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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1/08]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선 여성 선각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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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에서 남녀평등·조국독립 주춧돌 역할 


조국은 결코 남자만의 것 아니니

여성이여, 독립운동 주체로 나서라


글 | 편집부


여성 최초 일본 유학생이었던 김란사는 이화학당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틈만 나면 학생들에게 “꺼진 등에 불을 밝혀라”라고 가르쳤다. 그의 제자 중 유관순 열사가 있었다. 일본 도쿄에서 남학생 중심으로 2·8 독립선언이 준비되자, 황에스터는 “여성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 수레는 한쪽 바퀴만으로 달리지 못한다”고 열변하며 3·1운동의 도화선을 만들었다. 현 덕성여대의 전신인 근화여학교를 설립한 차미리사는 창학 이념으로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를 내세웠다. 이처럼 근대교육을 받은 여성 선각자들은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조국독립과 여성해방 실현에 앞장섰다.  


을사조약 이후 외세의 침략은 날로 거세지고 친일파들이 관직을 독점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나라를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커져갔다. 애국적 지식인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모았다. 실력 양성으로 주권을 회복하자! 그들은 대한자강회, 신민회 등을 조직해 교육과 언론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북돋우며 애국계몽운동에 나섰다. 


당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여성들의 활약이었다. 일본, 미국 등에서 유학하며 신문물을 접한 여성 선각자들은 조국은 결코 남자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외치며, 여성이 독립운동의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일깨우고 격려했다. 그리하여 식민지 조선에서 남녀평등과 조국독립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김란사 “꺼진 등에 불을 밝혀라”


김란사(1872~1919)는 평양에서 태어나 1893년 인천부 행정책임자 하상기와 결혼했다. 당시로는 만학도이자 유일한 기혼 학생이었던 그는 어린 학생들과 함께 이화학당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게이오기주쿠에서 1년간 수학했다. 최초의 여성 일본 유학생이었다. 1900년 미국 감리교 계통의 웨슬리대학에 입학, 1906년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과 동시에 미국 북감리교회 선교사인 메리 스크랜턴(Mary Scranton)을 도와 영어와 성서를 가르치면서 여성 계몽운동에 앞장섰고, 이후 이화학당에서 학생들에게 틈만 나면 “꺼진 등에 불을 밝혀라”라고 말했다. 특히 1907년부터 이화학당의 학생 자치단체인 ‘이문회’를 지도하면서 민족의 현실과 세계정세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는데, 제자 중에 유관순 열사가 있었다. 


1916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세계감리회총회에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해 2년간 미국에 머물며 신학을 공부하는 한편, 미국 전역을 돌며 동포들의 단결심과 애국심을 고취하고 독립자금 모금을 호소했다. 성금을 모아 1918년 한국 최초로 정동교회에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다. 이 파이프오르간의 지하 송풍실은 기미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을 찍어내는 비밀장소가 되었다.


1918년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1919년 의친왕의 밀지를 받고 파리로 떠나려고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지만, 1919년 3월 10일 베이징의 부영병원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차미리사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차미리사(1879~1955)는 서울에서 태어나 1896년 결혼해 2년 만에 남편과 사별했다. 이후 의료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이 세운 상동교회에 다니면서 미리사(Mellisa)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900년 우리나라 최초 여의사 박에스더가 미국에서 돌아온 것을 보고 유학을 결심했다. 선교사 호머 헐버트의 도움으로 1901년 중국 상하이의 감리교 학교에서 영어와 신학을 공부한 뒤 190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다. 항일단체 대동교육회와 대동보국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는가 하면, 대동공보 발간에 기여하고 한국부인회를 조직해 회장을 맡았다. 1910년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의 스캐리트성경학교에 입학했다. 


1912년 졸업 후 귀국해 배화학당 사감 겸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19년 종교교회에 여자 야학강습소를 설치했으며, 1920년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창립하고 여성해방이념을 표방한 기관지 『여자시론(女子時論)』을 발간했다. 이듬해 조선 최초의 전국여자순회강연단을 조직, 전국적인 계몽강연을 실시했다. 1921년 6월부터 10월까지 전국 73곳에서 순회강연을 펼쳤다. 가는 곳마다 여성들은 물론 남성들에게도 관심을 끌어 건물 밖 마당까지 청중이 몰려들었다. 동아일보는 7월 11일자에서 “조선 여자계의 일대 광명이며 생명 있는 신운동”이라고 격찬했다.


1923년 부인야학강습소의 명칭을 근화학원으로 바꾸고 1925년 근화여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았다. 창학 이념은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였다. 1927년 근우회 발기위원, 1929년 조선어 사전편찬사업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4년 여성들의 직업교육을 위해 근화여학교를 근화여자실업학교로 바꾸었으나, 민족교육을 못마땅하게 여긴 총독부의 압력으로 교장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근화’라는 이름은 현 덕성여자대학교의 전신인 ‘덕성’으로 바뀌었다. 광복 후 1948년 통일정부 수립을 호소하는 문화인 108인 성명에 동참하는 등 사회활동을 이어가다 1955년 눈을 감았다.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황에스터 “수레는 한쪽 바퀴만으로 달리지 못한다”


황에스터(1892~1971)는 평양에서 7남매 넷째 딸로 태어났다. 13세 되던 해 두 동생은 학교에 입학했는데 부모가 자신에게는 집안 살림을 돌보라고 하자, 단식투쟁 끝에 정진여학교 3학년에 입학했다. 졸업 후엔 서울 이화학당에서 유학했다.


평양 숭의여학교 교사로 부임해 일제의 감시를 피해가며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1913년에는 동료교사인 김경희와 교회 교우인 박정석과 함께 한국 최초의 여성 항일비밀결사대인 ‘송죽결사대’를 조직했다.


1918년 선교사 홀(Hall,R.S.)의 권유로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유학 중 김마리아·현덕신 등과 동경여자유학생회를 조직해 배일사상 고취와 애국심 고양에 노력했다. 그러던 중 1919년 남학생 중심으로 2·8독립선언이 준비되자 “조국은 결코 남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 여성들도 독립운동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 수레는 한쪽 바퀴만으로 달리지 못한다”는 내용의 열변을 토하며 2·8독립선언에 참여했다. 


3·1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어가던 3월 19일 일본 경찰에 잡혀 그해 8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여성계의 독립운동이 부진함을 개탄하던 김마리아와 함께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확대 재조직하고 총무직을 담당했다. 상해 임시정부로 군자금을 송달한 혐의로 검거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감옥생활을 하면서 동포 죄수들을 선도 계몽했다. 


1925년 미국으로 유학해 콜롬비아대학에서 교육학 석사를 받았다. 1928년 귀국 후 농촌계몽운동에 종사했다. 김노득, 최용신 등 일생을 농촌운동에 몸 바친 농촌계몽운동가들을 키워냈다. 1928년에 시작한 농촌계몽운동은 16년간 꾸준히 계속되어 여섯 개의 학교와 두 개의 교회를 세웠다.


6·25전쟁 중에는 미국의 12개 주를 순방하면서 구호품을 모아 조국으로 보냈다. 1952년에 귀국해 한미기술학교를 설립한 뒤 전쟁미망인과 고아를 위해 기술교육을 했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으며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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