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전설 [2021/05] 3월의 전설(70회) ┃ 안동 길안시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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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앞마을과 김필락의 죽음
국권회복 희망 담은 큰 지도자들 배출
글 | 이정은(3·1운동기념사업회장)
김필락은 길안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일제에 의해 학살되었다. 그는 임하면 천전리(川前里) 내앞마을 500여 년 의성 김씨 후손이다. 내앞마을은 백하 김대락, 일송 김동삼 같은 독립운동의 큰 지도자들을 배출했고, 협동학교를 세워 국권회복운동을 시작했다. 망국 사태를 맞자 김대락을 비롯한 일가친척 150여 명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집단 이주를 하였다.
경상북도 안동 시내에서 동남쪽 30리(12km). 안동 읍내의 낙동강을 향해 서쪽으로 W자로 격하게 요동하며 흐르는 반변천이 남쪽 길안에서 북류하는 길안천과 만나는 이곳 임하면 천전리(川前里) 내앞마을은 500여 년의 의성 김씨 집성촌으로 한국 독립운동의 요람이다. 이 마을에서 백하 김대락(金大洛, 1990년 애족장), 일송 김동삼(1962년 대통령장) 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큰 지도자들이 배출되었고, 석주 이상룡(1962년 독립장), 동산 유인식(1982년 독립장) 같은 선각자들이 바로 이 마을 김대락이 내어준 사랑채 백하구려(白下舊廬)에 협동학교를 세워 국권회복운동을 시작했다. 또한 국권회복의 희망이 망국으로 사라지자 김대락이 이곳 일가친척 150여 명을 이끌고 독립운동 기지 개척과 무장투쟁을 위해 만주로 집단 이주를 하였다. 지난 4월호에 연재된 의 길안 만세시위 희생자 김필락도 내앞마을 의성 김씨 가문 인물이다. 김필락은 안동군 임하면 천전리(내앞마을) 81번지에서 퇴계학파의 거목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의 6대손이다. 그는 김진장의 외동아들이며, 사촌으로 주손 김응락, 김기락, 김의락(1909년 사망), 김재락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의성 김씨 천전파인데, 이 집안에서 의병으로 9명, 3·1운동으로 7명, 만주독립운동으로 11명, 파리장서 관련으로 1명, 기타 구국단, 신간회, 군자금 모금, 항일사상 고취로 10명 등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은 분이 38명에 이른다. 내앞마을에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이 세워진 데는 이런 역사가 있었다. 김필락 내앞마을(천전리) 81번지 김필락의 집은 우곡(雨谷 빗골) 256번지 6대조 제산 김성탁의 종가 옆이었고, 257번지 백하 김대락의 집과 담 하나 사이의 옆집이었으며, 일송 김동삼의 집과도 1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김필락은 5세 연하의 김동삼과 함께 자신보다 28세나 위인 김대락을 어른이자 스승으로 모시며 자랐다. 내앞마을 일가친척들이 만주로 떠난 뒤 김필락은 1915년경 길안천을 끼고 약 20리(8km) 동남쪽에 있는 임하면 오대리로 이사했다. 오대리에는 그의 5대조와 아버지 산소가 있었고, 삼촌과 고모가 살고 있었으며, 오대리의 된도랑 보를 소유하고 있어서 전부터 자주 내왕하던 동네였다. 임하면 오대리에서 길안면 산하리 사이 강변에는 ‘쑤’라고 하는 넓은 황무지가 있었는데, 김필락의 증조부가 이 오대 된도랑변의 들을 수리 안전답으로 만들기 위해 보를 쌓고, 강물이 오대들에 범람하지 못하게 산하리에서 오대리까지 길게 제방을 쌓고 미류나무를 심어 넓은 간척지를 확보했다. 옛부터 간척을 하면 간척자에게 그 땅을 주었다. 그러나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하면서 김필락 집안의 간척토지를 하천으로 사정하여 소유권을 빼앗았다. 김필락이 오대리로 이주한 데는 빼앗긴 간척지를 되찾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손두원·김필락의 순국 김필락은 오대리의 토착 주민인 고모네 손두원과 손을 잡고 오대리 친인척을 동원하여 길안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셋째 숙모 친정 집안 정성흠 등도 가담시켰으며, 아들 김병덕이 나서 친구들을 동참시켰다. 이들 주도 인물들은 지연과 혈연으로, 그리고 자주독립 의식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독립운동의 핵심요원이 되었다. 길안주재소에는 정보담당 한인 순사 박덕한이 있어 길안 주변지역을 파악하고 있었다. 길안주재소는 42세의 김술병과 한 살 아래 정성흠을 심문하여 시위현장에 나타나지 않은 김필락과 손두원을 주도자로 지목했다. 또한 박덕환을 통해 김필락 집안의 위상, 김대락과 김동삼 등 내앞마을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김필락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안동경찰서는 보고를 받고 길안 만세시위 주도자를 살해하여 재발 방지를 기하고, 그 과정에서 민란이 일어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처리하도록 지시하였다. 길안주재소는 먼저 손두원부터 ‘처치’하기로 계획했다. 내앞마을 중심 집안사람인 김필락의 위상을 고려할 때 그를 ‘처치’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집단 반발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손두원을 처치하면 김필락이 압박감을 느껴 자수해 오든지, 제 발로 도망하게 하여 지역의 반발을 최소화하고 싶었다. 3월 23일, 사건 이틀째 되는 날 주재소장이 스기모도(杉本) 순사와 박덕환을 출동시켰다. 오대동에 온 그들은 손두원 집이라 생각한 집에 들이닥쳐 창호지에 총구를 들이밀고, “손두원 나와!” 하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 집은 임핫어른 손씨 집이었다. 동장이 놀라 달려나왔다. 동장은 경찰이 손두원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동장의 직책으로 손두원 집으로 안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장은 ‘손두원을 연행해 가겠지’ 생각하여 집을 가르쳐 주고는 돌아왔다. 동장이 자신의 집 대문에 들어서기 전에 세발의 총소리가 났다. 동장은 손두원이 희생당한 것으로 짐작했으나 두려워 현장으로 달려가지 못했다. (권장환 증언) 2012년 8월 길안 독립만세운동 사적 조사위원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순사들이 손두원 집에 들어섰을 때 손두원은 쇠죽을 끓이느라 아궁이 앞에 앉아 있었다 한다. “네가 손두원이냐?” 순사가 묻자, 손두원이 일어서며, “그렇다.” 하고 대답하자 곧바로 총을 발사했다. 손두원이 오른쪽 어깨를 맞고 푹 꼬꾸라지자 순사들은 손두원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돌아서는 순간 손두원이 벌떡 일어나 왼손으로 신고 있던 나막신을 집어 들고 순사 뒷꼭지를 후려갈겼다. 순사는 놀라서 돌아서며 다시 총을 발사했다. 손두원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김필락의 최후 김필락은 그 소식을 전해 들었으나, ‘고모의 조카 손두원이 나 때문에 죽음을 당했는데…’ 또한 ‘내가 피신하면 동네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텐데….’하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김필락은 동네를 돌며 말했다. “오늘밤 일본 순사들이 내려와 분탕질을 칠 터인데, 나만 당하면 되니까 모두들 걱정하지 마시오.” 김필락의 아내 용각댁과 며느리 구계댁 이원순은 극력 피신을 권유했다. 특히 며느리는 시아버지 사랑방 앞에 거적대기를 펴고 꿇어 앉아 피신을 간청했다. 그러나 김필락은 “내가 피하면 동네가 쑥밭이 될 터이고, 또 두원이가 죽었는데 내가 살아 무엇하겠는가” 하며 피신을 거부했다. 길안 주재소는 김필락이 피신하기를 은밀히 귀뜸하며 기다렸으나 피신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더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3월 25일 밤 스기모토 순사를 다시 오대동으로 보냈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웃뫁, 양지뫁, 골마, 거랫마을로 이루어진 오대동의 웃뫁에 순사들이 들어섰을 때 어둠 속에서 급하게 도망하는 사람을 발견했다. 순사가 뒤쫓았다. 그 사람은 시위에 참여했던 중리어른으로 급한 김에 이웃 김팔룡의 집 변소에 뛰어들어 오물 속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순사가 촛불을 들고 변소까지 들어와 수색했다. 그는 들키지 않았으나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혔던지라 그 후 병을 얻어 곧 죽고 말았다. 집주인 김팔룡이 겁이 나서 뛰쳐나가 급히 피하자 순사가 뒤쫓으며 총을 쏘았는데 김필용은 맞지 않고 피신했다. 동네에서 소란이 일어나고 총소리가 들려와 위험이 닥쳐옴을 알면서도 김필락은 자기 집 사랑방에서 꼿꼿이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26일 새벽 1시경 수상한 자들을 놓친 순사들은 웃뫁에서 내려와 김필락 집 앞에서 소리쳤다. “김필락 나와!“ 28살 아들 김병덕이 밖으로 나오자 “너 말고, 네 애비 말이야!” 하고 소리쳤다. 사건 후 외동아들 김병덕은 끊임없이 주재소에 소환 조사를 당했다. 매번 불려 갈 때마다 고문을 당했다. 결국 부친 죽음의 충격에다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사촌들 중 김필락을 따라 길안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김기락과 그의 아들 3형제는 피신하여 다행히 잡혀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압박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김대락 등 일가들이 간 만주로 떠났다. 셋째 아들 김병윤은 만주의 빈강성 주하현 모산동 삼여구에 자리를 잡고 김대락의 아들 김형식이 교장으로 있는 민족학교의 역사선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