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스크랩 [2021/09] 초산 김상윤 의사의 생애와 반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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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김원봉과 함께 일본 외무대신이 지목한
‘불령선인 거괴(巨魁) 10인’ 중 한 사람
글 | 이태룡(인천대학교 인천학연구원 독립운동사연구소장)
초산 김상윤 의사는 1919년 3·1만세의거에 참여한 후 서간도로 가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고 김원봉, 이종암, 동료들과 의열단을 창단하였다. 이듬해 3월부터 7월에 걸쳐 의열단의 ‘제1차 암살파괴계획’에 의해 서울과 밀양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일제에 의해 사건이 발각되어 실패한 후 12월 27일 밀양경찰서폭탄투척 의거에 최경학, 고인덕, 이종암 등과 참여한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상해와 북경을 오가며 의열단 간부로 활약하게 되었다. 일제의 기밀문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시찰인명부」에는 북경과 상해 등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그 산하 단체에서 활동하던 김구, 김두봉, 노백린, 박은식, 신익희, 안창호, 여운형,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조용은(조소앙) 등 56명의 핵심 지도자에 대한 정보가 소상히 기록돼 있는데, 그중에 의열단은 김상윤, 김원봉, 이종암, 한봉근 네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신흥무관학교 생활과 의열단 창단
1919년 3·1만세의거에 참여한 후 중국 간도 통화현 합니하(洽泥河) 소재 신흥학교(신흥무관학교 전신)에 들어갔고, 그해 6월에 김원봉, 서상락, 이성우, 이종암 등과 신흥무관학교에 재학 중임을 알 수 있다. 그는 ‘오늘의 상태는 신흥무관학교에서 학교 교육을 받는 것으로만 만족할 시기가 아니다. 조선독립의 목적 달성을 촉진하려면, 급극(急劇)한 행동을 취할 의열단이라 칭하는 결사를 조직하여 활동할 필요가 있다’ 하고 학교를 나와 길림으로 향했다.
그와 동료들은 그해 10월 중순까지 길림으로 가서 숙의할 것을 약속한 후 동료 10여 명이 모이자 의열단을 구성하였다. 조선독립의 목적 실현을 위하여 다수의 폭발물과 총기 등을 국내로 반입하여 조선총독부 요로(要路)의 대관, 일제앞잡이의 주요 인물을 살해하고, 주요 관공서 및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의 건물을 파괴하여 조선인의 인심을 자극하고, 조선독립에 경주(傾注)하게 하며, 또한 일제앞잡이에게 위협을 가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
제1차 암살파괴계획과 실행 미수
의열단에서 명명한 제1차 암살파괴계획은 1920년 3월부터 7월까지 김원봉의 지시에 따라 곽재기, 이성우가 밀양의 김병환과 진영의 강원석에게 보낸 폭탄 및 권총이 발각되어 폭탄과 권총 등이 압수되고, 암살파괴를 담당하기 위해 국내로 잠입한 의열단원과 폭탄 운반과 보관에 관련된 자 등 26명이 피체되어 오랜 심문 끝에 10명은 기소유예, 1명은 면소, 15명은 재판을 받은 사건이다.
이 계획에서 초산의 행적은 「곽재기 외 14인의 판결문」에서 곽재기의 진술에 드러나고 있다.
“(곽재기는) 대정 9년 3월 중에 안동현을 거쳐 경성으로 왔고, 그달 20일경 부산으로 가서 배행농(裵倖儂:배중세)을 방문하여 이일몽의 거처를 물었더니, 마산이나 밀양에 있다고 하여, 4일 후 밀양으로 가서 한봉근의 집에 머물고, 다음날 이일몽, 이병철과 만나 김원봉의 명령을 전하였다. 또한 신우동(申愚童:신철휴), 윤세주(尹世冑:윤소룡) 등도 만나 동인들에게 폭탄은 이일몽이 가지고 있으니, 결행할 때에는 신우동, 윤세주, 한봉근 3명과 김옥(金玉:김상윤) 4명으로 실행하라는 것을 말하였다.”
서울에서 실행할 폭탄제조와 실행 당일 배포할 전단지 인쇄 등을 위한 자금 마련을 하는 동안 의열단원은 서울과 밀양, 진영, 대구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피체되기에 이르렀다. 판결문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초산은 신철휴, 윤세주, 한봉근 등과 더불어 폭탄투척 실행 예정자였고, 서상락, 이수택, 이종암, 한봉근 5인만 피체를 면하였다.
밀양경찰서폭탄투척의거

“최수봉(崔壽鳳)은 1894년 3월 3일 경남 밀양군 상남면(上南面) 마산리(馬山里)에서 출생하였다. 호적상의 이름은 경학(敬鶴)이라 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향리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27세 되던 해에 사립동화학교(私立東和學校)에 입학하여 전홍균(全鴻均) 밑에서 2년간 수학하고 나서 1912년에 동래(東萊) 범어사(梵魚寺)에 입산, 명정학교(明正學校)를 졸업했다. 그리고 1913년에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하여 3학년까지 수료했다. 그는 한일합방이 되었을 적부터 조국 광복운동에 헌신할 결심을 하고 항일의식에 불타던 중, 남만주 지방으로 망명하여 봉천·안동 사이를 왕래하며 동지를 규합하다가, 한때 정주(定州)로 돌아와서 혹은 광산 노동에 종사하기도 하고 또 우편 집배인이 되어 일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노동하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3·1운동이 일어났던 것도 1년이 지나서 의열단원 고인덕(高仁德)으로부터 폭약과 폭탄과 제작기를 받아 산중에 들어가서 폭탄을 제조하여 동지 송혜덕(宋惠德)에게 맡겨두고 행동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한편, 고인덕은 1887년 경남 밀양군 읍내 2동에서 출생하여 대구 계성중학교(啓星中學校)를 졸업하고, 1818년에 조국독립운동에 몸 바쳐 일하려고 뜻을 결하고 분연히 만주로 건너갔다. 그리하여, 특히 3·1운동 이후에 길림과 상해 사이를 왕래하면서 활약하다가 의열단장 김원봉, 이종삼 등과 모의하고 상해에서 입수한 폭약과 폭탄 제조기 등을 휴대하고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와서 전기 최수봉에게 그 자재들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최수봉은 이리하여 준비된 폭탄을 갖고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장이 전 서원을 모아놓고 훈시한다는 정보를 듣고 이 기회를 놓칠세라 첫 탄을 경찰서를 향하여 힘 있게 던졌다. 이에 경찰서 안이 일대 수라장을 이루었으나 이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느낀 그는 다시 제2탄을 던지고 서문을 향하여 도주했다. 그러나 일경의 추적이 너무나 급박하니 그들에게 잡히기보다는 차라리 자살할 것을 결심하고 부근 민가에 뛰어들어 목을 칼로 찔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병원으로 끌려가 진찰한 결과 15센티 길이의 상처를 입었음이 밝혀졌다. 2주일간 치료한 다음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동년 12월에 열린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이때 일본인 재판장이 ‘부산의 박재혁, 남대문 역두에서의 강우규가 모두 사형되었음을 네가 알 터인데 어찌하여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느냐’고 힐책하는 조로 소감을 물으니, 최수봉은 ‘내 목적을 달성하였으면 나는 내 손으로 내 목숨을 끊으려 하였는데, 이제 너희들에게 잡히여 이 욕을 당하니 참말 통분할 뿐이라’고 반박했다 한다.
소위 검사 공소로 대구복심원 재판에서 1921년 4월 16일 기어이 사형이 언도되었고, 변호사에 의하여 경성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동년 5월 23일 상고기각의 확정판결로 1921년 7월 8일 하오 3시 대구감옥 교수대에서 ‘독립 만세’를 높이 부르고 목이 졸린 지 13분 만에 절명하니 방년 28세였다.”

1920년 11월 어느 날 최수봉은 상남면 기산리(岐山里) 묘지에서 옛 친우 김상윤(金相潤)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고, 그의 동행인이던 이종암(李鍾巖)과 셋이 함께 독립운동의 기세 거양 방법을 논하다 폭탄투척으로 밀양경찰서를 파괴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종암과 김상윤은 국외 망명 시절 폭탄제조법을 배워두었고, 제조기도 반입해 두었던 고인덕(高仁德)을 안학수(安鶴洙)의 소개로 만나서, 약품 등의 재료를 써서 대·소 폭탄 1개씩을 밀양 외곽 산속의 암굴에서 제작토록 하고, 송혜덕(宋惠德)에게 보관시켰다. 고인덕도 이때 의열단원이 되었다.
거사 일자는 밀양경찰서장 도변말차랑(渡邊末次郞) 경부가 매주 월요일 아침에 관내 순사들을 소집하여 훈시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월요일인 12월 27일로 잡았다. 그리고 거사 실행은 최수봉(崔壽鳳)과 이원경(李元慶) 2인이 같이 하기로 정하였다. 그런데, 이원경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서 최수봉 혼자 결행하게 되었다.
결국 밀양경찰서폭탄투척의거는 제1차 암살파괴계획에 의해 국내로 왔다가 실패한 후 은밀히 활동하던 초산과 이종암이 최경학 의사를 만남으로 인해 거사를 도모하게 되었으며, 밀양경찰서에 투척했던 폭탄도 초산과 이종암, 고인덕에 의해 밀양에서 제조된 것이었다.
제국의회폭탄투척 거사계획
밀양경찰서폭탄투척의거가 1920년 12월 27일이어서 제1차 암살파괴계획보다 늦은 의거였지만, 최경학 의사 혼자 재판을 받게 되는 바람에 빨리 진행된 데 비해, 제1차 암살파괴계획 실행을 위해 국내에 파견되었던 의열단원 등 15명은 심한 고문을 받았다. 1년여 만인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곽재기·이성우는 징역 8년, 김기득·신철휴·윤소룡·이낙준·황상규는 징역 7년, 윤치형은 징역 5년이 선고되는 등의 상황이 되자, 그동안 은신하며 활동하던 초산을 비롯한 의열단원은 다시 중국으로 향했다.
그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초인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던 김원봉은 초산을 비롯한 사상락, 이종암, 한봉근 등 옛 동료를 만나 단원을 모집하여 활로를 모색하기로 하였다.
1923년 9월 1일에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관동(關東) 지방에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지자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우리 교포 6천여 명을 학살하여 일본의 민중폭동을 사전에 방지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비참한 소식이 전해지자 우리 민족의 분노는 그야말로 금할 길이 없었다. 더욱이 조국 광복을 위해 몸 바쳐 싸우고 있던 의열단원의 분노는 더하였다.
그런데, 1924년 벽두에 일본 도쿄에서 소위 ‘제국의회’가 열려 이곳에 일본 총리를 비롯한 여러 대신과 조선총독이 참석한다는 신문 보도가 나돌게 되었다. 의열단에서는 초산과 윤자영(尹滋英) 등을 일본에 파견하기로 하였으나 경비와 폭탄이 없어 안타까운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이를 알게 된 김지섭(金祉燮)은 보복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기뻐하고 동경으로 건너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때 김지섭에게는 3년 전에 최윤동(崔允東)으로부터 얻어둔 폭탄 3개가 있었다. 김지섭이 김원봉에게 서신으로써 자신의 뜻을 밝히자, 김원봉은 ‘노비(路費)와 무기를 주지 못하는 단장으로서 가라, 가지 말라 할 수는 없으나 조선을 지나 정정당당하게 동경으로 진입하겠다는 그 정신에는 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초산과 윤자영은 가지 못하고, 김지섭만 동경으로 떠나려 할 때 윤자영은 일본인 친구 두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우리가 언제든지 고통의 원인이 금전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지만 금번이야말로 관계 가볍지 않은 경우에 어찌 애달프지 아니 하리오. 저의 출발 당시 일화(日貨) 40원 외에는 푼전을 가지지 아니한 것은 아시는 바이지요. 탑선 동시에 전송하는 양반이 3원의 대부를 구하기로 주었습니다. 선중에 가서는 하루 한 번 혹 두 번의 주먹밥을 아무 부식물 없이 먹게 되고, 담배 한 개의 준비도 없었으니, 중간에 심부름하는 사람에게 조금씩 주어 왜김치도 조금씩, 물도 이따금, 담배도 종종, 차입되는데 약 5원 돈이 12일간에 허비되고 상륙하여 여관에 도착하여 … 저의 여관비가 3박에 12원(차값 하녀 팁 합해서)이 되고 그동안 약간의 잡비가 3원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나머지가 불과 5원이요. 이곳서 목적지까지의 3등 차비만 하여도 15원이요. 또 최후일각까지 무엇이든 먹고 지내자면 소불과 4.5원이요. 목적지에 가서라도 여관비는 그만두고 전차비 인력거비 하녀 입막음, 적어도 4.5원이 없어서는 아니 되겠는데, 그런즉 부족이 20원 이상이라…
일본에 파견한 김지섭의 서신에서 당시 북경과 상해 등지에서 활동하던 광복지사들의 삶이 얼마나 궁핍했는지를 엿보게 한다.
김지섭 의사는 일본 제국의회에 폭탄투척을 계획했다가 의회가 폐회 중이라 일본 궁성 옆 이중교(二重橋)에 폭탄을 투척했다 현장에서 피체되어 무기징역(뒤에 20년으로 감형)이 선고되어 옥고를 치르다 순국하였다.
일제가 지목한 10인 중의 1인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在上海 不逞鮮人의 近情」(1925.2.13)이라는 이름으로 상해에서 활약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과 광복지사 56명의 정보를 제공하면서 이들을 체포해야 한다고 하자, 일본 외무대신 시데하라 키쥬로(幣原喜重郞)는 조선총독부와 협의한 후 주중상해총영사 야타 시치후토(矢田七太郞)에게 「在上海 不逞鮮人 取締에 관한 回訓」이라는 전보문을 보냈다.
대소 불령자 56명 일망타진하여 체포 인도할 것을 받았으나 숫자가 너무 많은 관계로 오히려 거괴(巨魁)를 놓치지 않도록 고려해서 그 직접 행동자라고 인정되는 10명(별전 제13호)은 이번 기회에 반드시 우리 손에 잡아두고 싶은 의향이 있다.…
<별전 제13호>
김구(金龜), 윤자영(尹滋英), 임득산(林得山), 김명현(金明鉉), 김원봉(金元鳳), 한봉근(韓鳳根), 이종암(李鍾岩, 일명 梁朱平), 김상윤(金相潤), 김두봉(金枓鳳), 김재덕(金在德)
이상 10명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 일망타진해야 하는 이른바 ‘불령선인 56명’ 가운데, 초산은 김구, 김원봉 등 일본 외무대신이 지목한 ‘불령선인 거괴(巨魁) 10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순국과 공적기록, 그리고 평가

초산의 아들 철환(鐵煥)이 세 살 때 부친과 작별한 1919년, 그 후 26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약산 김원봉은 초산의 후손을 찾아 의사의 순국을 알려 주었다.
“초산 김상윤 선생께서는 저와 함께 의열단을 창단하여 불같은 열정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하셨는데, 신해년(1927) 중국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아나키스트로 활동하시다가 그해 늦가을 어느 날 왜놈 밀정으로 추정되는 괴한으로부터 습격을 받아 서른한 살을 일기로 별세하셨는데, 해외 동지들이 천주 설봉사로 모셔서 장례를 치르고 묘비를 세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1992년 중국과 수교가 이루어져 유족들은 초산의 행적을 찾고자 1995년 6월에 유족과 친족 일행이 중국 복건성 천주 설봉사를 찾았으나, 이미 순국한지 68년이 지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유족 일행만의 쓸쓸한 위령제를 올린 후 흙 한줌을 옥함에 담아 밀양시 하남읍 남천리에 있는 초산의 배위이신 여주이씨 묘소에 쌍분을 짓고 환혼제를 올렸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05년 6월 11일 밀양시장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뜻을 모아 초산의 탄생지인 밀양시 상남면 기산리에 의열투쟁기념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
의열투쟁기념비를 건립한 지 10년이 지난 2015년 3월 28일 중국정부에서 후손들의 애틋한 정성을 받아들여 중국 복건성 천주시 설봉사 경내에 초산의 항일투쟁기적비를 건립하게 되었다.
2020년 6월 27일 서울현충원 충혼당에 초산의 위패와 아내 유골을 함께 봉안하게 되었고, 그해 11월 10일 밀양에서 ‘밀양독립운동사 공훈선양 학술회의’가 열려 초산을 비롯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의 공적을 찾고 얼을 기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