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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더 생각하는 역사 [2021/09] 대한제국은 왜 멸망했나?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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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배 계급의 부패가 빚은 비극 


암군(暗君)은 십상시(十常侍)보다 더 망국적이다


글 | 신복룡(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개항기 외국인들의 견문기에 따르면, 한국인은 대체로 불결하고 게으르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국인의 게으름이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 노역(勞役)의 과실(果實)들이 탐욕스러운 부패 관리들에게 갈취당하기에 십상이며, 그럼에도 이에 저항할 수 없다는 체념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그들은 설명한다. 많은 혁명과 개혁 세력이 등장하여 공익(公益)을 내세우면서 ‘더 좋은 삶’을 약속했지만, 부패는 늘 유산처럼 한국 사회를 짓눌렀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에게 애국심을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염치없는 일이다. 부패에 대한 반응은 분노가 아니라 체념이다. 부패에 지친 민중들은 조국을 위해 싸울 전의나 사기를 잃었다.  


한 국가의 멸망은 애상(哀喪, pathos)을 안겨 준다. 19세기에 들어오면, 조선왕조는 이미 국가로서의 활력을 잃은 채 타성으로 연명하는 ‘지루한 제국’(Empire of boredom, 이현휘)이었다. 부패로 말미암은 민중의 지친 삶은 조국의 운명에 대한 연민을 잃었다. 국가의 운명은 그들에게 그리 절박하지 않았다. 밖으로부터의 일격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지탱하기 어려운 국가의 특징은 암군(暗君)의 시대와 관료의 타락, 그리고 의욕을 잃은 민중의 삶이 동시에 벌어지며 그 결과는 끝내 왕조의 멸망을 이어진다. 이럴 경우에 외침(外侵)에 대한 저항력은 거의 무방비상태일 수밖에 없다. 


조선조의 관료는 왜 그리 부패했는가? 첫째로는 가난을 청빈이라는 이름으로 호도하며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유교적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청백리(淸白吏)라는 용어는 미담일 수는 있어도 바람직한 지도자상은 아니다. 유교에서의 교학과 노동의 차별과 분화는 생산성의 하락을 가져왔다. 세종(世宗)의 가르침처럼, “백성에게는 먹는 것이 하늘이었다.”  (.실록. 29/4/15) 


그러나 관료에게 청빈을 요구하는 풍조는 빈곤을 낳았고, 빈곤은 수탈을 낳았다. 청빈은 인간의 원초적 욕구에 대한 억압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가난에 초연한 사람은 신이거나 바보이다. ‘아름다운 가난’(good poor, L. Strachey)이라는 것은 이상일 뿐이다. 그것은 지식인의 허위의식이다. 사람이 풍성해지면 지체가 낮은 사람도 생각을 높이 갖도록 만든다.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죄악의 첫 동기는 재산에 대한 탐욕이었다. 따라서 스스로 물욕으로부터 얼마나 초연했는지 아닌지와 관계없이 성현들은 재산에 대한 탐욕을 끝없이 경계했다. 청빈을 미덕으로 여기는 것은 공자(孔子)의 고집스러운 교의였다. “오직 도를 깨우치지 못함을 걱정하되 가난을 걱정하지 말아야 하며, 선비가 살아가는 것을 걱정하면 이미 선비가 아니다.”(.논어.) 이와 같은 생산성의 외면은 빈곤을 낳는다. 그리고 정치인이 가난하면 부패라는 죄를 짓는다.(Numa) 


한국사에서 실학이 나타나기 이전까지 ‘노동의 발견’은 없었다. 실학자들이 노동의 의미를 발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고민한 것은 하층 계급의 몰락으로 말미암은 노동의 감소이지 노동의 극대화를 위한 방안은 아니었다. 한국사의 경우를 보면 한국인은 치부(致富)와 빈곤의 문제에 대하여 지나치게 엄격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가 그리 맑았던 것도 아니다. 부자라고 반드시 그 재산을 훔친 것은 아니며, 가난한 사람이라고 반드시 청렴한 것도 아니다. 이지함(李之菡)의 말처럼, 흔히 말하기를 “군자는 의(義)를 말하지 이(利)는 말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한가?


빈곤의 두 번째 이유는 토지제도의 모순이었다. 조선조의 토지제도는 장자상속제였다. 이 제도는 토지의 분산을 막고, 대지주제도(Latifundium)를 지속함으로써 토지의 효용률을 극대화하려는 제도였다. 이러한 제도는 지식인들의 토지 소유를 막는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고 이것이 빈곤-부패-수탈의 악순환의 고리를 이루었다. 그러나 조선 사회에서의 토지는 왕의 은급이거나 궁방토(宮房土)거나 과전(科田)이었다. 조선왕조의 개국 자체가 토지를 겸병하고 있는 훈구 주자학파에 대한 신흥 귀족의 토지 쟁패 투쟁이었다. 


사대부 사회를 이끌던 조직력은 전토(田土)를 상속하는 공신전(功臣田)이었다. 자식에게 상속되는 공신전은 이성계(李成桂)의 왕위 찬탈의 부도덕성을 호도하고 충성을 독점하려는 방법으로 광범위하게 실시했다. 이렇게 얻어진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사대부들은 인도주의적이지 않았다. 이를테면, (1) 토지 이탈의 불허 (2) 함부로 이름을 지을 수 없는 피휘(避諱) (3) 두로(斗栳, 말과 되)의 조작에 의한 착취 (4) 사형(私刑, lynch) (5) 초야권(初夜權)과 같은 지주의 횡포가 가능했던 것은 조선조에서는 토지를 나누어주는 사회 구조가 경직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는 토지가 토지를 낳지 않는다.”(Land breeds no land)는 비효통(費孝通)의 명제와는 달리, 조선에서는 “토지가 토지를 낳았다”. 사람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의지하며 사는 토지는 ‘영혼’(spirit)과 같은 것이었다.


토지 모순의 세 번째 문제점은 관료의 수탈이었다.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수탈은 그 자체로서 고통스러웠지만, 체념과 노동 의지의 상실이라는 악순환을 낳았다. 수탈은 대체로 조세 메커니즘을 통해서 이뤄졌다. 토지의 넓이에 따라서 징세할 것인지(田糧制), 아니면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서 조세할 것인지(田品制), 그도 아니면 풍흉에 따라서 징세할 것인지(損失制) 문제가 명료하지 않았고, 방백의 재량에 따라 달랐다. 구조적으로 볼 때 방백의 재량이 클수록 수탈의 정도도 더 커진다. 


그런데 개항기 외국인들의 견문기에 따르면, 한국인은 대체로 불결하고 게으르다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한국인들의 가난과 나태를 이야기할 때 한국인들이 게으른 결정적인 이유는 백성들이 일할 어떠한 동기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게으름이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 노역(勞役)의 과실(果實)들이 탐욕스러운 부패 관리들에게 갈취당하기에 십상이며, 그럼에도 이에 저항할 수 없다는 체념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그들은 설명한다. 


1890년대에 조선에 입국한 비숍(Isabella B. Bishop)이 놀란 것은 관료들의 부패였다. 그는 조선은 희망이 없는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비숍은 시베리아한인촌을 찾아본 뒤로 생각을 바꾸었다. 왜 조선 사람의 노동 의지와 생산성은 그토록 낮은가? 결론은 부패한 관리의 수탈 때문이었다. 아무리 뼈 빠지게 일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체념이 끝내 한국인을 가난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관리는 기생충이었다. 그래서 “한국인은 밖에 나가면 더 잘 사는 민족”이라고 그는 진단했다. 


결국 선비는 빈곤의 문제로 말미암아 시대정신의 변화에 자신이 적응하지 못한 채 타의적으로 현실에서 배제되었다. 그들은 수신(修身) 말고서는 자기 계발에 유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선비가 관료로 진출했을 때 부패로 확산하였다. 서세동점기에 초기 산업자본주의의 도입에 따른 사회 구조의 재편으로 이제 선비는 실존의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다. 


아테네의 장군 포키온(Phocion)의 말에 따르면, “젊은이들이 기꺼이 훈련을 받고, 부자들이 세금을 잘 내고, 정치인들이 도둑질을 하지 않는 데에도 멸망한 나라는 일찍이 없었다.” 부패한 나라, 부패한 정부, 부패한 지휘관이 이끄는 전쟁에서 승리한 사례는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다.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4년 전에 조선을 정탐하려고 왔던 다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는 “우리가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나라는 너무도 부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왕실과 관료의 부패였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노린 허점은 바로 왕실과 대신의 부패였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당초에 조선 지배층에 쓰기로 계산한 매수 자금은 3천만 엔(圓)이었다. 이는 송병준(宋秉濬)이 요구한 1억 엔에 많이 못 미치는 액수였다. 1904년 3월 13일에 이토는 궁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을 통해 황제에게 30만 엔, 엄비(嚴妃)에게 1만엔, 황태자 부부에게 5천 엔을 전달했다.(.일본외교문서. 37/1) 이 무렵 조선 왕실은 재정이 궁핍했다. 그럼에도 1906년 조선 황태자의 결혼 비용에 125만 엔을 썼다. 당시 일본 황태자(裕仁)의 결혼비용이 35만 엔이었으며, 조선의 육군의 1년 유지비 1,215만 엔이었다. 설명하자면 황태자의 결혼식 비용이 국방비의 10분의 1이었다. 


위의 글의 행간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는 망국의 원인이 무엇일까를 은연중에 보여주고 있다. 부패가 망국의 직접적인 이유는 되지 않을 수 있으나 그로 말미암은 민심의 이탈은 망국의 원인으로 맨앞에 서 있는 화두이다. 많은 혁명과 개혁 세력이 등장하여 공익(公益)을 내세우면서 ‘더 좋은 삶’을 약속했지만, 부패는 늘 유산처럼 한국 사회를 짓눌렀다. 이런 상황에서 민중에게 애국심을 요구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염치없는 일이다. 부패에 대한 반응은 분노가 아니라 체념이다. 부패에 지친 민중들은 조국을 위해 싸울 전의나 사기를 잃었다. 


“세계의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개의 거대한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경제”라는 관점은 케임브리지학파(Cambridge School)의 중요 명제였다. 인간의 삶에서 재산에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작용하지 않는다. 돈은 가치관을 마비시키고, 무엇이 공의로운지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한다. 


그런 상황에서 관료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조국의 운명은 그리 중요한 가치가 아니었다. 인간은 생계형 부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암묵적 동의를 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 부패가 위로 올라가 그것이 끝내 왕후(王侯)의 경지에 이를 때, 그 국가의 운명은 장담할 수 없다. 역사에는 지도자의 결심과 지혜가 그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 사례가 허다하다. 구한말의 운명이 그러했다. 


필자 신복룡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객원교수와 대한민국 학술원상 심사위원,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그리고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출판부장, 중앙도서관장, 대학원장,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는 『한국분단사연구』, 『한국사 새로 보기』, 『한국정치사상사』, 『해방정국의 풍경』, 『전봉준평전』, 역서 『한말 외국인기록』(전 23권)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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