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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항쟁사 [2021/05] 항일무장투쟁의 빛나는 별, 오동진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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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항일무장투쟁의 3대 맹장 


“나를 가둘 수는 있어도 굴복시킬 수는 없다”


글 | 하성환(서울 상암고등학교 교사)


1920년대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3대 맹장은 김동삼, 김좌진, 오동진 장군이다. 그러나 김좌진, 김동삼과 달리 오동진은 한국사 교과서에서 찾을 수 없다. 1962년 독립유공자 최고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음에도 연구논문 한 편이 없다. 1920년대 남만주 항일무장투쟁에서 오동진 장군은 통의부와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빛나는 전과를 세웠다. 일제 관공서 습격 143회, 일제 관리 살상 149명, 밀정과 친일부호 처단 765명이라는 전설적인 투쟁 기록을 역사에 남겼다. 일제는 오동진 장군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해 10만 원 현상금을 내걸었다. 당시 10만 원이면 오늘날 화폐가치로 13억 원에 이르는 거액의 현상금인 셈이다.


오동진은 누구인가


  1920년대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3대 맹장은 김동삼, 김좌진, 오동진 장군이다. 그러나 김좌진, 김동삼과 달리 오동진은 한국사 교과서에서 찾을 수 없다. 1962년 독립유공자 최고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음에도 연구논문 한 편이 없다. 김좌진 장군은 한국사 교과서에 자세히 서술돼 있고 연구논문도 다수 존재한다. 김동삼 역시 몇 편의 연구논문이 존재한다. 그러나 오동진 장군을 연구한 논문은 단 한 편도 없는 실정이다. 


일찍이 오동진은 1889년 평안북도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靑水洞) 659번지에서 출생했다.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생모 한씨(韓氏)와 사별했다. 오동진은 12세 때부터 계모 밑에서 성장한 후, 안창호 선생이 세운 평양 대성학교 단기 사범과를 2년 만에 졸업했다. 민족학교인 대성학교 재학 당시 오동진은 항일민족의식과 함께 기독교를 접했다. 졸업 후 고향 의주에서 1910년 민족학교인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세워 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기독교를 전파했다. 그리고 평양 숭실중학교 출신 장인환이 설립한 ‘조선국민회’에 가입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항일계몽운동을 펼쳤다. 


일신학교 교사 생활은 일제가 사립학교령을 통해 일신학교를 강제 폐간시키면서 접어야 했다. 이후 오동진은 상업 활동에 종사하였다. 당시 상업 활동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독립자금을 조달하고 민족운동가들의 연락방편으로 활용되었다. 1919년 오동진은 석주 이상룡과 함께 출연하여 평안북도 삭주군에 민족학교 ‘배달의숙’을 설립했다. 그리고 몸소 교사가 되어 ‘배달의숙’에서 계연수, 최시흥과 함께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역설하며 조선의 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오동진이 30세 되던 해 3·1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활활 타올랐다. 오동진의 고향인 평북 의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동진은 3·1만세운동 당시 적극적으로 시위에 참가하였다. 3·1만세 운동을 촉발시킨 고종 독살설은 송암 오동진 선생으로 하여금 인생의 큰 전환점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시위 참가 사실이 일제에 적발돼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가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만주 관전현(寬甸縣)으로 망명하였다. 관전현(寬甸縣) 망명 이후, 오동진은 ‘대한청년단연합회’ 교육부원으로서 만주와 국내를 넘나들며 항일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강연회를 주도했다. 


오동진은 ‘대한청년단연합회’를 비롯해 1920년 9월, 남만주 항일단체를 통합한 ‘대한광복군 총영’을 조직했다. 오동진은 31세에 대한광복군 총영장이 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20년 한 해 동안 국내로 진격해 일제 군경과 교전한 기록이 78회에 이르고 경찰관 주재소 56개소를 습격하였다. 또한 일제 식민통치의 최전선인 면사무소, 경찰관 주재소를 비롯해 행정기관 20개소를 파괴했고 일제 군경 95명을 사살하였다. 압록강을 넘나들며 일제 관공서와 경찰관 주재소에 대한 습격은 국경지방 일대, 일제의 식민통치 기능을 거의 마비상태로 만들어버렸다. 


1920년대 남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주축인 통의부(1922)-정의부(1924)로 이어지는 무장투쟁에서 오동진 장군은 통의부와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독립군 사령관이 되어 빛나는 전과를 세웠다. 일제 경찰관서와 주재소를 습격해 적을 사살하고 관공서를 불태웠다. 그리고 밀정 등 친일파 처단에도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1926년 들어 오동진 장군은 항일독립운동 전선에서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를 망라한 ‘고려혁명당’을 건설해 군사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일제와 투쟁하였다. 

오동진 장군은 통의부가 창립된 1922년부터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으로 체포된 1927년까지 연인원 14,149명의 독립군을 지휘했다. 그 결과 일제 관공서 습격 143회, 일제 관리 살상 149명, 밀정과 친일부호 처단 765명은 당시 평안북도 경찰부가 밝힌 통계 수치로서 오동진 장군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투쟁 경력이다. 그만큼 오동진 장군은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전설적 인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실제로 일제는 오동진 장군을 테러리스트로 규정해 10만 원 현상금을 내걸 정도였다. 당시 10만 원이면 오늘날 화폐가치로 13억 원에 이르는 거액의 현상금인 셈이다.


대한광복군 총영장으로 추대

안경신 평남 도청 폭파사건 지원


오동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은 1920년 대한광복군 총영장 시절로 시작한다. 대한광복군 총영장으로 추대된 오동진 장군은 미국 상하 의원단 100명이 넘는 일행이 동양을 시찰하면서 조선에 들른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리하여 7월 대한광복군 총영 소속 대원들을 신의주, 평양, 서울 등 3개 지역 결사대로 나누어 조선에 침투, 거사를 계획했다. 3·1혁명이 잔혹하게 진압되었음에도 일제 식민통치에 굴하지 않고 조선 민중은 여전히 불같이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만방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대한광복군 총영 결사대는 애초에 권총과 전단지 4만장, 그리고 폭탄을 휴대하고 7월 15일 총영을 출발했다. 총영 결사대는 평안북도 안주에서 검문하던 일경 경부 궁동종삼랑(宮東宗三郞) 1명을 사살하고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안경신은 평양 지역 결사대로 평양경찰서 폭파를 기도했다. 그러나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에서 폭탄 심지가 비에 젖는 바람에 불발로 끝났다. 황해도 해주에 있는 동양척식회사 지점 폭파도 헌병대 경계가 삼엄하여 실패하였다. 대신 신의주 지역 결사대는 신의주역 철도호텔을 폭파했고 선천경찰서와 선천 군청을 폭파했다. 조선총독부 폭파를 계획한 서울 지역 결사대는 사전에 발각돼 피검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모두 대한광복군 총영장 오동진 장군이 계획한 거사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오동진 장군과 여장부 안경신은 대한청년단연합회 활동 당시 이미 알고 지냈던 사이였다.


안경신은 일찍이 가정적으로 감리교 신자로서 독실한 기독교 정신과 신앙생활을 해온 집안에서 생활했다. 3·1혁명 이후 안경신은 감리교가 주축인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에 가입하여 군자금 업무 등 재무부 일을 도맡았다. 그러나 ‘대한애국부인회’ 조직이 드러나면서 안경신은 일경에 쫓기듯이 만주로 망명을 단행했다. 망명 이후 안경신은 오동진 장군의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했고 ‘대한광복군 총영’ 제2대로 편입하였다. 이후 평양 지역 결사대로 지원하였다. 따라서 안경신이 1920년 8월 평안남도 도청을 폭파하고 일제경찰 2명을 폭살시킨 투탄 사건도 대한광복군 총영 오동진 장군과 관련이 매우 깊다. 대한광복군 총영장 오동진 장군이 보낸 결사대원 중 한 사람이 여장부 안경신이었기 때문이다. 안경신은 만삭의 몸으로 치마에 폭탄을 숨긴 채 국내로 잠입, 평양에 도착한 날이 1920년 8월 1일이었다. 그리고 8월 3일 밤 9시 50분경, 평안남도 도청에 폭탄을 던져 옆 경찰서 건물을 동시에 파괴하여 일경 2명을 처단하며 평양 시내를 일순간 충격에 빠트렸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안경신 등 결사대원 대부분이 피검돼 재판을 받았는데 오동진 장군은 궐석재판에서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이후 오동진 장군은 식민지 경찰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대원들을 이끌고 국경지역 경찰관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그리고 친일 밀정을 처단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줄기차게 펼쳐나갔다. 일제 밀정이자 뤼순조선인회 서기인 친일파 정갑주 처단 지시나 이토 히로부미 수양녀이자 친일매국노인 배정자 암살 지령 역시 오동진 장군이 내렸던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이 사건은 상해 임시정부 산하 대한광복군 총영이 기획한 항일무장투쟁으로 당시 총영장이 오동진 장군이었다. 대한광복군 총영은 항일무장단체로서 일제기관 폭파, 요인 암살, 밀정 처단을 행동목표로 활약했다. 오동진 장군이 총영장인 대한광복군 총영은 1920년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중심으로 남만주 항일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해 만든 조직이다. 당시 대한광복군 총영이 일제와 치른 전투 상황을 보면 그 치열함을 엿볼 수 있다. 


1921년 6월 26일 광복군 총영 오동진 장군 일행은 관전현(寬甸縣) 누하(漏河) 산중에서 일경과 교전했다. 그런가 하면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오동진 장군의 광복군 총영은 벽동경찰서 삼서주재소, 삭주군 순사주재소, 학회주재소, 후창군 동흥주재소무산군 장삼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리고 식민통치의 전위기관인 삭주군 관회면사무소, 소귀면사무소, 초산군 영림창사무소를 파괴했고 친일관리인 후창군수와 자성군수를 처단했으며 문학빈, 공주선, 이능학을 평안북도 벽동군에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2년 오동진 장군은 양기탁, 김동삼과 함께 서로군정서를 중심으로 남만주 항일독립운동단체가 통합된 ‘대한통군부’를 결성하였고 두 달 후 통의부로 확대, 발전시켰다. 오동진 장군은 군정부(軍政府) 성격인 통의부에서 교통부장, 재무부장, 민사부장을 담당했다. 1924년에는 통의부 군사부장 겸 사령장이 되어 무장투쟁을 지휘하였다. 그리하여 남만주에 이주한 한인들의 정착과 생활을 보호하고 민족반역자들이 세운 일본민회, 보민회, 일진회를 파괴하는 데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대표적인 국내진공작전으로 평안북도 초산경찰서 추목주재소와 외연주재소를 습격한 사건과 벽동경찰서의 여해주재소와 차련관 주재소를 공격한 전투를 들 수 있다. 특히 1925년 3월 19일 초산경찰서 습격 사건은 한 달 전 고마령 전투 당시 일경에 의해 독립군 간부들이 피살된 사건에 대한 복수전이었다. 정의부 제8중대장 김석하는 초산경찰서 추목주재소를 습격하였고 제6중대 3소대장 김정호는 외연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제6중대장 정이형은 압록강을 건너 벽동경찰서 여해주재소를 습격해 경찰 3명을 사살하고 경찰주재소를 전소시켰다. 


정의부는 중앙행정위원회에 군사부를 두었는데 오동진 장군이 군사위원장이고 정이형, 문학빈, 양세봉 등 주로 평안도 출신들이 소대장과 중대장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의 활동은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활동과 친일주구와 친일부호 처단, 그리고 독립운동 선전공작활동, 일본인 관리 사살과 적 기관 방화공작이 주된 임무였다. 

오동진 장군의 국내진공작전은 국경 일대 일제 식민당국을 한순간 혼란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식민통치의 첨병 일제 경찰을 사살하고 일제 식민통치의 전위기관인 관공서를 파괴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친일 주구배와 밀정들을 처단했다. 그것은 정의부 활동 가운데 일상적인 임무였다. 


1920년대 오동진 장군은 국내진공작전을 통해 일경과 수백 차례 교전을 벌였고 관공서 143개소를 불태우거나 파괴했으며 일경과 관공리, 밀정, 친일부호 따위 914명을 처단했다. 오동진 장군이 1920년대 대한광복군 총영과 통의부-정의부 시절 보여준 항일무장투쟁은 항일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역사였다. 이는 거꾸로 일제수뇌부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투쟁으로 일제 총독부 고위관료들에게 눈엣가시로 작용했다. 따라서 일제 식민당국은 오동진 장군을 테러리스트로 낙인을 찍고 10만 원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끈질기게 추적하였다. 


오동진 장군이 정의부 군사위원장 시절, 류하현 삼원보에 동명중학과 길림성 화전현에 화성의숙을, 그리고 흥경현 왕청문에 화흥중학, 삼성중학 등 항일민족학교를 세워 혁명인재 양성과 함께 독립군 무관을 배양했다. 그리고 정의부 군 장교들 가운데 일부를 선발해 광동 황포군관학교 등 중국 무관학교에 유능한 인재들을 파견 형식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밖에도 정의부는 야학과 강습소를 운영하고 1926년에 『대동민보(大同民報)』와 『전우(戰友)』를 발간하여 한인사회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48일 동안 단식투쟁에도 의연했던 항일지사


  오동진 장군이 일제의 간교한 계략에 말려든 것은 남만주 한인사회 내 이주 한인들의 정착과 생활개선 그리고 민정활동과 관련하여 독립운동 자금과 관련이 깊다. 정의부는 성립 초기 하얼빈 이남 길림성과 봉천성을 관할구역으로 하여 17,000여 가구, 87,000여 명에 이르는 이주 한인들을 기반으로 하였다. 오동진 장군을 비롯한 정의부 지도부는 무장투쟁과 함께 한인사회 경제활동과 교육활동에도 주력했다. 이주 한인들이 생활하는 마을마다 소학교를 세워 의무교육을 시행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27년 12월 16일 오동진 장군은 광산업의 거부 최창학을 소개해 준다는 밀정 김종원에게 속아 길림-장춘선(吉長線) 흥도진역(興陶鎭驛)에서 일제에 피검된다. 한때 자신의 부하였지만 밀정으로 변심한 김종원의 계략에 넘어가 중국 장춘에서 체포된 것이다. 오동진 장군을 체포한 것은 밀정 김종원을 앞세운 악질 친일경찰 김덕기(평안북도 경찰부 고등계 형사)였다. 오동진 장군은 신의주 지방법원과 평양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법정에서 자신은 세계평화를 위해서 독립군 사령관이 되었음을 밝히며 자신에게 징역형을 언도한 일본인 판사를 준열히 꾸짖었다. 나아가 복역 중에도 48일 동안 단식투쟁을 감행해 항일독립지사로서 의연함과 기개를 잃지 않았다. 


특히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일인 판사가 무기징역을 선고할 때 오동진 장군은 판사들을 향해 “이놈 감히 어른 함자를 함부로 부르느냐!”고 호통을 친 뒤 “너희들이 나를 가둘 수는 있어도 굴복시킬 수는 없다. 이놈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고 불호령을 내렸다. 이어서 “이놈들! 심판을 받아야 할 네 놈들이 나를 심판해? 이놈들 이리 내려 와서 내 심판을 받아봐라!”며 준열히 호통을 쳤다. 그리고 비호처럼 재판장으로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후 오동진 장군은 일체 심문을 거부하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옥중 법정투쟁에서도 오동진 장군은 견결하게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당시 일인 재판장은 오동진 장군 변론을 맡은 항일 변호사 가인 김병로와 애산 이인을 불러 어떻게 해서라도 공판을 해야겠다며 부탁을 한다고 사정을 했다고 한다. 


일인 간수들 사이에 신(神)으로 불린 까닭


7년간의 수형 생활로 수척할 대로 수척해진 몸으로 1934년 2차 단식 투쟁에 돌입한 오동진 장군의 정신력은 수형 생활 중인 수인들로부터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오동진 장군은 신의주 형무소에서 재판을 거부하며 1929년 11월 11일 33일간 지속된 단식 투쟁을 감행했다. 그런가 하면 경성형무소로 이감된 후 1934년 6월 11일부터 48일간 2차 단식투쟁을 또다시 감행했다. 특히 옥중 항일투쟁이 거세지자 일제는 오동진 선생을 빛도 들어오지 않는 깜깜한 토굴 속에 100일 동안 가두었다. 주먹밥 하나 들어갈 정도의 구멍만 난 징벌방인데 100일이 지난 뒤에 미치지 않고 정정한 모습으로 나오자 왜놈 간수장조차 ‘가미사마’라는 호칭을 붙여주었다고 했다. ‘가미사마’는 신(神)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다. 일인 간수들 사이에 신(神)으로 불리며 특별대접을 받았다. 특히 일인 형무소장조차 오동진 장군이 나타나면 그 앞에서 예를 갖출 정도였다.


오동진 장군은 1934년 무기징역에서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그렇지만 1944년 정신병자로 분류돼 공주형무소로 강제 이감돼 형무소 내 모진 고문으로 해방 1년을 앞두고 1944년 순국한다. 


오동진 장군은 남쪽에 혈육(후손)이 없어서 동작동 국립묘지 현충원 ‘무후(無後)선열제단’에 133위 순국선열과 함께 위패가 안치돼 있다. 북쪽 평양 애국열사릉에도 오동진 장군의 묘가 조성돼 있어서 양세봉, 최동오, 류동열과 함께 남과 북 모두에서 항일독립투사로 인정받고 있다. 실제로 오동진 장군은 김일성(김정은 국무위원장 조부)의 아버지 김형직과 절친했다. 김형직이 1926년 사망한 직후, 14살 어린 김일성을 도와 정의부 소속 민족학교인 ‘화성의숙’(교장 최동오)에 입학시킨 인물이 오동진 장군이다.


  그러나 오동진 장군은 김좌진 장군처럼 아나키스트도 아니고 더더욱 코뮤니스트도 아니었다. 오로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와 무장을 벌였던 공화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였다. 도량이 넓고 평민적이었으며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내어 줄 정도로 애국청년들에게 헌신적이고 매우 친절했다. 그를 만나본 애국청년들은 오동진 장군을 평생 함께할 항일투쟁의 동지로서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오동진 장군 곁에는 수많은 애국청년들이 모여들었고 항일운동단체들이 결집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독립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열정으로 청년들을 감화, 탄복시키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다. 실제로 정의부 중대장이자 우당 이회영과 사돈인 정이형(본명 정원흠)은 오동진 장군을 가장 존경하는 독립운동 동지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남과 북에서 모두 인정받는 항일투사임에도 정작 대중의 기억 속에선 망각의 인물이 송암 오동진 장군이다. 공주형무소에서 순국했음에도 76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오동진 장군의 유해조차 찾질 못한 오늘의 현실은 참으로 부끄럽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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