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전설 [2021/06] 3월의 전설(71회) ┃ 경기도 장단군의 만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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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치열했던 독립투쟁
면사무소 앞에서 일장기 불태워
글 | 이정은(3·1운동기념사업회장)
장단군은 경기도 서북부의 38선과 휴전선이 겹치는 지역이다. 해방 당시 10개 면 67개 동리가 있었는데, 67개 동리 중 절반이 넘는(54%) 36개 동리가 북한에 있고, 나머지 31개 동리 중 22개는 파주군, 9개는 연천군으로 나뉘어져 있다. 강상면, 대남면, 소남면 전부와 진서면과 장도면 대부분이 미수복지구이다. 1919년 3월 이래 장단군에서는 27차례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전국에서 다섯째 안에 드는 치열한 만세시위 지역이었다.
장도면 5일 연속 산상 봉화시위
3월 31일 장도면사무소 앞 시위 3월 31일 이병성 등이 태극기를 떠받들고 우리 동리에 왔다. 나는 자진하여 그 대열에 참가했다. 우리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중리의 신촌(新村)·냉정(冷井), 상리(上里)의 서두정(西頭井)을 거쳐 고읍리에 있는 면사무소에 이르렀다. 이병성이 가지고 온 태극기를 중리의 김운선(金雲先)과 나, 이병성 3명이 면사무소의 문기둥에 세웠다. 내가 면장 윤좌영에 말했다. “면 사무를 보지 말라!” 이병성과 이운선이 면장을 향하여 “비치한 일본 국기를 내 놓으라!”고 명했다. 소사가 일장기를 가져왔다. “네 손으로 태워라!” 면장은 못하겠다고 거부했다. 분노한 이병성은 큰 소리로 모여든 약 200명에게 향하여 외쳤다. “이제부터 이병성이 일장기를 불태우겠다!” 이병성은 부근의 대서업자 집 앞 노상에서 일장기를 불에 태웠다. 이윤성 검사 앞에서 말했다. 나는 3월 30일 오후 7시경 동민 전부를 불러모아 함께 신촌동의 산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반복하여 외쳤다. 31일 이병성이 큰 태극기를 떠받들고 약 30명의 선두에 서서 우리 동네로 왔다. 나는 이웃 임순경(林順京)에게 “빨리 동민 전부에게 면사무소로 오도록 전하여 달라”고 해놓고, 이병성의 일행에 참가하여 면사무소로 갔다. 연 5일의 봉화시위를 주도하고 여섯째 날에는 면사무소로 군중을 이끌고 가서 일장기를 태운 이병성은 징역 2년 6월에 가중처벌을 받았다. 김석준은 징역 10월에, 이윤성·권춘근·한경춘·윤상훈·이수봉을 징역 8월, 이택신이 징역 6월에 처해졌다. 3월 28일 장도면 항동리 1919년 3월 28일 밤 같은 장도면의 항동리에서는 우정시(禹楨時, 34세, 농업)와 우정화(禹楨和, 26세, 농업)가 항동리 이민을 불러 모았다. “우리가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은….” 그는 20여 명의 마을 사람들에게 독립만세 시위운동 취지를 설명했다. 만세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터라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동리민을 이끌고 도덕암산(道德岩山)에 올라갔다. 산 위에 봉화를 올리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29일 밤에는 동리의 시라위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틀 동안 항동리의 도덕암산과 시라위산에서 봉화시위를 벌인 후, 사흘째 되는 3월 30일 밤에는 “면사무소로 가자!”는 외침과 함께, 동리 사람 약 70명이 태극기를 선두에 세우고 대열을 지어 고덕리(古德里)에 있는 장도면 사무소 앞으로 나아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밤 11시경에는 군중 약 150명이 석주원리(石柱院里)에 있는 면장 윤좌영(尹左榮) 집으로 쳐들어가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연사흘 야간 만세시위였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4월 2일 우정시, 우정화 두 사람은 네 번째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날은 오전 10시경부터 항동리 구시장에서 태극기를 떠받들고 이민들, 고랑포(高浪浦) 시장에 가는 사람 100여 명과 같이 정오가 될 때까지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26일 진남면 3월 26일 밤 진남면 동장리 사는 이창영(李昶永, 39세, 여인숙업)과 강규수(姜奎秀, 39세, 농업)는 한기동(韓基東, 17세, 여인숙업), 정순만(鄭順萬, 17세), 백태산(白泰山, 24세), 조진행(趙秦行, 35세), 이성구(李聲九, 32세), 양재영(梁在瑛, 30세), 정종락(鄭鍾樂, 30세)은 진남면 동장리에 있는 사립 성화(聖化)학교 뒤에 집합한 1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했다. 그후 이창영은 군중에게 외쳤다. “진남면사무소로 갑시다!” “갑시다!” 이창영·강규수·한기동·정순만이 선두에 서서 면사무소로 몰려갔다. 이창영·강규수는 외쳤다. “면장을 죽이라! 면사무소를 부숴라!” 이창영은 가지고 있던 몽둥이로 면사무소의 장지문을 쳐 부수었다. 군중들도 합세하여 돌 또는 흙덩이를 던졌다. 그러나 부서진 것은 면사무소 현관 유리 17매와 입구 문등(門燈)의 유리 4매에 그쳤다. 이창영 징역 2년, 강규수 징역 1년 6월, 한기동·정순만은 각 징역 1년을 받았다. 4월 1일·3일 대남면 대남면 장좌리 사는 함정원(咸貞元, 42세, 농업)은 이재삼(李在三)과 의논하여 4월 1일 각 동리 동장 앞으로 통문을 작성했다. “오늘밤 동민 각자는 작은 태극기 1개, 5명마다 봉화 1개, 각 동마다 대형 태극기 1개씩을 가지고 대남면 위천리 용산동 면사무소 앞에 집합하시오!” 3월 29일 진서면 진서면 경릉리 이봉철(李奉哲, 24세, 농업)은 3월 29일 밤 11시경 동리민 100여 명과 같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 앞에서 시위를 했다. 그들은 면장 송원섭(宋遠燮)에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했으며, 면사무소에 있던 일본 국기 2개를 끄집어 내어 사무소 앞 마당에 놓고 군중의 눈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이를 불태워 버렸다. 장단군 독립만세시위는 면 단위 또는 동리 단위로 한 지역에서 3~5회 연속 산상 봉화시위에 이은 면사무소 앞 시위와, 일장기를 불태우는 등 독특한 특징을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