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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독립운동가 [2021/11] 선비들의 마지막 선택 자정순국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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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치욕 앞에 스스로 목숨 끊어 저항


한민족의 가장 극렬한 항거이자 

항일정신 일깨운 뜨거운 울림


글 | 편집부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나라를 따른다.’ 일제 통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한민족의 가장 극렬한 저항이 곧 목숨을 끊는 ‘자정순국(自靖殉國)’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 상황에서 전국 70여 명이 망국의 치욕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항거했다. 우물에 몸을 던졌고, 음독을 결행했고, 기둥에 머리를 찧어 목숨을 거두었다. 물과 음식을 끊어 ‘단식’이라는 가장 처절한 항거를 택한 선비들도 잇따랐다. 이들의 자정순국은 백성들의 항일투쟁에 불을 붙이는 기폭제 역할을 했으며, 이후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등 의열투쟁으로 번져나갔다.  


한말 4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매천 황현은 “내가 꼭 죽어야 할 의리는 없으나 국가에서 선비를 길러온 지 500년이 됐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이르러 이를 부끄럽게 여겨 죽은 선비가 하나도 없다면 어찌 통탄치 않으리오”라며 죽음을 택했다. 일유제 장태수는 김제 남강정사에서 “개와 말까지도 능히 주인의 은덕을 생각하는데, 역적 신하들은 어찌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팔 수 있는가” 통탄하며 곡기를 끊은 지 24일 만에 순절했다. 금산군수 홍범식은 “죽을지언정 친일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객사 뒤뜰 소나무에 목을 맸다.


성균관박사 김근배는 일제가 일왕의 하사금인 은사금을 주고 회유하려 하자 “살아서 능욕당하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하다”며 큰 돌을 품에 안고 우물에 뛰어들었다. 관인 정동식은 “내가 힘이 없어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으나 그 부끄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전주 공북루에 올라가 자결했다.


고양의 김석진, 안동의 권용하, 홍성의 이근주, 순창의 공치봉, 양반부인 심씨, 중추원 의관 송주면, 궁중내관 반하경, 백정 황돌쇠 등 선비뿐 아니라 전·현직관리, 양반집 부인, 백정까지도 단 하나뿐인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 


이만도·이중언

숙부의 의로운 길 조카가 뒤따라 


“을미년 국모 시해 사건에 한 차례 죽지 못했고, 을사늑약 때 두 번째로 죽지 못했다. 산으로 들어가 구차스럽게 생명을 연장했던 것은 오히려 기다림이 있어서였다. 이제는 희망이 끊어졌다. 죽지 않고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향산 이만도가 ‘청구일기(靑丘日記)’에서 쓴 처절한 글귀다.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를 지낸 향산은 1895년 단발령에 항거, 창의했으며 1910년 한일병탄 소식을 듣고 조상의 묘소에서 통곡하며 24일간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고 지내다가 10월 10일 69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나라에 보탬이 되지 않는 ‘소용(所用)’ 없는 목숨을 유지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끝내 단식 자결을 택한 향산은 안동 독립운동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항일독립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대락과 이상용, 김동삼 등 애국지사들이 눈 내리는 엄동설한에 만주벌판으로 떠나 무장투쟁을 이끌게 되었다. 


동은 이중언은 향산을 태운 상여가 마을로 들어오자 시신을 부둥켜안고 “숙부 잘 돌아가셨습니다. 조카도 마땅히 숙부를 따르겠습니다” 통곡하며 곧바로 음식을 끊었다. 그리고 ‘경고문(警告文)’을 지어 “나라가 무너진 마당에 오직 나아갈 길은 사생취의, 목숨 던져 의로움을 택하는 것뿐”이라 했다. 스스로 한목숨 던져 의로움을 세울 것이니 쉽게 꺾이지 말고 뜻을 세워 맞서 싸울 것을 동포들에게 경고했다.


이중언은 1881년 만인소를 올려 나라가 잘못되고 있다고 지적했고, 1895년 의병을 일으켜 싸워도 보았다. 1905년 을사늑약에 ‘을사5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나라가 망했으니 자신이 택할 길은 오직 ‘의(義)’ 뿐이라 생각했다. 단식 27일 만인 11월 5일 세상을 떠나면서 가족과 후세들에게 ‘봉(封)’이라 적은 경고문으로 죽음의 교훈을 남겼다.


유도발·유신영

아버지는 ‘충’을 위해, 아들은 ‘충효’ 위해 


서애 류성룡의 10·11세손인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 유도발·유신영 부자는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죽음에 이르자 함께 자정순국을 택했다.


유도발은 세상이 어지럽게 변하자 경북 군위군 비안의 덕암리로 거처를 옮겨 스스로 회은(晦隱)이라 하고 농사를 지었다. 그러던 중 1910년 8월 한일병탄 소식을 듣고 안동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이만도와 이면주의 순국이 잇따르고 마을마다 국왕을 상징해 모셔두었던 ‘전패(殿牌)’마저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으며 통탄했다. 11월 11일 덕암으로 돌아온 그는 음식을 끊었다. 남의 나라 백성 되는 게 싫고, 앞으로 닥칠 해가 얼마나 될지 힘들고, 구차하게 사는 길을 찾는 것이 욕되고 욕된다는 이유였다. 11월 27일, 단식 17일째 되던 날 세상을 떠났다. 그의 순국 소식에 전국 유림과 선비들이 하루 동안 밥을 짓지 않는 등 애도했다. 그는 벼슬하지 않은 선비로서 대의를 실천하고 대절(大節)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아들 유신영은 1884년 갑신정변이 터지자 과거 준비를 포기하고 글 읽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진 이후 호서의진과 안동의진에 나섰다. 1905년 외교권을 빼앗기자 또다시 세상과 등지고 책만 읽었다. 1910년 나라가 망하고 아버지가 단식에 들어갔다. 아들은 아버지의 17일간의 단식 자결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삼년상을 마치고 충북 보은 속리산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하던 그에게 고종의 독살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광무황제 장례식날 목숨을 끊기로 마음먹었다. 1919년 3월 3일이었다. 그 뜻을 가족과 지인들에게 알렸다. “아버지께서 의(義)에 죽기로 맹세하던 날 따라 죽고 싶었으나 임금께서 계시니 의병 일으켜 후일을 기다렸으나 임금이 독시돼 복수할 힘조차 없으니 구차하게 사는 게 비루하지 않는가?” 3·1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있던 이틀 뒤인 3월 3일 그는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유신영의 순국에 선비들은 “아버지는 나라를 위해 죽고, 자식은 임금과 아버지를 위해 죽었으니 참으로 충효가세(忠孝家世)”라고 했다. 


이명우·권성

남편은 충의의 길, 아내는 의부의 길


이명우는 안동 예안면 부포마을에서 퇴계의 후손으로 태어나 1894년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진사가 되었다. 이듬해인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발하자 나랏일을 애통하게 여겼으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엔 칩거에 들어갔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근심과 분노로 건강은 더욱 쇠약해졌다. 이때 이미 목숨을 끊어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려는 뜻을 품었으나, 아직 부모가 살아있어 잠시 접어두었다.


1912년 부친이 돌아가시고, 1918년 모친상에 이어 두 달만인 12월 광무황제가 붕어했다는 소식을 듣자 서쪽을 향해 통곡하고, 아침저녁으로 망곡(望哭)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1920년 12월 19일, 상기(喪期)가 끝나는 날 부부는 독을 마셨다. 부부가 함께 자결순국한 유일한 사례다. 부부는 죽음에 앞서 유서를 남겼다. 이명우는 ‘비통사(悲痛辭)’와 ‘경고(警告)’, ‘유계(遺戒)’, ‘분사(憤辭)’에 망국의 한을 담았다. 부인 권성은 다섯 통의 한글 유서를 남겼다. 세 아들과 친정 동생, 시숙부와 시숙, 두 며느리에게 주는 글이다. 모두 ‘성재옹유고(誠齋翁遺稿)’에 실려있다.


이명우의 죽음에는 분함과 부끄러움이 자리했다. 그는 ‘비통사’에서 “나라를 잃고 10여 년 동안 분통함과 부끄러움을 참았으나 이제는 뜻을 이루려 한다”고 밝혔다. 나라 잃은 부끄러움에 임금 잃은 부끄러움이 더해졌으니 더 이상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남편의 길에 부인 권성이 함께했다. 권성은 세 아들에게 “너의 아버님께서 평생에 의리가 많아 이제 뜻을 이루려 하니 나도 같이 따르려 한다. 부부의 의리는 군신의 의리와 같으니 무슨 한이 있겠느냐”는 글을 남겼다. 17세에 결혼해 35년간 함께했던 남편을 따른 것이다. 권성은 그렇게 ‘의부(義婦)의 길’을 당당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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