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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스크랩 [2021/06] 안용복(安龍福)과 홍순칠(洪淳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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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장까지 잘라내며 목숨 걸고 독도 지켜낸 투사들 


영웅을 영웅으로 대접하는 나라 되어야


글 | 김중위(월간 순국 편집고문)


조정에서는 안용복을 월경(越境)죄인으로 단죄하여 2년간이나 감옥에 가두었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또다시 어부들을 모아 울릉도로 갔다. 일본 어선을 발견한 안용복은 몽둥이로 쫓아내고, 일본 오키시마까지 건너가 왜구의 조선 침탈을 강력하게 항의했다. 울릉도 청년 홍순칠 역시 독도지킴이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인물이다. 그는 동료 7명과 함께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고 부산에 가서 사비로 기관총 등의 화기를 마련했다. 그러고 나서 이들은 모두 함께 맹장을 잘라냈다. 무인도에서 견뎌내기 위해서였다. 


  독도는 울릉도보다도 먼저 태어난 섬이다. 제주도 보다도 먼저 태어났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독도는 오랫동안 외롭게 살았다. 조선조 태종 이래로 울릉도와 독도에 공도(空島)정책을 써서 비워 두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6·25휴전회담 당시 한반도 서해의 북측 해안선 전체를 휴전선으로 하여 방어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엄청난 군사적 부담이 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남북해안 사이를 가로지르는 NLL(북방한계선)로 휴전선을 삼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과 대동소이한 이유에서라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바다 멀리 있는 섬들을 관리하는 비용이 많이 들어 섬을 비워 두었다는 얘기다. 


끊임없는 왜구의 약탈행위에 우리 백성이 시달리는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을 모두 본토로 불러들이고 섬을 비워두었던 것이다. 태종은 “우산(독도) 무릉(울릉)등처 안무사(于山 武陵 等處按撫使)”라는 직책을 김인우(金麟雨)라는 사람에게 내리고 울릉도민을 데리고 육지로 나오도록 독려까지 하였다.  


그러나 어찌 모든 주민을 한 사람 빠짐없이 모두를 데리고 나올 수야 있었을까? 생업 현장을 놓칠 수 없어 섬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에 왜구들에 의해 모조리 살육 당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결국 고기잡이 하던 어민들은 섬에서 살기를 포기하고 육지에 살면서 물때 따라 울릉과 독도근방에 나가 고기잡이 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살아야 했다. 그런 어부 중에 안용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훗날 그는 평생을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나라 땅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어부라는 사실도 잊은 채 일본과 싸운 사람이다. 


어느 해 봄(1692년 숙종 18년: 일본역 겐꾸로 5년). 안용복은 다른 어부들과 함께 울릉도 바닷가로 나갔다. 바로 그때 일본 배 오오따니(大谷), 무라까와(川村)의 배가 오끼의 후꾸우라를 출범하여 3월 26일 아침의 여명을 뚫고 울릉도의 남면 도동 앞에 있는 오징어 섬에 도착한 것이다. 이들은 혹시나 섬에 누가 있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한 심정으로 섬을 주시하면서 배를 저어갔다. 문득 바닷가에 무엇인가 인위적으로 말리려고 널어놓은 물체가 보였다. 자세히 본즉 그것은 전복이었다. 이에 놀란 일본 뱃사공들은 함부로 배를 섬에 접안시키지도 못하고 일단 배를 돌린 다음 관망하기로 하였다. 그때 한 낯선 사람이 해변에서 나타나 작은 배를 몰고 서서히 다가왔다. 이 사람이 바로 역사적인 인물 안용복(安龍福)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안용복은 이렇게 일본 어부들과 첫 대면이 시작되었다.


  이를 본 일본 선원들은 안용복이 타고 있는 배를 둘러싸고 총을 겨누면서 용건이 뭐냐고 물었다. 이에 안용복은 3년에 한 번씩 국왕의 명으로 전복을 잡으러 왔다고 말하고 있을 때 함께 온 조선 어민의 배 5척이 순식간에 나타났다. 조선 어민들과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자 일본 어민들은 훗날을 기약하기로 하고 일단 퇴각하였다. 이들은 고향에 돌아가자마자 거액을 투자한 선주 무라까와(村川市兵衛)로부터 호된 시달림을 받았다고 한다.(독도 비사(秘史): 요시다도오고(吉田東伍) 양도전 역)


이때부터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 지킴이로 나섰다. 일본 막부로부터 도해면허증을 받고 우리의 동해로 출어를 나오는 일본 어부들과의 쟁투는 한 차례 대면을 끝낸 1692년에 이어 1693년(숙종 19년. 일본역 겐로꾸 6년)부터 시작된다. 이 해에도 역시 이들 오오따니, 무라까와 배들이 일본 후꾸우라(福浦)를 출범하여 울릉도에 닻을 내리면서부터 안용복을 위시한 조선 어민들과의 싸움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때에도 일본 어부들이 “이 죽도는 오오따니, 무라까와 가에서 일본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섬”임을 강조하자 안용복은 완강하게 울릉도와 독도는 본래부터 조선 땅임을 역설하였다. 기세에 눌린 일본 어민들은 대화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조선 어부대표와 의논하겠다는 중재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조선 어부대표로 안용복과 박어둔(朴於屯)이 나서자 일본 어부들은 관부의 판단을 얻기 위해 이들을 대동하고 일본으로 갔다. (이에는 납치설과 자진 동행설이 엇갈린다. 자진동행설은 기왕이면 일본 어부를 따라 일본 본토로 들어가 흑백을 가려보자는 안용복의 속셈이 있었다는 것이다. 기골이 장대한 그로서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일본에 상륙한 안용복은 호키주(伯耆州)태수의 심문을 거쳐 도쿠가와 막부 관백의 앞에까지 갔다. 여기서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울릉 독도가 조선 땅임을 조리있게 또 줄기차게 주장하자 막부에서는 호키주 태수를 시켜 “울릉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다(鬱陵島 非日本界)”라는 문서를 써주고 안용복을 후대하여 귀국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사실 하나로 독도는 이미 사실상 조선 땅임을 일본이 확인해 준 것이다. 그러나 울릉도에서 조업하면서 살았던 일본인들은 울릉도가 필요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울릉도를 자신들의 땅으로 삼고 싶어 했다. 그들은 안용복을 “일본 영토인 죽도(울릉도)를 침범한 죄인”으로 몰아 조선의 동래부사에게 인계하면서 조선 어부의 일본 땅인 죽도 출어를 금지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 간계에 속은 조정에서는 그를 조정의 허가 없이 제 멋대로 국경을 넘나들었다는 죄를 물어 월경(越境)죄인으로 단죄하여 2년간이나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안용복은 이런 조정의 처사에도 굴하지 않고 감옥에서 풀려난 얼마 후인 1696년 봄에 또다시 어부들을 모아 울릉도로 갔다. 이때에도 일본 어선을 발견하고 안용복은 몽둥이로 쫓아냈다. 그리고 배를 타고 도망가는 일본 어선을 따라 일본 오키시마까지 건너가서 왜구의 조선 침탈을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때 안용복은 스스로 울릉자산도감세장(鬱陵子山島監稅將)이라는 관직을 가지고 왜구를 치죄하였다. 말하자면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관명도 스스로 만들어 썼다는 얘기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임난 때 의병들에게 언제 나라에서 관직을 주었던가? 스스로 의병장으로 앞장서 싸웠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조정에서는 남구만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안용복에게 관명사칭과 월경죄인으로 몰아 사형에 처하려 하였다. 그러나 1697년 1월에 도쿠가와 바쿠후로부터 울릉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이 분명하다는 외교문서가 오자 비로소 안용복은 곤장 몇 대와 유배로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어디로 유배되었고 또 언제 풀려났는지 어떤 기록도 없다고 한다. 


다만 경남안씨 문중 종친회가 1964년 가을에 울릉군 울릉읍 도동 약수공원 안에 높이 155미터 넓이 91센티 두께 31센티미터의 ‘안용복 장군 충혼비’를 세웠다. 또 1966년에는 그의 고향 부산 수영공원 안에 충혼탑을 세울 때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그에게 장군 칭호를 내렸다고 한다(김학준). 

그렇다면 홍순칠은 누구인가? 이 또한 독도지킴이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이다. 


1953년 한국은 6·25전란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을 때였다. 휴전회담의 성사가 눈앞에 보이자 남북은 피아간에 한 치의 땅이라도 더 가지려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 틈을 타서 일본은 비열하게도 독도에 눈독을 들이고 수도 없는 경비정으로 우리의 영해를 넘어 들어와 침탈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군은 이를 격퇴할 만큼의 여유도 없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한 울릉도 청년 홍순칠이 동료 7명과 함께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하고 경북 병사부에 가서 독도사수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폐품군복과 장비를 얻었다. 부산에 가서는 사비로 기관총 등의 화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이들은 모두 함께 맹장을 잘라냈다. 무인도에서 견뎌내기 위해서 취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한다(양태진). 


  채병덕 장군의 호위병으로 있다가 특무상사로 제대한 홍순칠은 의용수비대 대원 30여 명을 확보하고 이들을 데리고 1953년 4월 20일 독도에 상륙하여 우선 국기게양대를 설치하고 이튿날에는 태극기 게양식을 가졌다. 그리고 식수원을 찾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바위구멍 속에서 한 바가지도 안 되는 식수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드디어 전과를 올릴 수 있는 날이 찾아왔다. 5월 28일 일본 경비정이 독도 해안 150미터까지 접근해 오는 것을 기관총과 소총으로 격퇴시켰다. 6월 25일에는 2차로 일본경비정이 가제바위 앞에서 염탐하고 있는 것을 격퇴하였다. 7월 23일에는 일본의 쾌속정이 나타났다. 이 역시 기관총으로 몰아냈다. 그러자 이제는 일본 측이 한국 정부에 대해 항의를 하였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당시 백두진 국무총리 명의로 사설 무력단체 불허라는 내용과 함께 홍순칠 대장 앞으로 사회단체 등록을 요구하는 전문(電文)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러나 휴전 협정으로 사기가 오른 의용수비대는 8월 23일에도 또 그 이듬해 4월 22일에도 침입해 접근하는 일본 경비정을 결사항전을 통해 격퇴하였다. 이런 혁혁한 전과를 올린 의용수비대는 1956년 말 정부의 ‘독도경비대’의 창설과 함께 자신들의 임무를 인계시키고 해산되었다(신용하). 

이 얼마나 장한 영웅들인가. 뒤늦게 얼마 전에서야 이들을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니 천만다행이다. 영웅을 영웅으로 대접할 줄 아는 나라가 되어야 비로소 영웅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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