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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더 생각하는 역사 [2021/07] 대한제국은 왜 멸망했나?┃러일전쟁과 한국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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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남의 나라 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졌나 


망국의 책임 묻는 사관(史官)은 지금도 없다


글 | 신복룡(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왜 애꿎게 남의 나라 전쟁에 조선이 멸망했는가? 왜 남의 나라 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졌는가? 사실 조선의 멸망은 러일전쟁의 유탄(流彈)을 맞은 것이 아니다. 조선이 멸망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우리 조상이 못난 탓이었다. 특히 절대군주 아래에서 국가의 멸망은 군주를 포함한 지배 계급의 책임이다. 세계사의 입장에서 보면 러일전쟁은 대륙 국가의 해양 진출 욕망과 해양 국가의 대륙 상륙 정책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었고, 문화사로서는 황색인종이 백색인종을 이긴 근현대사 최초의 전쟁이었으며, 한국사의 입장에서 보면 멸망의 봉인(封印) 과정이었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설명하면서 부딪치는 가장 서글픈 사실은, 왜 애꿎게 남의 나라 전쟁에 조선이 멸망했는가? 왜 남의 나라 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졌는가? 하는 사실이다. 조선의 멸망은 러일전쟁의 유탄(流彈)을 맞은 것인가? 아니다. 조선이 멸망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전쟁의 성격이나 원인 또는 결과를 단일 명제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러일전쟁은 기본적으로 청일전쟁에 승리하고서도 전리품을 러시아에 빼앗긴 데 대한 일본의 복수극이었다. 


러시아는 그 기쁨을 곧 잊었고, 일본이 얼마나 절치부심하고 있었는가에 대하여 무심했다. 세계사의 입장에서 보면 러일전쟁은 대륙 국가의 해양 진출 욕망과 해양 국가의 대륙 상륙 정책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이었고, 문화사로서는 황색인종이 백색인종을 이긴 근현대사 최초의 전쟁이었으며, 한국사의 입장에서 보면 멸망의 봉인(封印) 과정이었다. 


조선 비극의 단초, 아관파천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으로서 당초부터 잘못된 선택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이었다. 한 국가의 왕이 나라의 어지러움을 빙자하여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야반도주한 것 자체가 그리 떳떳한 일이 아니었다. 민비(閔妃) 암살 이후 고종(高宗)이 겪어야 했던 트라우마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왜 하필이면 러시아공사관으로 가야만 했을까? 물론 미국에도 망명의 의사를 타진한 것은 사실이고, 그로부터 거절 당할 때부터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미국은 그제나 이제나 일본의 국익에 배치되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늪과 같은 한반도 문제에 깊이 연루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고종의 망명을 거절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거절이 아관파천을 합리화해주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 거절했다면, 왕은 궁중에서 굳건히 자리를 잡고 죽기를 작정하고 항쟁하는 것이 국왕으로서의 도리였다. 그러나 그는 망국을 걱정하기에 앞서 음식에 독이 들었을지 모른다는 점이 더 두려웠다. 그는 왕비처럼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가위가 눌렸다.


명군(明君)의 시대라 하더라도 위기였던 시절에 조정의 상하가 부패했다는 것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제국주의가 후진국을 점탈할 때 쓰는 가장 흔한 수법은 지배 계급을 매수하는 것이다. 어느 나라, 어느 역사에나 돈을 얻고자 조국을 버리는 무리는 늘 있었으니, 조선 멸망기라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조정이 부패한 나라에서 매수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수법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러시아는 부패한 왕실·관료 매수

일본은 교활한 지식인 매수 


  이를테면 꼭 같이 조선의 고위층을 매수했지만, 러시아는 부패한 왕실과 관료를 매수했고, 일본은 교활한 지식인을 매수했다. 조선으로서는 그 어느 쪽이든 멸망의 길로 갔겠지만, 역사의 교훈에 따르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를 보아도 교활한 지식인을 매수하는 것이 부패한 관료를 매수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이 점에서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는 이미 영국이 이집트를 식민화하는 데 공을 세운 크로머 경(Lord Cromer)의 통치술을 숙지했고, 인도 총독 밀러(Alfred Milner)의 생애를 공부했으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를 찾아가 개인적인 지도를 받았다. 그는 러일전쟁이 개전하기 이전에 왕실과 교활한 지식인들의 매수 작업을 마친 상태였다. (지금도 이집트인들이 영국을 관광할 때면 꼭 크로머 경의 묘소를 참배하는데, 이는 그가 이집트 경제의 기틀을 장만해 준 데 대한 감사의 순례가 아니라 침을 뱉기 위해서이다.)


친일파 송병준(宋秉畯)이 한일합병 비용으로 1억 엔을 요구했을 때, 이토 히로부미는 3천만 엔이면 충분하다고 계산을 마친 상태였다. 그 가운데에는 고종에게 건넨 30만 엔과 왕비인 엄비(嚴妃)에게 건넨 1만 엔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척족과 친일 대신에게 줄 몫도 계상되어 있었다. 그것도 일본인답게 차등을 두어 2만 엔에서 10만 엔씩 주었다. 당시 1엔은 구매력으로 보아 지금의 한화 2만 원에 해당한다. 


금전 수수를 확실하게 증명하고자 수수는 다이이치깅코(第一銀行)의 수표로 거래했고, 고관들에게 돈을 건넬 때는 꼭 한국인을 입회시켰다. 수표 전달의 책임자는 도다 도노모(戶田賴毛)였는데, 그는 일본의 거상이며 탁월한 금융전문가였다. 조선 측의 전달 책임 및 입회자는 현영운(玄暎運)이었는데, 그는 게이오대학(慶應義塾) 출신으로 당시 시종원(侍從院) 시종(侍從)으로 왕실의 총애를 받은 영악한 엘리트 관료였다. 


러시아는 처음에는 이완용(李完用)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당시로서 가장 정치적 후각이 발달했던 이완용은 러시아의 장래를 기대하지 않고, 미국 공사관을 드나들다가, 결국 조선이 일본에 합방되리라는 수읽기가 끝나자 친일파로 변절했다. 그는 언어의 수재로서, 조선을 둘러싼 당시의 국제 판세를 가장 정확히 읽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먹이 사냥에서 송병준만큼 고기를 차지하지 못했다.


러시아 공사 웨베르(K. I. Weber)는 외교가에서 평판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부패한 조선의 관료를 다루는 솜씨가 마치 중국의 죽은 반초(班超)가 살아온 듯했다고 양계초(梁啓超)는 회고했다. 그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호텔을 개업한 손탁(Antoinette Sontag)의 형부였다. 그런 그가 멕시코 공사로 전보되자 스페이어(Alexis de Speyer)가 부임했는데, 그는 매우 천박하고 우악스러운 사람이었다. 


일본의 매수 자금이 이토 히로부미의 역량에 의한 재벌의 후원과 국고로 충당한 것과는 달리 러시아는 매수 자금을 대장성에서 조달할 형편이 못되었다. 따라서 자금의 액수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인색하다고 여길 수 있었고, 조달 방법도 현지 외교관의 수완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조선에서의 이권 사업에서 받은 돈을 매수 자금으로 썼다. 이를테면 러시아가 조선에 뿌린 자금줄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용암포(龍巖浦)를 기반으로 하는 압록강 주변 벌채권이었는데 그 물주가 저 유명한 미국 배우 율 브린너(Yul Brynner)의 아버지인 브리네르(Y. I. Bryner)였다.


러시아 내부의 부패와 균열 

러일전쟁을 일본 승리로 이끈 요인  


러일전쟁의 개전과 함께 세계의 많은 전략가는 일본이 패배하리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 황실은 의외로 부패해 있었고, 군비는 실속 없이 허술했다. 이곳에도 부패는 여전했다. 러시아 육군은 코사크병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는데, 용병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수입이 넉넉지 않은 이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할 이유가 없었다. 러시아 사병들은 “적군의 총탄보다 보급계 하사가 더 무서웠다.” 병참이 허술하고 부패하다 보니 러시아 병사들은 만주와 조선에서 주로 민가를 약탈하여 연명했다. 그들은 조국을 위해 죽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차르(Tsar) 황실이 무너지는 것이 그들의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해군은 더욱 열악했다. 흑해함대가 출항했으나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는 영국의 방해로 희망봉을 통과하여 인도양을 거쳐 대한 해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전세가 기울어 있었다. 거리가 멀다 보니 무기보다 연료인 석탄의 적재량이 많아 하중을 견디지 못하는 함선의 엔진에 무리가 와 예인선으로 끌고 가야 했다. 인근 항구에 정박하여 수리를 하고 싶었으나 이미 일본이 외교력을 발휘하여 각국에서 입항을 거절 당했다. 러시아함대는 발틱해를 출발한 지 7개월 반 만에 쓰시마에 도착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군부대신인 크로파트킨(A. Kuropatkin)이 스스로 강등하여 극동군사령관으로 현지에 부임해서 전투를 지휘했으나 이미 전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흑해함대가 대한 해협에서 침몰하던 시간에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Nikolas II)는 패전 보고를 받고서도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이런 나라가 이긴 전쟁의 사례는 역사에 없다. 


러일전쟁을 설명하면서 만나는 미묘한 질문은 미국의 태도이다. 한미관계 160년의 역사에서 한국은 늘 미국에 대한 중국과 일본의 종속변수였다. 한국이 독립변수인 적은 없다.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미국은 러일전쟁 당시 조선의 운명에 대하여 아리고 쓰릴 것이 없었다. 그들은 끝까지 일본 편이었다. 


미국은 러일전쟁의 전운이 감돌자 상황을 파악하고자 조지 케난(George Kennan, Elder)을 일본에 파견했다. 그는 극동에 온 김에 1904~1905년에 두 번 조선에 들러 고종을 만나보고 한국의 의중을 떠보면서, 일본이 득세할 경우에 어떤 대책을 강구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왕실의 대답인즉, “중전이 일본 지도를 그려 가마솥에 삶았기 때문에 별 탈이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아연실색한 케난은 조선이 일본에 합병되는 것이 순리라고 회고록에 글을 남겼다. 그가 보기에 한국은 아이티(Haiti)보다 나을 것이 없는 나라였다. 케난 가(家)는 이렇게 2대에 걸쳐 한국과 악연을 맺고 못할 짓을 했다.


전쟁을 준비하면서 일본은 하버드대학(Havard University)의 인맥을 통하여 루즈벨트(Theodor Roosevelt)에게 전쟁에 관한 자문을 요청했다. 루즈벨트는 곧 필리핀 총독 맥아더 장군(Arthur MacArthur)에게 일본을 돕도록 훈령했고, 총독은 자기 아들이자 부관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대위를 일본에 파견하여 정책을 조언하도록 지시했다. 맥아더는 일본에 출장하여 기라성 같은 일본의 전직 쇼군(將軍)들을 앞에 놓고 훈시했다. 그때 맥아더의 나이가 24세였다. 그는 아마 세상이 돈짝만 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때 그가 조선을 방문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 노훠크(Norfolk)에 있는 그의 박물관에는 고종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형태로든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으로 돌아오며 맥아더는 뱃전에서 “조선은 장차 일본의 소국이 되겠군” 하고 중얼거렸다.


왜 남의 나라의 러일전쟁에서 조선이 멸망했는가? 하는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물어 본다면 우리 조상이 못난 탓이었다. 특히 절대군주 아래에서 국가의 멸망은 군주를 포함한 지배 계급의 책임이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에는 망국의 책임을 묻는 사관(史官)이 없다. 그것이 서글프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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