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시론 [2021/05] 지조의 시인, 조지훈의 삶과 지조의 큰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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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녀와 정치인 연관시켜 ‘지조론’ 설파
변절 지도자 향한 추상같은 질책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인 조지훈이 세상을 떠난 지 53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의 가문은 ‘삼불차’(三不借)의 가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 ‘삼불차’란 남으로부터 재물(돈)·사람·문장(글)을 빌리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수백년 이어온 ‘삼불차’의 가훈은 일제강점의 창씨개명을 거부할 수 있는 강인한 지조를 후대에 이어주었다.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어지러운 정국 상황에서, 조지훈은 <새벽> 3월호에 「지조론(志操論)」을 발표했다. 그 논설에서 조지훈은 자유당 말기 부패한 정치상황과 지조 없는 정치인들을 향한 추상같은 질책을 쏟아내고 있다.
이곳 주곡리는 한양 조씨의 집성촌인데, 입향조 호은(壺隱) 조전(趙佺)으로부터 내려오면서 명성을 더해왔던 것으로 전한다. 특히, 조지훈의 가문은 ‘삼불차’(三不借)의 가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 ‘삼불차’란 남으로부터 재물(돈)·사람·문장(글)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백년 이어온 ‘삼불차’의 가훈은 일제강점의 창씨개명을 거부할 수 있는 강인한 지조를 후대에 이어주었다. 아마도 이러한 가훈이 조지훈의 「지조론」을 낳게 한 가치관이 아닌가 싶다. 참으로 자랑스러운 정신적 교훈이다. 선대로부터 이러한 정신적 교훈을 물러받은 조부 조인석은 한일병합 무렵,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뜻을 같이 하는 애국동지들과 항일운동에 참여하여 잃어버린 조국을 찾는 일에 몸과 마음을 바쳤다. 또 그는 실력양성의 필요성을 깨닫고 호은종택(壺隱宗宅)에 영진의숙(英進義塾)을 열고 청소년들에게 신학문(新學問)을 가르쳤다. 1927년에는 서울에서 이상재(李商在)·권동진(權東鎭)을 중심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을 때, 조인석은 영양군 신간회 지회장을 맡아서 민중계몽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지조의 시인, 조지훈 조지훈은 1939년에 「고풍의상」(古風衣裳)과 「승무」(僧舞)를, 1940년에 「봉황수」(鳳凰愁)로 <문장(文章)>의 추천을 받아 시단(詩壇)에 등단하였다. 그 후, 시집 『풀잎 단장(斷章)』·『조지훈 시선(詩選)』·『역사(歷史) 앞에서』·『여운(餘韻)』 등을 남겼다. 그는 1946년 같은 시기에 시단에 등단한 박목월(朴木月)·박두진(朴斗鎭)과 함께 3인 공동시집 『청록집(靑鹿集)』을 출간한 것을 계기로 ‘청록파(靑鹿派) 시인’으로 불리우면서 문학지망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해방 후 좌익계열의 시인들이 무미건조한 구호시(口號詩)로 날개짓하고 있을 무렵, 향토적 서정과 민족정서를 노래한 이들 3인의 시풍은 그 당시의 시단에 신선한 활력소였다고 전한다. 정작 할 말이 남아 있음을 알았을 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랑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이는 조지훈의 시 「사모(思慕)」의 일부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을 애절하게 노래하고 있다. 이어지는 다음 연은 더욱 애절하다.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 그어 /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 보리라 / 울다가 지쳐 멍든 눈 흘김으로 /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로 이어지고 있다. 필자는 시인 조지훈을 말할 때면, 1960년 <새벽> 3월호에 발표한 「지조론(志操論)」을 떠올리게 된다. 때는 1960년 ‘3·15 정부통령(正副統領) 선거’를 앞둔 어지러운 정국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과거 어느 선거 때보다 여야가 서로 승리를 다짐하면서 칼을 갈고 있었다. 야당인 민주당은 ‘민주주의 존망의 위기인 이번 선거에 공명선거(公明選擧)만이 구국의 길’이라고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여당인 자유당은 선거의 승리를 위해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할 태세였다. 이러한 절박한 상황인데, 민주당에서는 국회의원들의 연쇄적인 탈당이 이어지고 있었다. 자기를 지지해준 유권자(有權者)들의 신임(信任)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따뜻한 품을 찾아 새둥지를 트는 국회의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참으로 이해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조지훈이 마음을 가다듬고 책상에 앉아 붓을 들었다. 이는 조지훈의 「지조론」의 일부이다. 이 논설은 자유당 말기의 부패한 정치상황과 지조 없는 정치인들을 향한 추상같은 질책을 쏟아내고 있다. 그의 「지조론」은 이렇게 이어진다. “무너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권력에 뒤늦게 팔리는 행색은 딱하기 짝이 없다. 배고프고 욕된 것을 조금 더 참으라. 그보다 더한 욕이 변절 뒤에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는 “지조는 어느 때나 선비의, 교양인의, 지도자의 생명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조를 잃고 변절한다는 것은 스스로 그 자임(自任)하는 바를 포기하는 것이다”로 끝맺는다. 「지조론」은 우리에게 참으로 귀한 교훈을 던진다. 우리 주변에 「지조론」의 훈계를 들어야 할 정치인이 이제는 없는가. 새삼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Seneca, L. A.)가 남긴 명언, “인민(人民)에게 미움을 받은 정치는 영속하지 못한다”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