푸 중화민국(대만) 총통 장제스(蔣介石)는 1953년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장제스는 1932년 4월 윤봉길 의거 소식을 접한 뒤 ‘중국 100만 군인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 한 명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극찬했다. 이후 임정에 관심을 갖게 됐고, 이듬해 김구와 회동을 가졌다. 두 사람이 중국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에 한국인 특별반을 편성하기로 합의하면서 ‘독립전쟁’을 위한 한국인 무관 양성의 물꼬가 트였다. 이후 광복군 창설을 절대적으로 지원했으며,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다. 장제스의 아내인 쑹메이링(宋美齡)은 임정에 거액을 쾌척하고 광복군 창설 때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1933년 장제스와 백범의 비밀 만남을 주선했던 당시 중국 국민당 조직부장 천궈푸(陳果夫)는 임정 요인 신변보호 및 자금 지원 등에 앞장섰다. 중국인에게 ‘국부(國父)’로 불리는 쑨원(孫文)은 1921년 중국 광둥정부 대총통을 맡고 있을 때, 중국 정계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임정을 승인한 점 등이 높게 평가돼 196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수훈됐다. 천치메이(陳其美)는 신규식 등 독립운동가들을 도와 임정의 기반을 만든 신해혁명의 주역이다. 당당히 조선인의 편에 섰던 일본인 후세 다쓰지·가네코 후미코 후세 변호사는 조선인을 변론한 것 때문에 많은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30년대에만 세 차례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고, 두 번이나 투옥됐다. 1946년에는 광복된 한국을 위해 <조선 건국헌법초안>을 저술했으며, 박열의 전기 <운명의 승리자 박열> 등을 펴내기도 했다.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후세 다쓰지와 함께 한인 아나키스트와 연대한 대표적 반전 활동가였다. 열아홉 살 때 박열을 만나 함께 비밀결사 불령사를 결성해 조선의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일본 천황제 타도를 외쳤다. 취조 과정에서 박열의 폭탄 구입 계획이 알려지면서 1926년 3월 25일 두 사람은 대역죄와 폭발물단속벌칙 위반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형 선고를 이틀 앞둔 3월 23일 옥중에서 정식으로 혼인 신고서를 제출해 합법적인 부부가 됐다. 이후 이례적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지만, 가네코는 일본 국가권력의 폭력에 대항해 법정투쟁을 전개했고 우쓰노미야 형무소에 갇힌 후에도 전향 공작을 뿌리치고 비전향을 관철했다. 사형 선고 4개월 뒤인 7월 23일, 스물셋의 나이로 옥중에서 사망했다. 고인의 유해는 이후 박열의 형이 인수해 경북 문경에 안장했고, 2003년 박열의사기념공원이 조성되면서 이장됐다.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대한민국을 사랑한 푸른 눈 이방인 어니스트 베델·프랭크 스코필드 등 구한말 최대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발행한 영국인 어니스트 토마스 베델(Ernest Thomas Bethell)은 한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은 영국인이다. 베델은 런던에서 발행되던 데일리 크로니클(the Daily Chronicle)의 특별 통신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국운이 기울어진 약소국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진 의혈 청년이었다. 베델은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위급한 시기에 국한문 ‘대한매일신보’, 순 한글 ‘대한매일신보’, 영어신문 ‘코리아 데일리 뉴스’ 등 3개의 신문을 발행했다. 그의 신문은 각지에서 일어나는 항일 의병들의 활동을 보도하면서 일제의 침략을 격렬하게 규탄했고, 고종도 비밀리에 자금을 제공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신민회 본부이자,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는 등 항일운동의 본거지 역할도 수행했다. 일본은 베델을 한국에서 추방하거나 신문을 폐간시켜야 한다고 영국에 끈질기게 요구했고, 베델은 두 번이나 재판에 회부되었다. 1909년 서른일곱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유언은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였다.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캐나다 출신의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한국명 석호필)는 ‘34번째 민족 대표’로 불린다. 민족 대표들이 비밀리에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외국인은 그가 유일했다. 스코필드는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해 해외에 알리는 한편, 시위 현장에서 사진을 찍어 배포하고 국내외 영어신문에 독립 선언의 취지를 알리는 글을 실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와 대구형무소를 찾아 수감자들의 고문 흔적을 확인한 뒤 조선 총독과 정무총감 등을 만나 항의하기도 했다. 그해 4월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수촌리와 향남면 제암리 등에서 학살극이 벌어지자 현장을 방문하고 보고서를 작성해 해외에 보냈다. 1920년 강제 출국당한 뒤로도 기고와 서한 등으로 일제를 규탄하고 조선인을 격려했다. 1958년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로 임용돼 한국으로 돌아온 뒤 고아들을 돌보고 민주화와 반부패 운동에도 앞장섰다. 정부는 문화훈장과 건국훈장(독립장)을 수여한 데 이어 외국인 최초로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했다. 이외에도 고종의 밀사 역할을 하며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린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세브란스병원을 세우고 독립운동 지원을 호소한 의료선교사 올리버 에이비슨(Oliver R. Avison), 병원·학교·교회 등을 설립하며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한 로버트 그리어슨(Robert G. Grierson), 중국에서 독립만세운동 사상자 치료와 희생자 장례식을 개최하고 경신참변 당시 한인 피해상황을 국제사회에 폭로한 스탠리 마틴(Stanley H. Martin), 명신여학교를 설립해 여성교육·한글·국사 교육에 힘쓴 아치발드 바커(Archibald H. Barker) 등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