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항쟁사 [2021/06] 6·25전쟁 71주년을 맞이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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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장병·파학살양민 그리고 전쟁도발자
‘코리아에서의 학살’ 다시 기억해야
글 | 김학준(단국대학교 석좌교수)
민족적 참극이었던 6·25전쟁이 일어났던 때로부터 71년이 지났다. 돌이켜 생각하면, 정말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이 절박한 국가존망의 위기 속에서 대한민국을 구출하는 데 앞장을 섰던 사람들이 바로 국군이었다. 국가 그 자체가 취약했던 터에 국군이라고 해서 튼실했었겠는가. 훈련과 장비 모두 부족했다. 그러했지만, 육군이 주축이 된 국군의 장병은 목숨을 걸고 침략자들에 맞서 싸워 나라를 지켜냈다.
지금도 고마움을 잊을 수 없는 호국장병 첫째, 대한민국을 지켜준 호국장병이다. 그때 대한민국은 건국된 때로부터 2년이 채 되지 않은, 정확히 말해 1년 10개월밖에 되지 않은 신생국가이었으며, 동시에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흔들면 무너질 수 있는 취약국가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이 남침을 개시한 지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긴 채 피난길에 올랐던 사실, 그리고 이후 계속해서 후퇴를 거듭하며 첫 임시수도 대전도 빼앗기고 대구로까지 후퇴한 뒤 결국 한반도의 끝자락의 부산에 정착한 사실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그 자체가 얼마나 취약한 국가였는가를 말해주었다. 그러했지만, 육군이 주축이 된 국군의 장병은 글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침략자들에 맞서 싸워 나라를 지켜냈다. 특히 낙동강전선에서 사투한 장병은 “여기서 밀리면 대한민국은 끝이니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라는 비장한 각오로 싸워 마침내 반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천상륙작전 성공과 서울 탈환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 일련의 전투에는 학생들과 재일동포 청년들도 참가했다. 이 전쟁에는 한국인만이 참전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과 영국 및 캐나다를 비롯한 구미국가들은 물론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까지 포함해 글자 그대로 5대양 6대주로부터 수많은 젊은이가 유엔의 깃발 아래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멀고 먼 이 ‘미지(未知)의 나라’로 뛰어들었고 때로는 목숨을 바쳤다. 전사자 가운데는 호주의 경우, 신혼의 20대 신랑이 포함됐다. 필자는 홀로 된 부인이 지금도 부산의 유엔군공동묘지에 묻힌 남편의 묘지를 찾는다는 기사를 접하고는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고하게 희생된 양민 둘째, 이 전쟁에서 희생된 무고한 양민이다. 6·25전쟁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비(非)전투원의 희생, 곧 양민의 희생이 아주 컸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양민학살은 세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북한군에 의한 학살이다. 북한군의 남한점령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으나 대체로 3개월에 걸쳤는데, 자신이 점령한 지역에서 불법적인 ‘인민재판’을 통해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거나 적대적인 대한민국 국민을 ‘반동’으로 몰아 학살했으며, 유엔군의 반격에 따라 후퇴하면서는 그들이 투옥했던 대한민국 국민을 학살했다. 불행은 한국군에 의해서도 이어졌다. 남침하는 북한군에 호응할 것으로 예단되는 ‘좌파성향’의 국민을 정당한 재판 없이 죽인 것이다. 국민보도연맹 가입자에 대한 집단학살이 그 대표적 사례였다. 미군도 저질렀다.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에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의 학살이 그 대표적 사례다. 피난민을 자신에게 도전할 잠재적 ‘적군’으로 오판해 죽였다고 훗날 후회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미 죽은 뒤였다. 피카소의 「코리아에서의 학살」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스페인의 세계적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1951년에 제작한 「코리아에서의 학살」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이미 1937년에 양민학살을 주제로 한 「게르니카」를 제작했었다. 스페인의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를 지원하기 위해 나치독일의 히틀러가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게르니카를 폭격해 수많은 무고한 주민들을 학살한 참극을 그림으로 고발했던 피카소는, 1950년 말에 황해도 신천군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을 소재로 「코리아에서의 학살」을 제작했던 것이다. 이 유명한 그림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됐다. 코리아의 산천을 배경으로, 철갑과 무기로 무장한 가해자들이 총과 칼을 들고 서 있고, 그들 앞에 가엾은 코리언들이 벌거벗은 채 공포 속에 떨고 서 있다. 피카소는 당시 프랑스공산당 당원이었는데도 가해자가 어느 쪽 소속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그래서 프랑스공산당은 가해자를 왜 미군으로 특정하지 않았느냐고 힐난했다. 그러한데도 소련과 북한은 가해자가 ‘미제국주의자’라고 우겼다. 서양 지식인사회에서 ‘코리아에서의 전쟁’ 곧 6·25전쟁이라고 하면 금세 떠올리는 이 그림의 원본이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5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전시된다는 보도에 접하면서, 필자는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 원화를 보게 되었다니 다행스럽게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무력하기만 했던 우리 겨레의 참으로 처참한 모습을 확인하게 됐다는 사실에 서글픔을 느꼈다. 우리는 이 전쟁으로 희생된 양민을 다시 기억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겪어야 했던 불쌍한 조선=한국인의 운명을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민족에게 큰 죄를 지은 북한의 전쟁도발자들 그런데도 ‘좌파’ 학자들은 이 전쟁이 근본적으로 ‘인민해방전쟁’이었으므로 누가 전쟁을 시작했는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라고 우긴다. 그렇지만 전쟁발발 71주년을 맞이한 오늘날의 시점에서도 우리는 전쟁도발자들을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종합적으로 말해, 6·25전쟁은 이 땅에서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될 것임을 가르친다. 비록 더디다고 해도 종국적으로 평화가 뿌리 내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