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전설 [2021/09] 3월의 전설(73회) ┃ 경남 진주의 만세시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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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만 시위군중이 구름처럼 집결한 진주대첩
‘걸인독립단’ 태극기 들고 ‘기생독립단’ 만세 외쳐
글 | 이정은(3·1운동기념사업회장)
진주는 호국의 성지요 서부 경남의 중심 도시였다. 임진왜란 연전연패의 흑역사에서 최초의 찬란한 진주대첩이 이곳에서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권율장군의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였다. 3·1운동 때 진주는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였다. 서부 경남의 행정, 경제, 교육과 문화의 중심 도시로서 매달 음력 2일, 7일에 장이 서는데, 1만 명의 인파가 모여드는 곳이었다. 3·1운동도 호국의 성지 명성과 도청 소재지 위상에 걸맞게 일어났다. 1925년 도청을 부산으로 옮긴 것도 그 여파인지 모른다.
독립선언서 전달과 준비
진주에 선언서가 전달된 경로는 두어 갈래로 이야기된다. 하나는 진주의 청년 김재화, 조응래, 심두섭, 박대업, 정용길 등이 전 황제 고종의 국장에 참여하러 상경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직접 보고 독립선언서와 격문을 가지고 진주로 왔다는 것. 다른 하나는 천도교 진주교구의 신용구가 1919년 1월 8일부터 2월 25일까지 경주에서 열린 독립운동을 위한 경상도 천도교 지도자 49일 특별기도회에 참여하고, 서울 중앙총부에 갔다가 독립선언서를 받아 진주와 서부 경남지역에 선언서를 배포했다는 것. 아마 둘 다 사실일 것이다.
청년지사 이강우(李康雨)·김재화(金在華)·권채근(權采根)·강달영(姜達永)·박진환(朴進煥)·박용근(朴龍根)·강상호(姜相鎬) 등은 진주에서도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강우는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 법학과에 재학 중인 엘리트 청년이었고, 강달영은 천도교 진주대교구 전제원(典制員, 1915~1916)을 역임했으며, 1926년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박진환, 심두섭(沈斗燮), 정준교(鄭準敎)는 진주면 천전리 망경대(望京臺)에서 교유문(敎諭文) 이라는 제목으로 격문을 지어 1천 장을 인쇄했다. 이들은 비밀리에 격문을 배부하면서 인근 각 면 유지와 대중을 규합해 갔다.
한편 진주의 일제 군경은 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삼엄한 경계에 돌입했다. 각급 학교에 임시휴교를 명하고, 타지 학생들은 여비를 주어 서둘러 귀향시켰다. 일인 교사들에게는 학생들의 동태를 감시하여 정보를 탐지하도록 지령하였다.
이러한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이강우 등 청년지사들은 거사일을 3월 18일로 정했다.
이들은 재학시절 악대원(樂隊員)이었던 사립 광림학교(光林學校) 졸업생 천명옥(千命玉)·박성오(朴星午)·김영조(金永祚)·이영규(李永圭) 등 4인에게 시위행렬의 선두에서 주악(奏樂)을 부탁했다. 또한 김영조를 기독교회, 김재화(金在華)·강달영(姜達永)·박지환(朴進煥) 등은 사회단체를 담당하여 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교섭하였다.
주도자들은 진주 읍내를 3개 구역으로 나누었다. 제1구는 김재화·강달영을 책임자로 하여 동쪽 옥봉동(玉峰洞) 매립지에, 제2구는 심두섭·이강우를 책임자로 하여 읍내 북쪽 옛 객사자리의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 앞에, 제3구는 정준교·강주한(姜周漢)·박진환이 맡아 진주성 가까운 시장통에 집합처를 정했다.
또한 3월 18일 오전 11시에 교회의 종소리가 울리면 이를 신호로 3개 집결지에서 일제히 봉기하여 독립만세 시위에 돌입하기로 계획하였다.
3월 18일 1차 읍내 만세시위
3월 18일은 진주읍내 장날이었다. 읍내와 인근 사방에서 수많은 군중이 구름처럼 진주읍내 3개 집결지로 모여들었다. 오전 11시가 다가오자 타종(打鐘) 책임을 맡은 악대원 김영조는 진주교회로 달려갔다. 그러나 교회의 종이 철거되고 없었다. 당황한 김영조는 이 사실을 3곳의 집결지 지도부에 알리며 오후 1시 진주의 주산 비봉산정(飛鳳山頂)에서 나팔소리가 나면 거사하라고 다시 약속을 정하였다.
오후 1시 광림학교 악대였던 이영규(李永圭)는 비봉산 위에서 읍내를 향해 힘차게 나팔을 불었다. 3개 구 집결지에 모인 학생들은 감추어 둔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군중은 일제히 행동에 돌입했다.

제2구 재판소 부근에는 수천의 군중과 학생이 모였다. 나팔소리가 울리자 이강우(李康雨)가 등단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군중이 일제히 호응하니 독립만세 함성이 산천을 진동케 하였다.
이어서 악대가 선두에 서서 주악을 울리며 시위에 돌입했다. 일본 헌병과 경찰이 시위행렬을 막아섰으나 세 곳에서 수천 명씩 모여 읍내 중심으로 압박해 들어오는 시위대를 저지할 수 없었다. 급기야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물을 뿌려대고 곤봉과 소방 갈고리로 군중을 난타하였으나 군중은 흩어지지 않고 계속 밀고 들어왔다.
오후 4시경 3개 시위대열이 경상도청 앞에 모여들었을 때 군중은 약 3만 명을 헤아렸다. 일본군 헌병과 경찰은 주도자들 옷에 잉크를 뿌려 표시하고, 해가 저물기를 기다려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날 약 3백 명이 잡혀갔다. 그러나 시위대는 밤이 되어도 해산할 기미가 없었다. 시위 군중들은 작은 무리로 나뉘어 요소요소에 진을 치고 봉화를 올리며 계속 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오후 7시경 ‘노동독립단’을 표방한 대열이 등장하여 시위를 전개하고. 2시간 뒤에는 ‘걸인독립단(乞人獨立團)’이 시위를 전개하였다. 걸인들이 태극기를 들고 외쳤다.
“우리들이 떠돌며 걸식하게 된 것은 왜노들이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지 못하면 우리는 물론 2천만 동포가 모두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것이다.”

걸인들의 외침은 하층 서민 대중의 상황을 대변했다. 당시 일제 당국의 조선 쌀 비밀 매점, 반출로 조선의 쌀값이 천정부지로 폭등하여 서민 대중이 혹심한 굶주림 속에 있었다.
3월 19일 제2차 읍내 만세시위
다음날 3월 19일 진주읍내 조선 사람 상점은 모두 철시하였다. 오전 11시 읍내 중심가에 약 7천 명이 집결했다. ‘조선독립(朝鮮獨立)’이라 쓴 깃발과 태극기가 앞장서고, 큰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시위대를 이끌자, 군중들이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치며 뒤따랐다. 군중은 진주경찰서 앞에 이르자 경찰서를 향해 돌을 던지며 전날 수백 명을 구금한 것에 항의했다. 시위대가 경남도청 앞으로 나아가려 하자 경찰이 총칼로 제지했다. 청년들을 중심으로 경찰의 총칼에 투석으로 맞섰다. 그러나 총칼 앞에 일시 흩어지는 듯하던 군중이 곧 1만여 명으로 불어나 또다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논개의 후예 ‘기생독립단’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남강 변두리를 둘러 촉석루를 향하여 나아왔다. 일경 수십명이 달려와 이들을 막아서며 칼을 빼어 치려 하였다. 기생 한 명이 외쳤다. “우리가 죽어도 나라가 독립이 되면 한이 없다!”
기생들은 조금도 겁먹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일경들은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다. 그날 기생 6명이 검거되었다. 1919년 3월 25일 『매일신보』는 기생들의 시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후속보도를 하고 있다.
경남 진주 기생이 앞서서 형세 자못 불온
진주는 지금도 오히려 진정이 안되고 자꾸 소요가 일어날 형세가 있는데 19일은 진주 기생의 한 떼가 구한국 국기를 휘두르고 이에 참가한 노소 여자가 많이 뒤를 따라 진행하였으나 주모자 6명의 검속으로 해산되었는데 지금 불온한 기세가 진주에 충만하여 각처에 모여 있다더라.
오후 4시 30분 일본 군경의 총말 앞에서 일시 후퇴한 군중은 작은 대열로 나누어져 읍내 요소요소에 모여 밤 11까지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필자 이정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수석연구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3·1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3·1운동은 우리 독립운동사뿐만 아니라 한국근현대사에 있어 가장 크고도 깊은 영향을 끼친 사건으로, 이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