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Focus

순국시론 [2021/06] 젊은 특사 이위종의 ‘한국의 탄원’

페이지 정보

본문

법과 정의를 위한 외침 전 세계로 퍼져나가 


대한제국 젊은 특사 ‘프린스 리’의 통쾌한 울림


글 | 권용우(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위기에 몰린 헤이그 특사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7월 9일,이위종이 신문기자단 국제협회에서 「한국의 탄원(호소)」(A Plea for Korea)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 이위종은 젊고 귀족적인 외모를 가진 청년으로서, 프랑스어·러시아어·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자였다. 그가 바로 대한제국에서 온 왕자라는 소문이 기자들 사이에 퍼져있었다. 이렇게 해서, 젊은 특사 이위종이 프린스 리(Prince Ye)로서 새로운 대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1907년 6월 15일, 러시아의 제창에 의하여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Hague)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The International Peace Conference)가 개최되는 날이었다.


고종황제의 발걸음은 몹시 바빠졌다. 전 의정부 참찬(參贊) 이상설(李相卨)·전 평리원(平理院) 검사 이준(李儁)·전 러시아공사관 참서관(參書官) 이위종(李瑋鍾)을 특사로 삼아서 헤이그에 보내기로 하였다. 이상설이 정사(正使), 이준이 부사(副使)의 직을 맡았다.


이들 특사의 임무는 만국평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일제의 악랄한 대한정책(對韓政策)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일이었다. 이때 고종황제는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잃어버린 주권을 되찾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짐(朕)이 요즈음에 와서 더욱 어렵고 괴로워 둘러보아도 호소할 곳이 없는지라 폐하(陛下)께 번거롭게 진정할 뿐이며… 다행히 지금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하니 이 회의에서 짐의 사절로 하여금 우리나라의 형세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나라의 국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는 고종황제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Nikolai, A.) 2세에게 전달할 친서(親書)의 일부이다. 고종황제의 딱한 심정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때가 1907년 4월 22일이었다. 고종황제가 이준을 불러서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할 친서를 주면서 러시아의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로 떠나보냈다. 특사 이준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그는 일본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길을 재촉하였다. 부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에 도착하여 북간도에서 온 이상설과 만났다. 계획이 순조롭게 진척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5월 20일 러시아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이위종과도 만났다. 그리고 이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고, 특사의 임무를 시작하는 일이었다. 


  헤이그 특사를 얘기하려면 헐버트(Hulbert, H. B.)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고종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외국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1906년부터 미국·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 등의 국가원수들에게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하는 밀명(密命)을 받고 활동 중이었다. 고종황제는 헐버트에게도 임무를 주어 이들 헤이그 특사를 돕도록 하였다. 이들 특사들을 험난한 길로 떠나보내는 고종황제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것이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고종황제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이상설·이준·이위종 특사 세 사람은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이들 특사 일행은 회의장 드 리더잘(De Ridderzaal)을 둘러본 후 드용(De Jong) 호텔에 여장을 풀고, 호텔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특사로서의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들 특사의 마음은 참으로 바빴다. 세 사람이 이마를 마주하고, 자료를 살펴보면서 대책을 논의하였다. 6월 29일, 특사 일행은 만국평화회의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Nelidov)를 만나 고종황제의 신임장을 제시하고, 한국대표로 회의참석을 요청했지만 허사였다. 넬리도프도, 주최국 네덜란드도 한국에서 온 특사들에게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이들은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이양되었으므로, 평화회의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헤이그 특사, 만국평화회의에서 

「한국의 탄원(호소)」을 전하다 


일본의 방해공작도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고종황제를 감금하다시피하고, 그들의 네덜란드 현지 공관을 통해서 한국특사의 회의참석을 방해하였다.  한국속담에 “갈수록 수미산(須彌山)”이라는 말이 있다. 헤이그에 머물고 있는 특사 세 사람의 처지가 그러하였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특사 일행은 물러서지 않았다. 일본의 악랄한 대한정책과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각국의 대표들에게 알리는 프랑스어로 된 공고사(控告詞, 성명서)를 배포하였다. 이 공고사는 “일본은 황제의 재가 없이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을 체결하였으므로, 이 조약은 당연히 무효”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특사 일행은 각국 대표들을 찾아다니며, 공고사를 전달하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특사 일행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그것은 영국의 저명한 언론인 스테드(Stead, W. T.)였다. 그는 헤이그에서 발행되는 일간신문 「꾸리에 드 라 꽁페랑스」(Courrier de la Confe’rence)의 편집을 담당하는 기자였는데, 우리 특사들의 활동상황을 호의적으로 보도해주었다. 특히, 6월 30일자에는 우리 특사가 각국 대표들에게 보낸 공고사를 게재하였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뉴욕 헤럴드」(The New York Herald)에도 대한제국의 특사가 헤이그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하였다.


이로써 우리 특사들의 활동상황이 차츰 빛을 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우리 특사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7월 9일, 이위종이 신문기자단 국제협회에서 「한국의 탄원(호소)」(A Plea for Korea)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할 기회를 가졌다. 그런데 이위종은 젊고 귀족적인 외모를 가진 청년으로서, 프랑스어·러시아어·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자였다. 그리고 그가 바로 대한제국에서 온 왕자라는 소문이 기자들 사이에 퍼져있었다. 젊은 왕자가 한 나라의 대표로서, 특사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기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갔다. 


이때 이준의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이상설에게 전달되었다. “대감께서도 영어를 하시지만, 이곳 유럽에는 영어보다 프랑스어가 널리 통하는 곳이니, 이 참서관이 대한제국의 젊은 왕자로서 유창한 프랑스어로 기자들을 대상으로 연설을 하게 되면 좋을 듯합니다.” 이상설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특사 세 사람이 오랜만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굳게 손을 맞잡았다. 우리나라 속담에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젊은 특사 이위종이 프린스 리(Prince Ye)로서 새로운 대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1907년 7월 9일, 만국평화회의장 앞에서 프린스 리의 연설의 막이 올랐다. 프린스 리는 일본의 대한정책의 기만성과 군대를 동원한 강압에 의하여 을사오조약이 체결되었고, 대한제국의 자주권(自主權)을 빼앗아 갔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설명하였다. 이로써 일제의 기만성과 잔인성이 세계만방에 폭로되었다. 

프린스 리는 유창한 프랑스어로 연설을 계속 이어갔다.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은 1905년의 조약이 만국공법(萬國公法)에 따른 합법적인 조약인지 아닌지를 심판받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 불법적인 조약을 상설중재재판소에서 심판받아 일본의 대한제국 침탈행위를 전 세계에 알리고자 합니다.”


만장한 기자들이 우레 같은 박수를 보내왔다. 이 얼마나 통쾌한 울림이었던가. 프린스 리의 법(法)과 정의를 위한 외침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순간이었다.   


최신글

  • 글이 없습니다.

순국Inside

순국Net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