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1/09] 일제에 맞선 ‘생활 속 저항’ 농민·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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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동맹·고공농성으로 지켜낸 대한국민의 권리
목숨 건 소작쟁의·노동쟁의 반일민족주의 기초가 되다
글 | 편집부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일제강점기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 재조명되고 있다. 민족운동의 성격을 가진 ‘생활 속의 저항’이라는 점이 독립운동사에서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3·1운동에 앞장섰던 농민과 노동자들은 3·1 운동 이후 농민·노동단체들을 조직해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고, 일제에 반대하는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일제의 식량 침탈로 인한 열악한 사회경제적 상황 속에서 농민운동은 반일 민족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공업화 추진에 따라 값싼 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에 시달리던 노동자들 역시 노동쟁의를 일으키며 반제(反帝)·반일(反日) 투쟁으로 나아갔다.
1920~30년대 일본이 식민지 조선을 식량 원료공급지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반봉건적 지주·소작 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조선인은 8할 이상이 농민이었고, 또 그 가운데 8할이 소작농이었다. 조선인 소작농이 처한 열악한 사회·경제적 상황 가운데 농민운동은 반일 민족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농민들은 소작인회나 농민조합을 조직해 지주에 맞섰다. 전남 신안군의 암태도 농민들의 투쟁(1923)과 황해도 재령군 북률 농민들의 투쟁(1924)은 친일파 지주와 일제 당국에 맞서 2년여에 걸쳐 전개된 대표적인 ‘소작쟁의’였다.
노동자들은 ‘노동쟁의’를 일으켰다. 처음에는 일제의 식민지 공업화 추진에 따라 값싼 임금과 열악한 노동 조건에 시달리던 노동자에 의해 일어났다. 주로 일본인이 경영하는 공장에서 일어난 노동쟁의는 반제(反帝)·반일(反日) 투쟁으로서의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소작쟁의와 노동쟁의는 민중들이 직접 일어나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려는 운동이었으며, 민족적·계급적 차별을 폐지하려는 투쟁이었다. 그리하여 농민·노동자들의 투쟁은 사회주의 운동으로 이어지거나, 일제의 통치기관이나 민중 수탈기관에 대한 무력 공격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서태석·암태도 소작쟁의
바다 건너 육지로 번진 농민항쟁의 도화선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농민항쟁 가운데 첫손에 꼽히는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3년 8월부터 1924년 8월까지 만 1년간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이었다. 발단은 높은 소작료였다. 일제는 쌀값을 낮추는 저미가(低米價) 정책을 도입해 5할도 안 되던 소작료를 7∼8할로 올렸다. 이에 소작인들은 추수를 거부하며 소작료를 내지 않는 불납동맹으로 맞섰고, 소작인 수백 명이 배를 타고 목포까지 나가 경찰서와 법원 앞에서 농성을 벌였다. 굶어 죽겠다는 아사동맹(餓死同盟)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에도 들어갔다. 결국 바다를 건너 뭍에까지 들불처럼 번져 농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지지 선언과 후원이 잇따랐고, 결국 소작쟁의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한 일제는 소작료를 4할로 조정했다. 농민들의 대승리였다.

1924년 4월 전조선노동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상경한 그는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26년 석방된 후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전라도 대표 및 선전부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27년 9월 9일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 중앙집행위원으로 발탁되었다. 1928년 4월 또다시 체포되어 1930년 5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수차례의 수감과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 정신분열증을 앓게 된 그는 출소 후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각지를 떠돌다가 광복을 앞둔 1943년 6월 2일, 압해도의 어느 논둑에서 벼 포기를 움켜쥔 채 사망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공산당 활동을 한 이력 때문에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다가, 2003년에서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2008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강주룡·평양고무공장총파업
“여성 해방, 노동 해방” 외친 최초 고공농성

“우리는 49명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천 300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 나는 평원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해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동광, 1931년 7월호)
1901년 평안북도 강계에서 태어난 강주룡은 14세 때 가난에 쫓긴 가족을 따라 서간도로 이주했다. 1921년 20세의 나이로 통화현의 5세 연하 남편 최전빈을 만나 혼인했다. 24세 때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남편이 병사하자 시집에서 쫓겨났다. 이후 가족들과 조선으로 귀국해 평원고무공장 여공으로 일하며 가장 역할을 도맡았다.

1931년 5월 16일 평원고무공장 여공들의 단식파업은 평양의 2천 300명 고무직공들의 임금삭감에 대한 항의에서 비롯되었다. 강주룡은 1931년 5월 평원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하던 중 일경의 간섭으로 공장에서 쫓겨나자, 을밀대 지붕으로 올라가 무산자의 단결과 노동생활의 참상을 호소했다. 그는 줄타기하듯 올라간 지상 12미터 을밀대 지붕 위에 앉아 “여성 해방, 노동 해방”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8시간 만에 일경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내려진 그는 계속 단식하며 임금삭감에 저항했다. 고용주의 비인도성을 거세게 비판하며 벌인 단식투쟁으로 인해 일주일의 구류처분을 받았고, 옥중에서도 54시간 단식을 결행했다.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 증세로 1932년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병이 악화되어 두 달 만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