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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더 생각하는 역사 [2021/10] 10월에 통일의 단서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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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도 인정한 단군의 실체


남과 북, 평화와 공동번영 위해 노력해야


글 | 김학준(단국대학교 석좌교수) 

10월에는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좋은 의미에서건 그렇지 않은 의미에서건 큰 의미를 갖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대한제국의 멸망이 임박한 상황에서, 1909년 10월 26일에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침략의 주역으로 ‘조선통감’을 역임한 국적(國賊)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했다. 일제강점기인 1938년 10월 10일에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은 조선의용대 창설을 승인했다. 대한민국이 북한정권에 의해 공산화될 위기에서 유엔군의 참전에 힘입어 전세를 반전시킬 수 있었고 10월 1일에 대한민국 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해 10월 26일에는 마침내 압록강에 당도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통일은 눈앞에 닥쳤다. 이 험난했던 과정에서 수많은 군인이 호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한 배경이다. 

10월 8일 참혹한 을미사변
심약한 통치자는 국권상실의 원인

10월에는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좋은 의미에서건 그렇지 않은 의미에서건 큰 의미를 갖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필자는 그 일들 가운데 특히 순국 또는 순절과 관련되는 일들을 짚으면서 그것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고 있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 을미년인 1895년 10월 8일에 일어난 을미사변이다. 민비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제에 항거하는 이른바 인아거일정책을 추구하자, 무도한 일제는 폭력배를 동원해 한 나라의 국모를 무참히 살해한 것이 바로 을미사변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아버지 대원군이 가담했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대원군의 치적을 일정한 범위 안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과오였다고 생각한다. 자기에게 덤벼들고 자기를 견제하는 존재였기에 미움이 컸겠지만, 그렇다고 일제에 협력해 며느리 제거에 동참한 행위는 인륜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오늘날 국내정치는 매우 어지럽고,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는 지켜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을미사변을 떠올리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그것은 고종이 너무나 겁에 질려 밤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게 되자 서울의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차례로 함께 잘 것을 요구했고 그래서 그들이 불침번을 섰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심약한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을사년인 1905년에도, 경술년인 1910년에도 저항다운 저항의 소리를 질러보지 못하고 결국 국권을 잃지 않았는가. 통치자는 심지가 굳어야 하고 담대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 것이다.

10월 26일 하얼빈역 안중근 의거
우리 민족의 정신적 자산으로 승화

둘째, 그때로부터 2년 후인 1897년 10월 12일에 대한제국의 성립이 선포됐다. 광무황제로 격상된 고종은 개혁을 지향한다고 선포하고 이른바 광무개혁을 추진했으나 실효는 없다시피 했다. 고종 스스로 개혁에 대한 의지가 강하지 못했고 고질적인 부정부패의 구조 그 자체에 손을 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름은 거창하게 내걸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더 그르치는 오늘날의 정치현실을 되돌이켜 보게 만든다.

셋째, 일제는 1905년 10월 17일에 만주의 여순에 관동총독부를 신설하고 1907년 10월에 자신의 예하에 관동군을 신설했다. 본국정부의 육군부가 직접 지휘하는 관동군은 만주에서 조선인들이 중국인들과 함께 전개한 항일독립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함으로써 수많은 순국자를 낳게 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일제 관동군과 소련 극동군과의 점증하고 격화되는 대결에 상징된 일제와 소련의 대결이 결국 일제패망의 시점에서 한반도의 분할로 이어진다.

넷째, 대한제국의 멸망이 임박한 상황에서, 1909년 10월 26일에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두에서 조선침략의 주역으로 ‘조선통감’을 역임한 국적(國賊)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했다. 이 위대한 애국자는 1910년 3월 26일에 순국했지만 대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그의 살신성인의 행위와 그가 남긴 원고 「동양평화론」은 앞으로도 우리 민족에게 큰 정신적 자산이 될 것이다.

10월 10일 장개석 총통 
조선의용대 창설 승인 

다섯째, 애국자 나철은 1910년에 단군왕검을 신앙의 중심으로 삼는 대종교를 세우고, 단군이 개국한 것으로 추정되는 10월 3일을 개천절로 명명했다. 우리 대한민국은 오래전부터 개천절을 지켜왔음에 비해 북한은 단군 자체를 부인했는데, 1993년 10월 20일에 행한 김일성의 「단군릉개건방향에 대하여」라는 연설 이후 단군을 인정하고 1994년 10월 11일에 평양 근교의 강동군 대박산에서 단군릉 개건을 완료하면서 단군을 거국적으로 떠받들고 있다. 자신의 이념적 근거인 마르크시즘이 세계적으로 퇴조하자 새로운 정신적 지주를 단군에서 찾은 것이다.

북한의 이러한 태도변화는 단군을 주제로 하는 남북공동학술대회의 개최를 가능하게 했으며 그 결과 몇몇 책들이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상황에서는 아니지만, 앞으로 어떤 적절한 시점에 남과 북이 이 주제에 관한 공동의 연구와 토론을 심화시켜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길을 찾는 작업에서 하나의 명분으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여섯째, 일제강점기인 1938년 10월 10일에 중화민국 장개석 총통은 조선의용대 창설을 승인했다. 1919년 3·1운동 직후 만주에서 조선의열단을 창설하고 일제를 상대로 암살·파괴를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김원봉은 이로써 자신이 직접 지휘하는 군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조선의용대는 훗날 우여곡절을 거쳐 연안에서 조선의용군으로 확대된다.

10월 1일 대한민국 국군 
38선을 넘어 북진 시작

일곱째, 이제 대한민국으로 넘어와, 대한민국이 북한정권에 의해 공산화될 위기에서 유엔군의 참전에 힘입어 전세를 반전시킬 수 있었고 10월 1일에 대한민국 국군은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해 10월 26일에는 마침내 압록강에 당도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통일은 눈앞에 닥쳤다. 이 험난했던 과정에서 수많은 군인이 호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러한 배경에서, 대한민국정부는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해 기념해 왔다. 학계 일각에서는 국군의 날을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기관으로 한국광복군이 창군된 날인 9월 17일로 바꾸자는 주장이 있는 만큼 이것은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남겨놓기로 하자.

여덟째,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세계의 많은 문자들 가운데 한글만큼 우수하고 완벽한 문자는 찾기 어렵다. 자음과 모음을 합쳐 스물 넉 자만 갖고 소리 나는 대로 쓰고 읽을 수 있으니 세종과 그를 도와 한글을 만든 선현들을 새삼 우러르게 된다. 오늘날 우리 국민의 문맹률은 1퍼센트 미만이다. 학구열이 높기에 문자해득률이 백 퍼센트에 가까워진 것이지만, 배우기가 쉽다는 점에 힘입은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의 시대를 어떤 학자들은 ‘영어 제국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글로벌라이제이션, 곧 세계화의 시대에 영어의 국제적 통용력이 확대되면서 여타의 언어는 영향력을 잃어가고 있기에 그러한 신조어가 나왔을 것이다. 

이 말을 만든 사람들에 따르면, 앞으로 한 30년쯤 지났을 때 많은 언어들이 소멸하고 영어와 중국어와 스페인어 그리고 아랍어 정도만 남아 있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과연 그렇게 될 것인지 두고 보아야 할 것이지만, 한글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워낙 배우기가 쉽고, 한류의 확산으로 전세계 다양한 문화권에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열풍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동시가입 30주년
남북 평화의 길 걸어야

아홉째, 10월 24일은 유엔의 날이다. 오늘날 많은 국민이 잊고 있지만, 유엔이 한국을 지지하는 결의안도 통과시키고 북한을 지지하는 결의안도 통과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과 유엔을 연결해준 언커크(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를 해체한 1973년까지 우리나라는 유엔의 날을 기념했고 공휴일로 정하기도 했었다.

유엔은 대한민국 탄생을 뒷받침했고 대한민국에 정통성을 부여했으며, 6·25전쟁 때 대한민국의 생존을 위해 유엔군을 보낸 세계기구이다. 남과 북은 1991년 9월 17일(한국시간 18일)에 유엔에 동시가입했으니, 올해는 30주년이 된다. 우리나라는 유엔 회원국이 됨으로써 자신의 활동영역을 전 세계로 확대할 수 있었고, 이것은 우리나라가 세계 10대국의 일원으로 성장함에 있어서 일정하게 기여했다. 대조적으로,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은 ‘분단을 고착화시키고 두 개의 조선을 조작하는 국제적 음모’의 발상이라 반대하지만 동시가입안이 통과될 것이 확실한 현실을 고려해 받아들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면서 유엔에 들어온 북한은 그 편협하고 교조주의적 정세관의 영향으로 쇠퇴의 길을 걸어왔다. 

10월은 9월에 이어 풍성한 수확의 계절이다. 우리는 지난날의 잘잘못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말고 자유민주주의의 깃발 아래 대한민국을 굳게 지키면서 남과 북의 평화와 공동번영이라는 열매를 거두도록 노력하자.  

필자 김학준 
1943년 중국 심양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켄트주립대와 피츠버그대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단국대학교 이사장, 인천대학교 총장, 동아일보사 사장·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단국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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