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항쟁사 [2021/08] 망국과 해방 그리고 분단이 겹친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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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과 희망 교차하는 8월, 분단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나라를 망친 죄보다 더 큰 죄는 없다
글 | 김학준(단국대학교 석좌교수)
8월을 영어로 ‘오거스트(August)’라고 말한다. 이 단어는 ‘존엄’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서 나왔다. 중국인에게도 8월은 상서로운 달이다. 중국 고전에서 시작된 칠전팔기(七顚八起)라는 말에 보이듯, 중국인은 ‘8’을 좋은 뜻으로, 더 나아가 ‘무궁무진’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반면 우리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8월은 ‘존엄’이나 ‘무궁무진’과는 달리 절망과 희망이 교차된 달이었다. 1910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은 일제의 무력 앞에 국권을 잃었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1945년 8월 15일에 일제는 패망했으며 우리는 다시 빛을 찾았다. 그러나 광복은 분단과 함께 왔고, 분단은 71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분단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둘러싼 오래된 논쟁을 다시 다루기로 하자.
서양과 중국의 8월과 한민족의 8월
8월을 영어로 ‘오거스트(August)’라고 말한다. 이 단어는 ‘존엄’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서 나왔는데, 그러면 ‘8월’과 ‘존엄’이 어떤 연유로 같은 뜻을 갖게 됐는가? 잠시 고대 로마의 역사로 돌아가기로 하자.
중국인에게 8월은 상서로운 달이다. 중국 고전에서 시작된 칠전팔기(七顚八起), 곧 ‘일곱 번 굴렀다가 여덟 번째 일어난다’라는 말에 보이듯, 중국인은 ‘8’을 좋은 뜻으로, 더 나아가 ‘무궁무진’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8월 8일 8시 8분에 개막식을 열었던 데서 ‘8’에 대한 중국인의 관념을 읽을 수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 있어서 8월은 ‘존엄’이나 ‘무궁무진’과는 달리 절망과 희망이 교차된 달이었다. 1910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은 일제의 무력 앞에 국권을 잃었다. 이것이 바로 경술국치로, 이 때문에 조선=한민족은 이민족의 노예로 전락해 절망 속에 온갖 수모와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외부책임론 vs 한국책임론
그때로부터 35년이 지난 1945년 8월 15일에 일제는 패망했으며 우리는 다시 빛을 찾았다. 희망의 앞날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광복은 분단과 함께 왔다. 그리고 그 분단은 71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분단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둘러싼 오래된 논쟁을 다시 다루기로 하자.

다른 한쪽에서는, 조선=한국책임론을 제기한다. 외부에 책임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책임이 있었다는 내인론(內人論)을 제기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 필자는 내인론에 공감한다. 우리에게 1차적 책임이 있었다는 뜻이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전시에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들 사이에서 회담을 열었다. 아시아·태평양지역과 관련해, 이 회담에서 주요 의제는 “일제가 패망한 뒤 그사이 일제가 불법적으로 점령했거나 탈취한 나라 또는 땅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였다. 이것을 흔히 전후처리문제라고 부른다.
한반도 문제는 바로 연합국 전시회담에서 전후처리문제의 하나로 다뤄졌다. 이것은 달리 표현한다면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더라면 이 회담에 상정되지 않았을 것임을 의미한다.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가 됐기에 일제의 ‘해체’를 다루는 회담에서 제기됐다는 뜻이다.
그러면 한반도는 왜 일제의 식민지가 됐던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강폭한 일제의 해외팽창정책과 식민지획득정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일제는 군사력을 꾸준히 증강시켰고 그 첫 목표물로 한반도를 지목한 뒤 단계적으로 침략해 들어왔던 것이니, 책임을 일제에게 묻는 것이 절대로 틀린 것은 아니다. 일제의 조선침략은 규탄되어야 마땅하다.
조선의 멸망은
권력층 부패에서 시작

더구나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언한 이후 대원군이 권력을 잃고 그 대신에 민비를 중심으로 하는 민씨척족세력이 권력의 중추를 장악하면서 국가는 이 집안의 사유물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이 시기에는 매관매직이 더욱 성행했으며, 돈으로 관직을 산 관리는 그 돈을 벌충하기 위해 백성을 수탈했기에 탐학은 더욱 심해져, 1894년에는 농민봉기가 충청·전라·경상의 3도 곳곳에서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그때의 부패상을 보여주는 한 사례가 민비의 ‘조카’로 인정됐으며 거기에 따라 민씨척족세력의 핵심이 된 민영익의 행적이다. 원래 콩죽이나 먹고 살 정도로 가난했던 집안 출신의 그가 이렇게 권력의 중심부로 진출하게 되자 재산을 모으는 일부터 시작했는데, 그 수단은 물론 매관매직과 가렴주구였다. 그 결과 그는 엄청난 재산을 모았는데도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이 긁어모았다. 고종의 시의였으며 갑신정변 때 개혁세력에 의해 칼을 맞아 죽게 됐던 민영익을 살려준 알렌조차 “나라를 위해서는 저러한 탐관오리는 죽는 것이 오히려 낫다”라고 혹평을 했다.
민영익은 자신의 안전이 불안해지자 많은 재산과 비복 가운데 일부는 조선에 그대로 남겨놓고 나머지 일부를 갖고 홍콩으로 달아나 큰 호텔을 빌려 여유롭게 생활했다.

최근에 .매국노 고종.이라는 책이 출판돼 널리 읽히고 있다고 한다. 나라는 안에서부터 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죄는 많지만 나라를 잃게 하는 죄만큼 큰 죄는 없다. 오늘의 시점에서도 곰곰이 생각해볼 주제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